복잡하고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 지면에 소화하지 못한 뒷이야기를 동아일보 정치부가 배달합니다. 냉정하고 치열한 외교안보 현안 속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 사람 이야기, 알아두면 쏠쏠한 정보들까지. 때론 A컷보다도 눈에 띄는 B컷의 무대로 초대합니다.
‘간첩단’ 사건이 화제입니다. (집권 여당 대표가 “종북 간첩단과 전쟁을 선포하겠다”고 했으니 간첩단이라 쓰겠습니다) 이 지하조직은 창원, 제주 등 전국 각지에서 활동했다고 합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최근 구속수감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 조직국장은 경기 평택·오산의 주한미군 기지까지 들어가 군사시설을 둘러본 뒤 사진을 찍은 혐의를 받습니다. 뉴스를 접한 시민들은 충격이란 반응입니다. 아직도 간첩이 있냐는 거죠.
그럴 만도 합니다. 지나가다 마주칠 법한 누군가가 수시로 동남아 등지에 가서 선글라스를 낀 북한 공작원과 접선해 지령까지 받았다는 보도를, 2023년 지금 접하고 있으니까요. 국가정보원 등 공안당국은 민노총 관계자를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국가보안시설 자료를 수집하라”는 등 다수의 북한 지령문까지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간첩단 뉴스를 접한 시민들 반응을 보면 정작 뜨거운 관심사는 또 따로 있습니다. 바로 이 질문. “그 점퍼는 대체 뭐냐.” 제 지인들도 국정원을 취재하는 필자에게 간첩단 실체보다도 오히려 그 점퍼의 실체에 먼저 관심을 보였습니다.
● “국정원 직원이 맞긴 하냐”
그럼 논란의 점퍼를 먼저 볼까요. ‘국가정보원’ 글씨가 또박또박 선명하게 적혀 있는 저 옷.
우선 드는 궁금증. 저 점퍼를 입은 이들이 국정원 관계자가 맞긴 할까요. 제 지인 중 누군가는 사진을 보더니 대뜸 “‘국가정보원’이라 쓴 글씨체가 너무 촌스럽다”고 꼬집었습니다. 이어 빛의 속도로 “국정원 직원이 아니다”란 결론까지 내렸죠. 영화에서 본, 화려한 액션으로 무장한 국정원 직원을 떠올리니 글씨체와 매칭이 안 된다는 1차원적인 이유였습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그 판단이 무색하게 저들은 국정원 관계자가 맞습니다.
대중에게 저 점퍼가 각인된 건 최근 간첩단 사건이 화제가 되면서부터입니다. 국정원 직원들이 민노총 거점 등 이곳저곳 압수수색을 할 때 저 점퍼를 입고 들이닥치니 자연스럽게 자주 노출된 거죠. 어쨌든 정답은 여기저기 사진에 찍힌 저 ‘점퍼맨’들이 모두 국정원 관계자란 겁니다.
자, 여기서 생기는 다른 궁금증. 대체 국정원 직원들이 왜 대놓고 ‘국가정보원’ 글씨가 선명하게 찍힌 옷을 입고 다닐까요. 알다시피 국정원은 음지에서 일하는 곳이죠. 보안이 생명입니다.
국정원 원훈(院訓)마저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입니다. 앞서 문재인 정부 땐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으로 바꿨지만 새 정부가 들어섰고 1년 만에 예전 원훈으로 원상복구 됐습니다.
국정원 직원들은 명함에도 ‘회사명(국정원 직원들은 스스로 회사원이라 부릅니다)’을 적지 않습니다. 신분을 위장하죠. 제가 아는 누군가는 국정원 ‘입사’ 후 지인들에게까지 알만한 A 대기업에 다닌다면서 신분을 숨겼습니다. 정부 부처들은 웬만한 직급까진 조직도를 모두 공개하지만 국정원은 원장과 1~3차장, 기조실장 정도만 이름을 밝힙니다. 차관급까지만 공개하는 거죠. 그만큼 보안이 철저합니다.
● FBI는 입고, CIA는 안 입고
이런 국정원인데 왜 대놓고 ‘국가정보원’이라 찍힌 점퍼를 입었을까요. 학교 이름을 큼직하게 박은 듯한, 대학생들이 입을 법한 ‘과잠’같은 점퍼를.
먼저 국정원 측에 문의했습니다. 공식적인 답변은 이랬습니다. “법 집행 현장에서 수사관과 일반인 사이 구분이 쉽지 않다. 수사관 얼굴이 언론에 생생하게 노출되는 보안성 취약 문제가 있지만 간첩·반국가사범을 체포·압수수색하는 현장에서 신속하고 엄격한 법 집행을 하고, 대국민 신뢰도 제고를 위해 유니폼을 착용 중이다. 선진 외국 수사기관인 미연방수사국(FBI)과 영국 국가범죄수사국(NCA) 사례를 준용해 유니폼을 제작·착용하고 있다.”
