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6월 어느 아침. 남루한 행색의 14세 소년이 풀밭을 헤치며 두만강 기슭을 헤매고 있었다. 울먹이며 삼촌을 애타게 불렀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간밤 소년은 30대 후반의 외삼촌과 함께 두만강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서로 손을 꽉 잡고 강물을 헤쳤지만, 비 온 뒤의 두만강은 겉으로 보기보다 훨씬 물살이 셌다.
어느새 둘은 손을 놓고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소년은 바닷가에서 자라 수영에 자신 있었지만, 발아래서 돌이 굴러가는 급물살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무작정 손을 휘저으며 버틸 뿐이었다.
어느 순간 소년은 물살에 휩쓸려 정신을 잃었다. 옆에서 “어푸, 어푸”하는 외삼촌의 비명을 들은 것도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소년은 강기슭에서 눈을 떴다. 날이 훤히 밝아 있었다. 강 건너편을 보니 북한이었다. 저녁 8시에 두만강에 뛰어들었는데 간밤의 기억을 잃어버렸다.
정신이 돌아오자 소년은 외삼촌을 찾기 시작했다.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두만강 기슭을 오르내리며 몇 시간째. 하지만 끝내 외삼촌은 보이지 않았다. 시신도 없이 사라진 외삼촌을 찾으며 소년은 홀로 앉아 엉엉 울었다.
22년이 흐른 2019년. 소년은 대한민국에서 탈북민 1호 변호사가 됐다. 북한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다 가족과 생이별하고 중국에서 소년공으로 일하며 “하나님, 저에게 제발 공부할 기회를 주세요”라고 애타게 기도했던 소년은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 왔고 20세에 영어 알파벳부터 배우기 시작했지만, 어떤 역경도 그를 주저앉히진 못했다. 법무법인 이래의 이영현 변호사가 그 주인공이다.
● 두만강에서 외삼촌을 잃다
이영현은 1983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걸어서 몇 시간 떨어져 있는 작은 어촌마을에서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수산협동조합 어부였고, 어머니는 협동농장 농민이었다. 부친은 너무 일찍 돌아가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가 인민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막 올라갈 무렵, 북한엔 엄혹한 ‘고난의 행군’이 닥쳐왔다. 농민인 어머니가 혼자 세 아들을 벌어 먹여야 했다. 노쇠한 시어머니도 한 집에서 살았다.
배급이 끊어지자 영현의 형제들은 학교를 가지 않고 어머니를 도와 먹고 살기 위해 뭐든 다 했다. 영현도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왔고, 나무껍질을 벗겨왔다. 그래도 하루 한 끼 풀죽도 먹기 힘들었다.
나이든 할머니부터 쓰러졌다. 먹지 못해 힘없이 누워 있던 할머니는 고난의 행군 첫 해인 1995년을 넘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이듬해엔 같은 마을에 살던 삼촌도 굶어죽었다.
굶어 죽어가도 아무 대책이 없었던 마을 사람들에 비해 그나마 영현의 가족에겐 믿을 곳이 한 군데 있었다. 어머니 친척들이 중국에 있었던 것이다.
1997년 6월 인근에 살던 외삼촌이 집에 찾아와 중국으로 가자고 했다. 어머니는 14살 영현을 딸려 보냈다.
“삼촌 따라가서 꼭 쌀 한 배낭이라도 메고 와.”
둘은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기차를 타고 며칠 고생한 끝에 마침내 두만강 옆인 한반도 최북단 함북 온성에 도착했다. 친척들의 전화번호를 모르니 국경에 가서 중국에 전화를 할 수도 없었다. 강을 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돈이 없어 국경경비대를 매수할 수도 없었다. 30대 후반의 외삼촌은 어느 날 영현을 데리고 두만강 옆 도로를 따라 걸으면서 어디로 건너가면 좋을지 정찰하기 시작했다. 1997년은 국경경비대도 많지 않았던 터라 도강할 장소가 몇 군데 눈에 들어왔다.
