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법조팀장을 맡고 있는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
김한길 국민통합위원장(이하 김한길)은 여의도에서 ‘전략기획통’으로 불린 대표적인 ‘브레인’이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선거 기획을 맡았고 DJ정부 청와대 정책기획수석비서관, 노무현 전 대통령 인수위 기획특보, 새천년민주당과 열린우리당 의원 시절 전략기획위원장, 총선기획단장 등 그의 이력엔 유독 ‘기획(企劃)’이 많다. 2000년과 2004년 두 번이나 총선기획단장을 맡은 것은 거의 전례가 없다. 선거 ‘판’을 짜고 ‘킹메이커’ 역할을 잘하는, 여의도식 표현으로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2016년 20년 가까이 몸담았던 민주당을 떠난 뒤 국민의당을 거쳐 윤석열 대통령을 도와 현재 장관급 국민통합위원장을 지내고 있다. 애연가였던 그는 2018년 폐암으로 사경을 헤맸지만 신약을 통해 기적적으로 완치됐고, 다시 정치의 중심에 뛰어들었다.
야당 지지자들은 그가 탈당했을 때마다 그를 향해 간혹 ‘창당 전문가’라거나 ‘정당 브레이커(breaker)’라는 등의 비난을 해왔다. 민주당에 있을 때부터 중도 노선으로 ‘우클릭’한다는 공격도 받았다.
하지만 그가 실천해온 정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티면서 희망을 탐색하는 직업’이요, DJ의 금언인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조화시키는 중도실용의 정치였을 것이다. DJ가 영입했지만 그는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과 같은 DJ맨도 아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를 아꼈지만 친노(친노무현)계와 특히 각을 세우며 ‘계파 패권주의’를 외친, 어쩌면 정치권의 외로운 이방인이었다.
● 金에게 ‘제갈공명’급으로 평가한 김중권 전 비서실장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김한길은 1996년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DJ에 의해 영입돼 새정치국민회의 비례대표 후보로 당선되며 정치인으로 변신한다. 총선 선대위 대변인을 거쳐 총재특보, 1997년 대선에서 TV 토론회 등을 맡아 DJ의 승리를 이끌었고 대통령직인수위원이자 당선자 공보팀장, 대변인 등으로 활약했다.
1999년 3월 대통령정책기획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되면서 비례대표 의원직을 사퇴했다. 정책기획수석으로서 각종 정책 조율과 행사 기획, 국정홍보 등을 맡았다. 소설가이자 방송인 경험을 활용해 DJ의 메시지 및 홍보전략 등을 맡았던 것이다.
2000년 총선을 앞둔 1999년 11월 총선 출마자들이 청와대를 나가자 DJ는 “실장도 나가고, 정무수석도 그만두는데 김한길 수석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 김 수석은 여기 남아 계속 나를 도와주어야 한다”며 김한길의 총선 출마를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DJ가 마음을 바꾸면서 그에게 “총선기획단장을 맡아라”는 임무를 주며 2000년 새천년민주당 비례대표 후보로 총선에 내보냈고 그는 다시 국회로 돌아왔다. 당 총재를 겸하던 DJ가 그에게 비례대표 의원직을 두 번이나 준 것이다.
DJ는 그해 9월엔 박지원 당시 장관의 후임으로 그를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지명해 김한길은 1년간 내각 경험을 쌓았다. 2001년 10월 비례대표 의원직을 버리고 서울 구로을 재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DJ 정부의 김중권 전 대통령비서실장은 함께 호흡을 맞췄던 김한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역사가들은 중국 역사상 뛰어난 참모의 전형으로 제갈공명을 거론하면서 그를 ‘식치(識治)의 양재(良才)’라고 평했다. 어려운 시기에 대통령을 지근 거리에서 보좌하면서 그의 진면목을 직접 체험한 사람의 입장에서 평하자면, 김 수석은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식치의 양재’라는 평가가 결코 과분하지 않은 사람이다.”
- ‘김한길의 희망정치’ 추천사에서 -
김한길은 DJ에 대해 자주 언급하지 않았지만 “아버지 같은 분”이라며 “내가 평가하기에 너무나 큰 거인”이라고 했다.
