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체와 ‘정부 승인시 계약’ 합의서
문정인 사임당일 무단 계약 체결”
외교부가 문정인 전 세종재단법인 이사장이 3월 사임 당일 계약한 세종연구소 부동산 임대사업에 대해 “외교부 승인 없이 체결돼 효력이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25일 확인됐다. 세종연구소는 외교부에 등록된 국가정책연구재단으로, 최근 자본 잠식에 가까운 재정난을 겪고 있다.
외교부에 따르면 문 전 이사장은 3월 14일 경기 성남의 연구소 부지 3만8000㎡에 대해 제조업과 의류 브랜드 사업을 겸하고 있는 A사와 최장 90년 임대계약을 맺고 이곳에 대형복합건물을 짓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연구소 본관을 허물고 짓는 복합건물 옆에 새로운 연구소를 건설하고, 그 사업비 6000억여 원은 A사가 모두 부담하지만 토지 용도 변경을 위한 기부채납용 임대주택 건설비 400억 원은 연구소가 채무를 지는 식이다. 연구소 전·현직 관계자들에 따르면 계약이 진행되면 A사와의 협상을 거쳐 연구소가 매년 112억 원의 임대수익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연구소는 공익법인의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재산상 중대 변동이 발생할 경우 외교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실제로 문 전 이사장은 계약 닷새 전인 3월 9일 A사와 “주무 관청(외교부)의 사업 승인 완료 시 공식적으로 계약을 체결한다”는 내용의 합의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이후 외교부의 승인이 없는 상태에서 본인의 사임이 의결된 3월 14일 계약을 체결했다. 연구소 관계자는 “이사장이 공석이 되면 일이 언제 될지 모른다는 판단 아래 이사진 중 개발 사업 쪽에 해박한 변호사 한 명이 ‘도장을 찍어도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줘 계약했다”고 밝혔다.
문 전 이사장은 이날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내가 ‘떠나는 사람이 꼭 할 필요 있냐’고 했는데 이사들이 ‘외교부에 제출할 준비가 돼 있다, 지금 이 시간까지는 이사장님이시고 지금까지 합의해서 만든 건데 이사장 대행은 날인을 할 수가 없으니 새로운 이사장이 오는 기간까지 기다리면 연구소가 (재정적) 손해를 볼 수도 있어서 날인을 해주고 갔으면 좋겠다’는 말에 날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급작스럽게 사임하는 날 날인을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난해 10월 로펌들과 협의해 계약서의 기본은 있었다. 다만 A사와 임대료 계산일 때문에 합의를 못 본 부분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자금난에 시달리는 연구소는 계약한 날짜부터 임대료를 내라고 주장했고 A사는 일반적으로 빌린 땅에 건물이 들어서서 입주하는 순간부터 계산일로 잡아야 한다고 맞섰다는 것이다. 문 전 이사장은 “결국 3~4개월 동안 협의해 필요할 때 A사가 지불보증을 해서 은행에서 연구소가 융자를 받을 수 있도록 금융 편의를 제공해주는 식으로 합의를 보고 재단 이사회에서 결정했다”고 전했다.
반면 외교부는 이 계약이 진행되려면 자연 녹지로 돼 있는 해당 부지의 용도 변경이 성남시로부터 이뤄져야 하고, 외교부의 사업 승인도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외교부 관계자는 “법적 효력이 없는 계약을 맺은 점을 납득하기 어려운 데다, 연구소에서 사업 승인을 공식 요청한 바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연구소 측은 “계약서는 외교부의 사전 승인 대상이 아니다”라고 했다. 문 전 이사장도 “기본 자산을 매각하거나 용도를 변경해서 임대사업을 하게 되면 외교부 허가를 받는 것이고 계약서는 부대적인 문건으로 제출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계약서에는 A사가 연구소의 사전 동의 없이 임차권을 처분할 수 없다고 정하면서도 제3의 시행법인에 임차권 지위를 이전할 경우 신축 공사비 마련 등의 명목으로 돈을 빌리기 위해 임차권을 담보할 수 있다는 내용도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제3의 법인을 정해 A사가 임차권을 넘기면 해당 법인이 이를 담보로 돈을 빌릴 수 있는 셈이다.
이 경우 법인이 부도가 나면 임차권은 금융기관으로 넘어가고, 연구소는 최장 90년간 아무 권리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하지만 연구소 관계자는 “우리 측과 A사 측 법무법인이 수차례 법률 검토를 통해 법적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A사는 ‘외교부 승인 없이 체결한 계약이 무효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등을 질의하자 “내용을 더 파악해 봐야 해서 잘 모른다”고 했다. 시행법인과 관련한 계약에 대해서도 “공식 입장이 없다”고 밝혔다.
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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