외삼촌이 택한 곳은 두만강 폭이 50m 정도 되는 훈춘 맞은편의 어느 야산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때는 큰비가 내린지 얼마 되지 않던 때였다. 하지만 강에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 도로에서 보니 물살이 얼마나 센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 어둠이 내리자 외삼촌과 영현은 봐두었던 도강지점으로 이동했다. 어둠 속에서 본 두만강은 유유히 흘러갈 뿐이었다. 어촌마을에서 자란 영현은 어려서부터 바다에서 놀아 물이 두렵지 않았고, 수영에도 자신이 있었다. 외삼촌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손을 잡고 강에 들어갔다. 멀리 강 하구에 보이는 중국 마을이 이들의 목표였다. 떠내려가더라도 앞으로만 헤엄쳐 간다면 마을 근처에선 땅에 발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장마 뒤의 강물은 바다와 전혀 달랐다. 허리까지 들어가자 더는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둘은 저도 모르게 손을 놓치고 말았다. 이젠 계획한 대로 앞으로 헤엄쳐 가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그런 물살에선 헤엄도 제대로 칠 수가 없었다. 그냥 본능적으로 손을 휘저을 뿐이었다. 어두운 두만강에서 영현은 외삼촌을 잃어버렸지만 약속한대로 중국을 향해 무작정 헤엄쳐 나가다가 정신을 잃었다.
● 소년을 구해준 조선족 부부
아침에 정신을 차린 영현은 두만강 상류를 향해 걸었다. 삼촌은 자기보다 더 빨리 기슭에 도착했을 것 같았다. 아무리 올라가도 삼촌은 보이지 않았다. 서너 시간을 걸어갔을 때 눈앞에 중국 마을이 나타났다. 간밤 목표로 삼았던 그 마을이었다.
마을이 보이자 소년은 그제야 자신이 처한 현실이 서서히 실감나기 시작했다.
“삼촌은 죽었구나. 이제 어떻게 할까. 마을에서 쌀 한 배낭을 구걸해 집으로 돌아갈까.”
집에 너무 가고 싶었다. 그런데 두만강을 보니 다시 뛰어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참을 고심하다가 소년은 마을로 들어가 어느 집 문을 두드렸다.
“저는 조선에서 왔는데, 삼촌은 강을 넘어오다가 빠져 돌아가셨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 그러니 밥 한 그릇만 좀 주세요.”
중년의 부부가 내다보더니 혀를 찼다.
“이틀 전에도 조선에서 건너온 사람들 도와주었는데 또 왔구나. 일단 들어와라.”
영현은 집에 들어갔다. 주는 밥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자 부부는 또 한 공기를 퍼주었다. 또 먹었다. 그렇게 서너 공기를 먹고 나니 밥이 없었다.
“우리는 밭에 일하러 가야 해. 너는 집에서 씻고 쉬어라.”
훈춘의 조선족 농부 부부는 너무 친절했다. 영현은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처음 본 애한테 밥도 주고, 문도 잠그지 않고 나가다니….”
강을 하나 넘었을 뿐인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밥을 몇 공기나 먹었지만 여전히 배가 고팠다.
부엌에 나가 보니 누룽지가 보였다. 그는 그것도 다 먹었다.
저녁에 돌아온 부부는 “어린 애가 어떻게 이걸 다 먹었냐”고 깜짝 놀랐다.
그 집에서 며칠을 머물렀다. 조선족 부부는 친척을 찾는 것도 도와주었다. 소년은 외삼촌이 오면서 중국 친척들의 이름과 사는 지역을 이야기해주었던 것을 기억했다. 그걸 토대로 두꺼운 전화번호부를 뒤지며 해당 지역 친척과 같은 이름의 전화번호에 무작정 전화를 해봤는데 이것이 성공했다. 찾아낸 친척은 길림에서 살았는데, 고위직이었다.
친척은 “내가 고위직이라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집에 드나들기 때문에 북에서 월경한 아이를 데리고 있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친척인데 모르는 척 할 수는 없어 네가 지낼 곳을 찾아주겠다”고 말했다.
