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으로 출근하는 선관위원장…‘60년 관행’부터 바꿔야[한상준의 정치인사이드]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6월 20일 14시 00분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헌법에 설치 근거가 명시된 헌법기관이다. 국회, 법원, 대통령실 등도 헌법기관이다. 만약 이들 헌법기관을 없애려면 헌법을 고쳐야 한다. 반면 법무부, 외교부 등 정부 부처는 헌법이 아닌 정부조직법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정권에 따라 수시로 부처 개편 등이 가능하다. 헌법기관의 위상이 더 높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 유일한 비상근 헌법기관장, 선관위원장
대다수 헌법기관의 수장은 출근을 한다. 국회의장은 국회로, 대법원장은 대법원으로,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출근한다. 상근(常勤)직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날마다 일정한 시간에 출근해 정해진 시간 동안 근무하는 게 상근이다.

그러나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은 선관위로 출근하지 않는다. 현직 대법관이 비상근으로 선관위원장을 맡아 왔기 때문이다. 헌법기관장 중 비상근인 건 선관위원장뿐이다. 중앙선관위처럼 각 지역의 선관위 역시 관할 지역 법원장이 비상근으로 겸직한다. 대법원장이 지명한 대법관이 선관위원장을 맡는 관행이 계속돼온 것.

대법관 본연의 업무에 더해 선관위원장 일까지 해야 하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소쿠리 투표’ 논란이 벌어졌던 지난해 3월 5일, 당시 노정희 선관위원장은 경기 과천 중앙선관위 청사에 없었다. 다른 선거도 아니고 대통령을 뽑는 선거의 투표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지만 조직의 수장이 출근조차 안 한 것.

지난해 3월 8일 당시 노정희 선관위원장이 대선 사전 투표 관리 미흡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지난해 3월 8일 당시 노정희 선관위원장이 대선 사전 투표 관리 미흡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이런 선관위를 두고 여권 관계자는 “매일매일이 ‘무두절’이었던 것”이라고 했다. 조직의 최고 책임자와 권력자가 매일같이 자리를 비우니, 조직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전직 선관위 고위 인사는 “위원장은 밑에서 올린 대로 결제만 할 뿐 조직 운영, 업무에 대해 파악하지 못한다”고 했다. 선관위 내부 인사가 승진 임명되는 사무총장, 사무차장을 두고 “실질적인 선관위의 1, 2인자”라고 부르는 것도 법적인 1인자인 선관위원장이 제 역할을 못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헌법기관이라는 이유로 선관위는 감사원 감사도 받지 않아 왔다.

견제 받지 않는 조직이 썩는 건 당연한 일. 선관위 직원이 정식 경력 채용 공고가 나기도 전에 자녀에게 채용 사실을 미리 알려주고, 자녀는 지원서에 “아버지가 선거 관련 공직에 계신다”고 쓰고, 아버지의 동료 직원들이 면접관으로 참여하는 일이 벌어졌다.

사무총장이 자녀 특혜 채용 의혹 등으로 사퇴했는데, 또 다른 ‘아빠 찬스’의 당사자였던 직원들이 승진해 후임 사무총장, 사무차장을 맡는 기막한 일도 있었다. 일부 직원들은 신임 사무총장, 사무차장의 자녀가 선관위에서 일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선관위원장과 선관위원들은 전혀 몰랐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선관위 조직 전체가 선관위원장과 선관위원을 우습게 여긴다는 의미 아니겠느냐”고 했다.

● 2006년에도 상근직 논의했지만 불발
이런 ‘아빠 찬스’ 논란에 더해 ‘형님 찬스’까지 벌어졌지만 당초 선관위는 중립성, 독립성을 이유로 감사원의 감사를 거부했다. 행정부 소속 감사원이 헌법상 독립기관인 선관위를 감사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는 게 선관위의 주장이다.

다만 정치적 중립성과 관련해 선관위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는 스스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최근 몇 년 사이만 봐도 선관위는 각종 정치적 논란을 초래하는 결정을 내렸다. 현직 대통령의 대선 캠프에 몸담았던 인사가 선관위 상임위원이 되고,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탐이 하면 불륜)’ 문구가 담긴 현수막은 걸 수 없다고 한 건 과언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결정이었을까.

어쨌든 여론의 압박에 결국 선관위는 ‘아빠 찬스’ 의혹에 대한 감사원의 감사를 받기로 했다. 이어 출범 60년 만에 처음으로 국회 국정조사도 앞두고 있다. 선관위 설립 이후 가장 큰 위기 상황이지만, 이번 기회를 계기로 대대적인 환골탈태에 나서야 한다.

정치권 역시 선관위에 대한 질타를 뛰어넘어 선관위가 더 확실하게 중립적이고 독립적인 기관으로 거듭날 수 있는 제도적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우선 선관위원장을 상근으로 전환하고, 선출 방법도 손봐야 한다.

선관위원장을 상근직으로 전환하려는 논의는 2006년에도 있었다. 당시 “폭주하는 선관위의 업무량과 위상에 맞춰 비상근 위원장을 상근직으로 전환한다”는 내용을 담은 선거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그러나 사학법 개정 등을 둘러싼 여야의 대치로 이 개정안은 통과되지 못했다. 상근직 전환 논의가 처음도 아닌 만큼, 선관위와 여야가 다시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의 근간은 선거다. 우리 국민은 보통·평등·비밀·직접선거가 갖는 투표의 힘을 믿고, 그 결과도 인정한다. 선관위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무너져 선거에 대한 믿음까지 흔들리는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선관위가 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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