● “김한길 아니었으면 내 당선도 없었다”고 했던 盧
김한길은 향후 비노(비노무현)계의 좌장, 수장으로 불렸지만 친노, 친문(친문재인)의 계파주의를 경계했을 뿐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사감’은 없었다.
2002년 9월 대선 지지율이 하락했던 노 전 대통령은 김한길을 찾아와 도와달라고 했다. 선대위 미디어특별본부장을 맡기면서 사실상 전권을 줬다고 한다. 그는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 협상에선 노 후보 측 협상단 대표로 나서 정 후보 측과 단일화 협상을 타결하기도 했다. 대선 직후에는 당선자 기획특보를 맡았다.
노 전 대통령은 그를 아꼈다는 일화도 많다. 대선 승리 뒤 소장파 의원들과 부부동반으로 63빌딩에서 자체 축하연을 하고 있는데 바로 옆방에 노 전 대통령이 다른 사람들과 식사 중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잠깐 그 자리에 들러 김한길 부부를 앞으로 나오라고 한 뒤 “김한길 본부장 아니었으면 내 당선도 어려웠을 것이다”고 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의원들의 입장에선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후 김한길은 다른 의원들로부터 은근한 견제를 받았다고 한다.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이 추진되자 그도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에 합류했고 2004년 17대 총선 서울 구로을 지역구에서 당선됐다. 3선 의원으로서 당시 국회 건설교통위원장을 지냈고 2006년엔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88 대 49의 역대급 표 차이로 당선됐다.
하지만 2006년 6월 치러진 4회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16개 광역단체 중 전북 1곳에서만 이기고 당시 한나라당이 광역자치단체 12곳을 차지하는 등 참패하고 2007년 대선 패배 위기감이 돌자 당내 신당 논의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같은 해 11월 당시 원내대표였던 김한길은 국회 교섭단체대표연설에서 “열린우리당의 창당은 우리 정치사에 크게 기록될 만한 의미 있는 정치실험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치실험을 마감하고 지켜가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려내서 또 한 번 ‘다시 시작하는 아침’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탈당하기 전날 청와대에 가서 노 전 대통령을 만났다. 그는 “당시 박상천 대표의 ‘꼬마 민주당’과 힘을 합쳐야 된다”고 주장했지만 노 전 대통령은 “지역주의 극복을 외친 내가 어떻게 지역당과 합치냐”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열린우리당을 나오기 전날 만난 노 전 대통령은 내 옆에서 가슴을 치면서 ‘우리가 이렇게 헤어지더라도 내가 김 대표에게 진 마음의 빚은 여기에 담아두고 잊지 않겠습니다’고 말씀하시더라. 그 때문인지 노 전 대통령이 탈당한 다른 의원들에 대해선 실명을 거론하며 비난했지만 나에 대해서는 끝까지 욕을 안 했다. 그 마음의 빚이라는 게 이런 건가 나중에 생각했다.” - 취재 메모 중 -
결국 김한길은 열린우리당을 탈당해 2007년 통합신당모임을 이끌며 중도개혁통합신당을 창당했고 열린우리당 창당 당시 분당됐던 민주당과 통합 등 합종연횡 과정을 거쳐 11월 대통합민주신당으로의 통합을 완성시키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2007년 12월 대선은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의 참패로 끝났다. 김한길은 “대선 참패 후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지적이 매우 아프다. 나를 버려 우리가 사는 데 도움이 된다면 나부터 기득권을 버려야겠기에 18대 총선 불출마를 결심했다”며 불출마를 선언했다. 당시 서울에서 구로을을 포함한 4곳만 민주당 승리가 예상됐는데 당선될 수 있는 사람이 책임을 져야 된다는 생각이었다.
● 4선 의원으로 복귀하자마자 전당대회 출마
4년간 야인으로 지냈지만 공백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4년 뒤 김한길은 선거를 한 달여 앞두고 서울 광진갑에 전략공천을 받아 당선됐다. 한명숙 당시 대표의 출마 권유를 여러 차례 사양했지만 공천 마감일이 끝난 뒤에도 출마 요구가 거듭되자 이를 거절하지 못한 것이다. 대선을 8개월 앞둔 시기였다.