친척이 알려준 주소로 가니 훈춘의 어느 농촌마을이었다. 친척은 탈북 아이들을 돌보는 조선족 전도사를 수소문해냈던 것이다. 전도사는 소년을 보고 다시 어딘가에 연락했다. 한 남자가 나타났다. 새로 나타난 남자는 조선족 집사였는데, 북에서 온 아이를 키우고 싶다고 미리 연락을 해두었던 참이었다.
남자를 따라 나섰다. 기차를 타고 멀리 멀리 따라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도착한 곳은 만리장성 동쪽 끝에 있는 항구도시인 허베이(河北) 성 친황다오(秦皇島)였다.
● 학교 벽에 매달린 14세 소년공
집사를 따라 시내 변두리의 집에 들어가니 한눈에 봐도 가난해 보였다. 그리고 집사에겐 그와 비슷한 또래의 아들 두 명이 더 있었다.
집에 들어가자 부인이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니, 상의 없이 아이를 데려오면 어떻게 해?”
집사는 못들은 척 대꾸를 하지 않았다. 며칠 뒤 그는 소년을 데리고 파출소에 갔다. 공안들에게 “연변에 살던 친척집 아이가 고아가 돼 데리고 왔다”고 신고하자 그들은 알았다고 끄덕였다. 아직 탈북자가 있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한 동네였던 것이다.
집사는 며칠 있다 또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러자 “어린 애가 무슨 밥을 그리 먹냐”는 부인의 타박이 더 심해졌다.
그렇게 한달쯤 눈칫밥을 먹던 영현은 일을 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 집과 가깝게 지내는 친구 중에 페인트칠을 위주로 하는 인테리어 업자 한족이 있었는데, 그가 영현을 보자 데리고 다니며 일을 배워주겠다고 한 것이다.
집사 부인이 다 낡았지만 그래도 굴러가는 자전거를 하나 가져다주었다. 영현은 그 자전거를 타고 업자를 따라다녔다.
아침 7시에 집을 나가 밤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오는 일상이 반복됐다. 당시 중국에서 국수 한 그릇이 2위안이었는데, 영현은 8위안을 하루 일당으로 받아왔다. 번 돈은 모두 집사 부인에게 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달라졌다. 밥도 많이 주고 그때부터 “아들, 아들”하며 살갑게 대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곳에서 영현은 2000년까지 3년 남짓 살았다. 가끔 학교 외벽 페인트칠을 할 때도 있었다. 밧줄을 타고 벽에 매달려 페인트칠을 하던 10대 중반의 영현은 교실 안에서 교과서를 읽는 자기 또래의 아이들을 볼 때마다 울먹이며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제발 저에게도 공부할 기회를 주세요.”
● 다시 찾아간 연변
조선족 집사가 영현을 데리고 온 이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하루는 그가 베이징에 가자며 영현을 데리고 나섰다. 베이징에서 만난 사람은 미국 국적의 한인 선교사였다. 중국에서 피터은(본명 은춘표)이란 이름으로 활동한 그는 미국의 한 한인교회 장로로 있다가 조선족 선교를 하러 중국에 왔다. 하지만 대량 탈북을 알게 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이때 그가 아는 조선족 집사가 탈북 아이를 보호하고 있다고 하자 한번 보자고 한 것이다. 베이징에 간 영현은 일주일 정도 은 선교사와 머물며 성경 공부를 했다. 돌아갈 때는 용돈도 넉넉히 주었는데 그 돈은 집사 부인에게 모두 넘겨주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선교사는 집사에게 영현의 중국 호적을 사라고 5000위안도 주었다. 당시엔 중국에서 2년 가까이 쓰지 않고 벌어야 모을 수 있는 돈이었지만, 그 돈도 집사가 다 착복했다. 영현을 집에 데려온 것은 미국이나 한국 선교사들에게 내세워 앵벌이를 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하지만 그 덕분에 영현은 1년에 한두 번 베이징으로 가 머물며 한인 선교사와 친해졌다. 2000년경이 되자 은 선교사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예 연변에 머물며 박사 신분으로 바꾸어 탈북민 사역에 매진했다.
