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산하 화정평화재단은 정전(停戰) 70주년을 맞아 6·25 전쟁 3년을 재조명하는 기획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를 연재합니다. 아픈 과거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취지로 회고록과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전쟁을 통해 각국이 추구했던 목표의 허실을 조망하고 아울러 전국에 산재한 6·25 격전 현장을 찾아 당시 격전 상황도 재구성합니다. |
1949년 | 3월 | 도쿄 연설, “대만과 한반도는 미국의 방위선 밖” |
| 8월 | 미 정부, “국민당은 부패 무능한 반동 정당” 백서 발표 |
| 12월 | NSC-48/2, “대만의 전략적 중요성은 군사행동을 할 정도 아니다” |
1950년 | 1월 5일 | 트루먼, “군대를 사용해 분쟁에 개입할 의도 전혀 없다” |
| 12일 | 애치슨, “한반도와 대만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대만 제외” |
| 3월 | 애치슨, “대만의 조기 공산화는 불가피하다” |
| 5월 | 대만 주재 미국 영사, 3개월 이내 공산군 침략 예상하고 모든 미국인 대만 떠나야 한다는 권고를 본국 정부에 보고 |
이승만과 장제스의 반공(反共) 동맹 |
![]() 장제스(蔣介石)는 국공 내전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 홍군에 밀려 대만으로 물러난 뒤에도 본토 수복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장제스는 자신의 구상 실현을 위해 한국과 군사동맹 체결을 희망했다. 한국의 군사기지를 이용해 만주 및 화북 지역의 공업지역을 폭격하고 중국 서해안 봉쇄에도 활용하려고 했다. 6·25 발발 3일 후 장제스는 군대 파견을 미국에 제의했다. 한국지원병사령관도 내정하고 3개 사단 3만 3000명과 1개 기갑여단, 20대의 수송기를 투입하겠다는 의사를 미국에 타진했다. 당시 대만은 육해공 68만 명(육군 48만 명)의 병력을 보유했다. 맥아더와 미 합동참모본부는 중국군의 개입을 불러오고 대만 방어도 약화시킬 수 있다며 반대했다.(이상호, 169〜170쪽)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장제스가 병력을 한국에 파견하겠다는 제의를 했을 때 트루먼 대통령은 호의적이었으나 자신은 반대했다고 했다. 한국보다는 대만을 방위하는데 병력이 더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애치슨, 537쪽). 애치슨이 반대한 데는 다른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장제스가 원하는 것(중국 공산주의자를 끌어들이는 확전)과 미국이 원하는 것(중국을 개입시키지 않는 제한 전쟁)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애치슨은 장제스의 군대가 중국 본토에서 어떻게 싸웠는지 낱낱이 알고 있어 장제스의 도움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핼버스탬, 141쪽). 기본적으로 국민당 정권이 부패하고, 장제스의 군대는 무능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던 애치슨에게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확전을 불러온 빌미를 장제스에게 줄 리가 없었다. ● 이승만과 맥아더의 대만 군대 참전 환영 전환 이승만 대통령도 주한 대만 대사가 2만〜2만5천명의 자국군을 파견할 용의가 있다고 전해왔으나 정중히 거절했다. 반공국가인데 왜 거절하느냐는 프란체스카의 질문에 “중공군을 내 손으로 불러들일 수는 없잖아”라고 했다. 중국 참전의 빌미를 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프란체스카 1950년 7월 11일의 일기) 이승만은 막상 중공군이 개입해 전세가 불리해진 상황에서는 대만 군대도 받아들이는 데 찬성했다. 신성모 국방장관이 병력이 충분치 못하다는 애로사항을 털어놓자 ‘맥아더 장군에게 장제스 총통이 지원해 줄 5만 또는 그 이상의 군대를 보내주도록 요청하는 서한을 무초 대사를 통해 보냈다.(프란체스카의 일기, 1951년 1월 5일). 맥아더도 1951년 11월 28일 합참에 장제스 군대 파병을 요청했다. 그 후 맥아더는 장제스 군대의 대륙 공격 및 한국전쟁 개입을 두고 트루먼 대통령과 이견과 갈등을 빚어 전격 해임되는 주요 이유가 됐다. 맥아더는 해임 후 의회 청문회에서도 대만군 활용에 대한 소신을 유지했다. 대만을 위협하던 중국군 제3, 제4 야전군이 한반도로 전환됐기 때문에 대만군을 한국전쟁에 이용하거나 중국 본토에 대한 상륙작전을 감행하게 한다면 한반도에서 중국의 압력을 충분히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진술했다.(이상호, 332쪽) ![]() ● 이승만과 장제스의 셔틀 방문 외교 1949년 8월 6〜8일 장제스가 김해를 방문했다. ‘대한민국 제1호 정상외교’로 불리는 이장(李蔣) 회담이 7일 열렸다. 장제스가 부인의 이름을 딴 전용기 ‘미령호’ 타고 도착할 때 이승만 대통령은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진해 비행장에서 영접했다. 진해 해군기지사령부 영빈관에 투숙했다. 둘은 회담 후 “국제공산주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투쟁해야 할 것을 확인한다”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동아일보 1949년 8월 8일, 9일 보도). 전쟁이 끝난 뒤 1953년 11월 27∼29일 이승만 대통령이 대만을 답방해 ‘반공통일전선 결성‘을 발표했고 이는 1954년 아시아민족반공연맹 발족으로 이어졌다. |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