김한길은 총선 직후 당선자 신분이 된 2012년 4월부터 존재감을 보였다. 그는 “총선 패배의 중요한 원인이 계파 공천”이라며 쓴소리를 시작했고 당시 ‘이해찬 당 대표-박지원 원내대표’로 지도부를 꾸리자는 이른바 ‘이-박 담합’ 논란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는 곧장 주변 의원들의 독려를 받아 6·9 전당대회에 당 대표 후보로 나섰다. 이해찬 전 대표가 24.3%(6만7658표)를 얻어 김한길(23.8%·6만6187표)을 0.5%포인트(1471표) 차로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충남과 부산을 제외한 지역 대의원 투표에서 김한길이 앞서 있었지만 모바일 투표에서 결과가 뒤집어졌다. 모바일 선거인단 불법 모집 의혹이 불거졌지만 그는 승복을 선언했다. 몇 년 뒤 그가 했던 이야기다.
“2012년 당 대표 경선에서는 모바일 투표에서 뒤집히면서 내가 지고 이해찬이 당선되지 않았나. 나를 따르던 의원들은 전부 다 불복 선언하라고 난리를 쳤다. 그런데 그때가 대선 6개월 남았을 때다. 내가 불복하면 당이 엉망이 되고 대선에서 이길 가능성이 없어질 거 같았다. 그래서 이해찬 대표에게 다음 날 ‘결과를 수용하겠다. 대신 이번 지방 경선에서 나타난 당원들 표심을 잊지 말아 달라’고 했고 이 대표도 ‘알겠다’고 했다.” - 취재 메모 중 -
이후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문재인 전 대통령과 안철수 후보 측이 단일화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안 후보 측이 당 혁신을 요구해 11월 이해찬 당시 대표가 사퇴했다. 대선에서도 패배하면서 이듬해 치러진 5·4 전당대회에서 김한길이 당 대표로 선출됐다.
● 야당 대표 시절, 정권교체 위해 안철수 신당과 통합 결단
제1야당 대표가 된 김한길은 그해 8월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의혹 등에 대한 대통령의 사과 등을 요구하며 45일간 서울광장 천막당사에서 노숙 농성을 벌이며 박근혜 정부와 각을 세웠다. 국회를 식물 상태로 마비시켰다는 비판도 받았지만 야당의 존재감을 보여줬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었다.
다음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그의 일화다.
“처음 만난 게 ‘박근혜 수필가’였다. 내가 MBC 토크쇼 진행할 때였는데 여러 차례 출연 제의가 들어왔다. 클로징 멘트에서 ‘우리는 동갑인데 같은 세월을 살았지만 서로가 너무 다른 세월을 살았다. 박근혜 씨가 어머니를 대신해 청와대에서 안주인 노릇을 하는 동안 나는 긴급조치로 감옥에 갇힌 아버지를 면회 다니면서 세월을 까먹은 사람이다. 이렇게 다른 우리가 한 시간 동안이나 사이좋게 얘기한 것은 아마 좋은 일일 겁니다’ 뭐 이런 멘트였는데 이거를 빼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나가긴 나갔더라. (중략) 대통령이 돼서도 회동하면 편하게 얘기했다. 박 대통령도 격식을 안 따지더라. 항상 준비 많이 해서 수첩에 빼곡히 써온다. 중간에 내가 말을 끊고 하면 다시 볼펜으로 짚어가면서 써온 것을 읽더라. 내가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시절에 박 대통령이 여당 대표였다. 생일날 꽃을 사 들고 찾아갔더니 기자들이 많이 와 있는데 기자들에게 그가 ‘우리가 동갑인데 난 머리에 물감을 안 들였다’고 내 백발을 가리키며 얘기해 한바탕 웃었다. 재밌는 구석이 있다.” - 취재 메모 중 -
김한길은 2014년 3월 창당을 추진하던 안철수 의원 측과 합당을 선언해 새정치민주연합을 출범시켰다. 중도층을 흡수하고 야권 통합을 이뤄내야 정권교체와 대선 승리가 가능하다는 평소 소신을 발휘한 것이다.