그는 자신이 만난 1호 탈북 소년인 영현을 편법을 써서 단둥에 있는 조선족 학교에 넣어주었다. 하지만 호구도 없이 임시로 들어간 학교에서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두 달쯤 지나자 학교 선생들이 영현을 의심하면서 호구를 제출하라고 닥달질하기 시작했다. 더 버틸 수는 없었다. 영현은 야반도주하듯이 단둥을 떠나 연변에 자리 잡은 은 선교사에게 찾아갔다.
● 하늘이 도운 한국행
은 선교사는 수많은 탈북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연변 지역의 어느 깊은 산중에 탈북민 정착촌을 만들었다. 탈북민들은 산을 개간해 농사도 짓고, 가축도 키웠다.
갑자기 외진 산골짜기에 사람들이 모여 사니 신고가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마을은 공안에 적발돼 얼마 유지되지 못했다.
은 선교사는 연변의 농촌에 기술학교도 만들었다. 중국 애들도 공부를 했지만, 탈북민 아이들도 그 학교에서 함께 공부했다.
탈북민 아이들은 농촌에 있는 주택에서 은 선교사와 함께 살면서 학교를 다녔다. 영현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2002년 3월 탈북민 25명이 베이징 주재 스페인 대사관에 집단 진입하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조용히 숨어살 수는 있었다.
그런데 그 25명 중에는 은 선교사와 한 집에서 살던 소녀도 있었다. 스페인 대사관 진입 사건은 중국에서 큰 뉴스로 다뤄졌다. TV에서 대사관 진입 장면이 반복해서 나오자, 동네 주민이 알아봤다. “저 여자애는 여기서 살며 학교 다니던 애였는데 탈북한 애였네.”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아이들은 공포에 떨었다. 같이 살던 아이들이 갑자기 하나둘 사라졌다. 며칠 지나니 영현이 살던 집에 남아있는 애들은 3명뿐이었다.
은 선교사도 심각성을 알았다. 그는 어느 조선족 집사에게 아이들을 한국으로 보낼 수 있는 길을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조선족 집사는 몽골 국경까지 사전답사한 뒤 돌아왔다.
4월 20일에 한국으로 떠나기로 날짜가 정해졌다. 하지만 집사가 강경했다. 여기서 더 머무는 것은 너무 위험하니 지체없이 떠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이 받아들여져 아이들은 19일에 집을 나섰다. 25살 여성과 19살 영현, 14살 소년이 한 팀이었다. 그들은 기차를 타고 내몽골 도시까지 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연변에서 들려온 소식을 들었다.
그들이 떠나자마자 중무장한 공안 100여명이 트럭 여러 대에 나눠 타고 그들의 은신처를 급습했다는 것이다. 미처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체포됐다. 은 선교사도 함께 체포돼 50일 넘게 조사를 받은 뒤 미국으로 추방됐다. 이후 그는 중국에 다시 가지 못했다.
조선족 집사는 이들을 국경까지 안내해주었다. 그리고 별 하나를 가리키며, 저쪽으로 계속 가면 몽골이니 쉬지 말고 걸으라고 했다. 며칠 전에도 그는 탈북민 몇 명을 넘겨 보냈는데, 아침에 자고 일어나니 그들이 호텔 앞에 서 있었다고 했다. 그들도 나름 밤새 걷고 걸었는데, 아침이 돼 보니 다시 떠난 위치로 돌아온 것이다. 사막에선 방향을 가늠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다.
영현의 일행은 다시 알려준 방향으로 걷고 걸었다. 한참을 걸어가니 철조망이 나왔다. 바닥을 파고 통과했다. 그런데 한참 걸어가니 또 철조망이 나타났다. 철조망을 한 번만 넘을 줄 알았던 이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철조망도 어찌어찌해서 통과해 걷는데 또 철조망이 나타났다. 밤새 이들이 땅을 파거나 기둥을 잡고 넘어간 철조망은 대략 10여개나 됐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철조망도 더는 나타나지 않을 때쯤 날이 밝기 시작했다. 그때 멀리 마을이 보였다. 가서 살펴보니 중국어를 쓰지 않았다. 몽골에 온 것이다. 그 마을에 좀 머물러 있으니 몽골 수비대 여럿이 나타나 총을 겨누며 안대를 씌웠다. 차를 타고 간 곳은 변방 수비대 병영이었다. 이곳에서 열흘 정도 조사를 받고 울란바토르행 기차에 올랐다. 그곳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한 날이 2002년 5월 17일이었다.