국정원이 언급한 FBI 요원들의 경우 실제 ‘FBI’라 적힌 옷을 입고 나타나기도 합니다. 어느 스릴러 영화 한 장면에서 본 것 같기도 하네요.
반면 FBI와 함께 양대 정보기관으로 꼽히는 미 중앙정보국(CIA)은 어떨까요. CIA라 적힌 옷을 입고 등장한 영화의 주인공을 본 적이 있나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신분을 숨기죠.
FBI, CIA 모두 정보를 다루는 조직인 건 마찬가진데 왜 다를까요. 국정원 관계자는 이 질문에 “FBI는 미국 내 수사에 초점을 맞춘 조직인 반면, CIA는 주로 해외 정보에 초점을 맞춘다”라고 했습니다. 수사 대상이나 범위, 영역이 다르기에 FBI가 찍힌 옷을 입은 요원은 있지만 CIA라 찍힌 옷을 입은 요원은 우리가 볼 수 없단 겁니다.
그럼 국정원은 FBI에 해당할까요, CIA에 해당할까요. 정답은 둘 다입니다. 영역이 나눠진 미국, 영국과 달리 국정원은 국내외 정보 업무를 사실상 모두 전담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FBI나 영국 NCA처럼 국정원도 ‘국가정보원’이라 쓴 옷을 입는다는 게 국정원 관계자의 설명입니다.
● 그 점퍼, 언제부터 입었나
나름 합당한 근거인 듯하죠? 그런데 이런 국정원의 점퍼 착용을 또 불편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즘 인터넷 게시판이나 정치 유튜브 등을 보면 국정원을 겨냥해 온갖 조롱 섞인 추론이 난무합니다. 어떤 이들은 “없는 간첩을 있는 것처럼 만들려고 국정원이 점퍼를 새로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국정원이 일을 열심히 한다고 홍보하려고 굳이 입었다는 거죠. 또 경찰에 대공 수사권을 넘겨야 하는 상황에서 조직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 무리수를 뒀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심지어 국정원이 미국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저러고 다닌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비판의 시작점은 대체로 “국정원이 이번에 저 점퍼를 처음 입었다”는 가설에 근거합니다. 국정원이 모종의 이유로 급하게 옷을 만들어 있었다는 ‘음모론’까지 제기하면서.
여기서 또 궁금증. 국정원이 진짜 이번에 처음 저 점퍼를 급조해 입은 건 맞을까요.
나름 취재에 열을 올렸지만 음모론의 실체를 밝혀줄 객관적 문서 등은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신뢰할 만한 복수의 정부 소식통을 통해 저 점퍼를 처음 입은 건 윤석열 정부가 아닌, 문재인 정부 때부터란 사실은 확인했습니다. 한 소식통은 “언제 처음 저 옷을 제작한 건 확실치 않다”면서도 “문재인 정부 때부터 저 점퍼를 입은 건 맞다”고 했습니다. 다른 소식통은 “문재인 정부 때 국정원 개혁을 한다면서 발칵 뒤집어 놓지 않았느냐”고 했습니다. 전 정부가 국정원의 국내 정보 수집 업무를 전면 폐지하는 등 과정에서 ‘투명한 국정원’을 내세우며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고, 이때 아예 국정원 이름이 적힌 옷까지 입게 된 것이란 얘기죠.
정황을 종합하면 문재인 정부 때도 저 점퍼를 입은 건 맞는 것 같습니다. 다만 그때 점퍼를 처음 입었다 해도 요즘 훨씬 노출이 많이 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국정원이 결국 모종의 의도를 갖고 노출 빈도를 요즘 급격히 늘린 것 아니냐는 의혹 역시 설득력이 완전히 없진 않다는 얘기죠.
국정원 점퍼를 입는 기준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긴 할까요. 일단 국정원 측은 “무조건 점퍼를 착용해야 하는 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수사 대상, 성격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입을지 판단한다는 거죠. 바꿔 말하면 점퍼 착용을 판단하는 과정에 딱 정해진 기준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아무튼 국정원은 이런저런 말들을 뒤로 하고 저 점퍼 교체 여부를 검토 중이라고 합니다. 일단 한글로 쓴 기조는 유지할 걸로 보입니다. ‘국가정보원’ 대신 ‘국정원’으로 글자수를 줄이거나, 글씨체를 바꿀 가능성은 있다고 하네요.
전 국정원 고위 관계자는 점퍼 착용에 대해 물었더니 대뜸 이런 말을 툭 던졌습니다. “문재인 정부 때 간첩 수사 자체를 제대로 하긴 했느냐”고. 아무래도 문재인 정부가 대북 관계에 공을 들이다 보니 간첩 수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을 테고, 저 점퍼를 입을 일 자체가 없었을 거란 냉소입니다. 이 관계자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적어도 대공 수사만큼은 국정원이 정치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앞만 보는 경주마처럼 일관되게, 또 우직하게 해나가야 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