북한인권법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켰고, 북한의 무력도발을 비판하는 등 튼튼한 안보를 강조하며 중도 노선을 강화했다. 그 탓에 당내 친문 진영 등 전통적인 지지층으로부터 ‘우클릭’을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비판을 감수하며 “진영 논리와 막말과 이전투구로 국민을 불안하고 걱정하게 만들었던 정치와 결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합당한 뒤 안철수 의원과 함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를 맡았던 그는 7·30 재·보궐선거에서 패배하자 다음 날 즉각 당 대표직에서 사퇴했다. 이후 비대위 체제를 이어가던 당은 2015년 2·8 전당대회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이 대표로 선출되며 친문-비문 진영 간 갈등이 극심해졌다. 이 무렵부터 김한길도 제3지대 신당 창당과 ‘창조적 파괴’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2015년 1월 그가 했던 이야기다.
“우리 정치가 전반적으로 양당 중심 체제에서 적대적 공생 관계에 안주하고 있다는 지적을 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지적을 극복하기 위한 진지한 모색이 있어야 된다. 중요한 문제예요. 지금은 이념과 지역과 세대 간의 일종의 분열을 기반으로 기득권을 누리고 있다고 볼 수 있거든요. 과감하게 그 기득권을 벗어버린다는 각오가 있어야 우리 정치에 새로운 장이 열리지 않겠는가. 적대적 공생이 아닌 경쟁적 상생 관계가 되어야 국민으로부터 박수를 받고 국민이 정치에 희망을 가지지 않겠나.” - 취재 메모 중 -
이후 김한길은 친문 진영의 패권정치에 절망하다가 안철수 의원과 함께 국민의당을 창당했다. 2016년 총선을 앞두고 당시 야권의 압도적 승리를 위해 민주당과 수도권에서의 야권연대를 강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자 책임 정치 차원에서 불출마를 선언했다. 당시 국민의당은 38석을 얻어 약진했다. 연대를 거부한 안 의원이 옳았다는 시각도 있지만 만약 김한길의 주장대로 야권연대가 성사됐다면 (국민의당이) 더 큰 성과를 거뒀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결과적으로 박 전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치러진 2017년 5·9대선에서 문 전 대통령이 당선됐다. 정치권의 제갈공명으로 불렸던 그의 판단도 결과적으론 어긋난 셈이다.
● 2013년 국정원 댓글 수사팀장이던 尹과 묘한 인연… 킹메이커 된 金
국민의당의 대선 주자였던 안철수 의원은 대선에서 패배했고 바른미래당과 합당하며 결국 사라졌다. 안 의원이 다시 국민의당을 창당했지만 그마저도 2022년 국민의힘과 통합됐다.
이 무렵 김한길은 정치무대에 거의 나서지 않으며 휴지기를 가졌다. 폐암 선고를 받은 뒤 방사선 치료 등을 받고 2018년 12월 3주가량 의식을 잃을 정도로 사경을 헤맸다. 다행히 신약이 몸에 잘 맞아 사실상 완치됐다. 자연스럽게 정계를 은퇴한 것으로 보였지만 세상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유력 야권 대선주자로 급부상하면서 그를 찾아왔고 그는 결과적으로 킹메이커로 다시 성공한다.
어찌 보면 윤 대통령이 지금 자리에 있는 것도 김한길과 무관치 않다. 당시 김한길은 의원총회에서 2013년 국정원 댓글 수사팀장이었던 윤 대통령에 대해 “윤석열 검사와 같이 정의로운 검사를 야당 국회의원들이 보호하지 못하면 안 된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이에 야당 법사위원들이 윤 대통령을 국감 증인으로 신청했다. 이어 법사위에 나온 윤 대통령은 외압을 폭로하며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기면서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날 김한길도 법사위 회의실을 찾아 구석에서 ‘검사 윤석열’을 멀리서 처음 봤다고 한다.