● 마침내 찾아온 공부할 기회
8월 하나원을 졸업한 영현은 무연고 청소년으로 분류돼 임대주택은 받지 못하고 천안에 있는 무연고 청소년 쉼터로 가게 됐다. 가보니 교회 하나만 달랑 있고, 함께 간 탈북 청소년들이 머물 숙소도 없었다. 대량 탈북을 처음 경험해 본 정부는 그때까지도 체계적인 청소년 정착 시스템을 마련해놓고 있지 못했다. 탈북 아이들은 받겠다는 곳만 있으면 현장 답사도 없이 무작정 보내다 보니 살 집도 없는 곳에 보내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영현은 다른 애들과 함께 집을 짓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소년공으로 살았던 것이 도움이 됐다. 벽돌을 나르고 쌓고 겨우 몸을 누울 공간을 만들었지만 이곳에 오래 있진 않았다.
6개월 뒤 그는 2002년 개교한 기독교 대안 특성화학교인 지구촌고등학교에 입학해 부산으로 옮겨갔다. 지구촌고등학교는 2020년 폐교를 했는데, 운영기간 탈북민 사회의 우수한 청년 인재들을 많이 배출했다.
영현은 그렇게 바랐던 공부할 기회를 드디어 얻었다.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꿈이 현실이 된 것이다. 북한에서 생존을 위해 학업을 그만들 수밖에 없었던 영현은 영어 알파벳도 잘 몰랐다. 수학 등 기초 과목도 새로 배워야 했다.
그렇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공부가 힘에 부칠 때면 중국 학교의 외벽에서 밧줄에 매달려 “공부할 기회를 달라”며 부르짖었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2년 동안 죽으라고 공부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05년 연세대 법대에 입학했다.
그의 꿈은 법조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아들을 찾아 탈북했던 어머니와 형제가 북송됐다는 소식을 나중에 들었다. 한국에 와서 고향에 사람을 보냈지만, 찾지 못했다는 전갈을 받았다. 죽었는지, 아니면 수용소로 끌려갔는지 알 수도 없었다. 지금도 그는 북송된 가족의 생사를 알지 못한다. 영현은 법조인이 돼 억울한 탈북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수호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20세부터 공부를 시작한 그가 연세대 법대 과정을 따라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한 번뿐인 배울 기회를 낭비하지 않았다. 시험 기간이면 도서관에서 열흘 남짓 먹고 자며 살았다. 그래도 첫 학기는 평균 C 학점을 피할 수는 없었다. 과연 졸업할 수 있을까 두려움도 들었지만 포기하진 않았다. 방학 때 삭발하고 산에 들어가 공부만 한 적도 있었다. 노력하는 그에게 기회도 찾아왔다. 졸업할 즈음 로스쿨제도가 생겨난 것이다.
2011년 영현은 대학을 졸업하고 경북대 로스쿨에 입학했다. 대학 기간 1년은 영어를 익히기 위해 한인 선교사가 사는 미국에 건너가 공부를 했고, 또 1년은 로스쿨에 합격하기 위해 재수를 하다보니 대학 졸업에 6년이 걸렸다.
● 탈북 1호 변호사의 꿈
로스쿨 역시 쉽지 않았다. 경북대는 지방대이긴 하지만 학비가 저렴한 국립대라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그의 동기들은 대다수가 SKY 출신의 ‘학점기계’들이었다. 그들을 따라가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공부하는 것밖에 없었다.