김한길은 윤 대통령에 대한 마음의 빚도 있었다. 장외투쟁을 하던 김한길이 박 전 대통령과 영수회담에서 윤석열 검사 등 댓글수사팀의 신분 보호를 요구했는데 이듬해 1월 인사에서 좌천됐기 때문이다. 자신의 요구가 오히려 윤 대통령을 좌천되게 한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김한길은 2014년 7·30 재보선 당시 대구고검으로 좌천됐던 윤 대통령에게 출마 의사를 타진하기도 했다. 2019년 5월 서울중앙지검장 시절 윤 대통령이 했던 이야기다.
“김한길 전 민주당 대표가 2014년에 누구 통해서 재보선 나오라고 하길래 ‘정치 안 합니다’고 했어. 2016년에도 민주당, 국민의당에서도 전화가 오더라고. 근데 내 적성도 아니고 국정원 사건 재판 진행 중인데 정치판 간다는 게 말이 안 돼서 기분 안 나쁘게 거절했어. 재판 진행 중인데 성향이 야당 쪽이라 기소한 거 아니냐는 말 나올 수 있으니까 당에 부담될 거라고 말했어.” - 취재 메모 중 -
이후 종종 만남을 이어오던 두 사람은 검찰총장직에서 사퇴한 윤 대통령이 본격적으로 대선 출마를 결심하면서 정치적 멘토와 멘티 관계로 발전했고 김한길은 또 한 번 킹메이커로 불렸다.
● 尹과 자주 독대하며 현안 논의
“행정부와 입법부 관계라고 볼 때 이 여당과 청와대 역시 견제와 균형이 원칙인 것이죠. 우리 정치가 크게 잘못된 거 하나가 청와대가 여의도를 우습게 여긴다는 거죠. 청와대와 여당과의 관계는 굉장히 어려운 관계거든요. 청와대가 여의도, 국회를 업신여겨서는 안 되고요. 특히 여당과의 관계가 여당이 청와대의 졸이 아니잖아요. 문제가 크지요. (중략) 왜 정치의 중심이 국회여야 하냐. 어쨌든 국회의원들은 민심에 민감하니까 이렇게 막무가내 할 수 없거든요.” - 취재 메모 중 -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5년 1월 김한길이 필자에게 했던 이야기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윤석열 정부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김한길은 윤 대통령과 자주 독대하며 현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조언과 쓴소리도 적지 않게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 대통령을 돕기로 한 그였지만 모든 게 계획된 대로 흘러간 것 같지는 않다. 김한길과 가까웠던 한 야당 인사는 김한길로부터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의힘이 아닌 제3지대로 갈 줄 알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적대적 공생관계인 양당제를 깨고 제3당을 꿈꿨던 것이다.
다음은 김한길의 말이다. 그를 향한 세상의 삐딱한 시선에 대한 항변이자 이상주의자의 면모가 드러난다.
“지난 대선 마지막 토론회에서 윤석열 이재명 안철수 등 모든 후보들이 정치발전의 첫 단계로 한국이 다당제가 돼야 된다는 데 동의했다. 다당제는 결국 양당이 아닌 제3당이 있어야 된다. 정당 설립은 범죄도 아니고 헌법에 있는 기본권이다. 그런데 창당하려고 하면 여기저기서 벌떼같이 달려들어 공격을 받고 창당하려고 하면 역적이 된다. 내가 비록 실패는 했지만 3당을 만들려고 했던 노력들이 적어도 비난받을 대상은 아니지 않을까. 내가 대선 끝나고 본 문구 중 마음에 와닿는 문구가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세상도 수많은 이상주의자의 좌절을 통해서 이룩된 것이다’는 말이다.”
정치권에선 김한길 위원장의 향후 역할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대통령비서실장, 국무총리 등 현 정부에서 윤석열 정부의 성공을 위해 역할을 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의 어깨가 무거운 이유입니다.
김 위원장은 윤 대통령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습니다. 솔직하고 뚝심 있고 적어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보기보다 훨씬 더 괜찮은 정치인이라는 것입니다. 정치 경험이 적은 윤 대통령의 부족한 점을 그가 잘 채워주고 그가 말했던 ‘인간화의 시대’를 여는 데 기여하기를 기대합니다.
다음 [22화]는 다시 야당 정치인으로 넘어갈 예정입니다. 지난 정부의 ‘킹메이커’로 불린, 호불호와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야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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