3년 과정을 4년 동안 마치고 2015년 드디어 변호사 시험을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첫 시험은 낙방이었다. 로스쿨 제도가 생겨 2012년에 치른 첫 시험에서 변호사 시험 합격률은 87%를 기록했지만 해가 갈수록 그 비율이 떨어졌다. 2015년엔 61%가 합격했다. 그는 떨어진 39%에 들었다.
이듬해 또 도전했다. 시험 기회는 다섯 번 부여된다. 이듬해 합격률은 55%로 더 떨어졌다. 그는 또 떨어졌다. 그렇게 연거푸 네 번을 낙방했다. 그러는 사이 합격률은 51%, 49%로 계속 낮아졌다.
2019년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 이제 통과하지 못하면 변호사가 되기 위해 바쳤던 15년의 세월이 허무하게 끝나게 되는 것이다. 어느덧 영현도 36세의 청년이 돼 있었다.
합격자 발표가 나기 전날 그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비가 쏟아지는 공원을 정처 없이 걸었다.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계속 떨어졌지만, 그는 자신이 변호사가 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변호사가 되는 과정이 참 많이 힘들지만, 죽음도 넘겼는데 못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변호사시험 준비를 하는 내내 눈이 닿는 모든 곳에 ‘합격’이란 글을 써서 붙였다. 휴대전화 알람음도 ‘합격’이었다. 눈을 떠서 감을 때까지 늘 ‘합격’만 머리에 떠올렸다. 하지만 정작 마지막 기회가 다가오니 만감이 교차했고, 심장이 떨렸다.
합격자 발표가 뜬 시각 떨리는 손으로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그는 ‘변호사 시험 합격’이라는 글자가 보이자 두 손을 하늘로 높이 들고 ‘만세’를 큰소리로 외쳤다. 순간 그의 얼굴에는 기쁨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4전5기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그는 탈북민 출신 최초의 변호사가 됐다. 여기저기서 인터뷰 요청이 왔다. 하지만 다 거절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고개를 넘으면 다른 고개가 또 다가온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득한 그였다. 변호사 생활이란 새로운 고개를 들뜨지 말고 초심으로 시작하고 싶었다.
한 중견 로펌에서 실무 수습과정을 마친 뒤 그는 여러 로펌을 거쳐 현재는 법무법인 이래에서 파트너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여느 변호사들처럼 그 역시 형사, 민사, 가사, 보험 등 여러 분야를 다뤄야 한다. 그의 방은 밤늦게까지 불이 켜 있다.
그는 바쁜 변호사업무를 하면서도 대한변호사협회 북한인권특별위원회와 북한이탈주민법률지원위원회 등에 가입해 북한인권과 탈북민 정착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대한변협 인권재단의 사무총장직도 수행하면서 탈북민들에 대한 법률상담과 법률교육 관련 사업을 직접 기획하고 진행한다. 그 외에도 여러 북한인권 관련 기관이나 단체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그는 인류보편적 가치인 북한인권을 개선하고, 먼저 온 통일인 탈북민들이 한국사회에서 잘 정착하도록 돕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말한다. 탈북민 변호사로서 그가 가슴속에 지니고 있는 소명의식은 늘 운명처럼 새겨져 있다.
그는 시대가 부르는 날이 온다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그리고 절실하게 북한주민과 탈북민을 위해 나설 의지와 각오를 깊은 곳에 품고 살고 있다.
“만약 내일이라도 북한 체제가 무너지고 북한으로 갈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저는 주저없이 가겠습니다. 지금 북한 체제에 부역하던 사람들을 법조인으로 재교육시켜 쓸 순 없습니다. 법조인이 없는 공백의 상태가 올 것인데, 새로운 법질서를 이식하는 과정도 겪어야 합니다. 북한 2000만 동포 중 자유민주주의 세상에서 제일 먼저 법조인이 된 제가 당연히 주춧돌이 돼야 할 겁니다. 그게 쌀 한 배낭을 지고 오려고 두만강을 건넌 제게 분단의 조국이 짊어지게 한 운명이 아닐까요.”
그의 표정은 부드러웠지만 어투는 단호했다. 변호사 이영현은 공부가 만들어낸 법조인이 아니라, 시대가 만들어낸 법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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