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치된 ‘투명인간’ 신생아]
2019년 이후 ‘학대판결’ 22건 분석… 13건 확정 판결, 9건 1심서 유죄
뇌출혈로 입원한 생후 2개월 영아, 숨진 뒤 갈비뼈 29곳 골절 확인도
“막을 수 있었던 참사” 잇단 지적
“오늘 뇌출혈로 입원한 아기가 학대를 당한 것으로 의심됩니다. 갈비뼈 여러 곳이 부러졌는데 골절 시기도 모두 달라 보입니다.”
지난해 1월 13일 오후 11시경 서울의 한 종합병원 의사가 다급한 목소리로 경찰에 전화했다. 중환자실에 입원한 생후 2개월 윤호(가명)가 부모로부터 학대당한 것으로 의심된다는 신고였다. 윤호를 처음 진료했던 동네병원 의사도 다음 날 “신생아가 스스로 낼 수 있는 상처가 아니다”라고 경찰에 신고했다. 이로부터 2주 뒤 윤호는 뇌부종이 심해져 결국 세상을 떠났다.
병원에 실려 올 당시 윤호는 머리에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고 한다.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고, 온몸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정밀검사에 나선 의료진은 윤호의 갈비뼈 29곳이 부러진 사실을 확인했다. 의사들과 부검의는 “반복되고 오래된 학대로 골절이 발생했다”고 했다.
윤호의 부모는 윤호가 죽은 뒤에야 기소됐다. 윤호가 갓 태어난 2021년 12월부터 2022년 1월까지 학대한 혐의였다. 1·2심은 주 양육자였던 친부에겐 징역 10년을 선고했지만, 친모는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받았다. 대법원은 현재 이 사건을 심리하고 있다.
윤호는 국가가 지정한 신생아 필수 예방접종도 받은 적이 없다. 아동학대를 의심할 수 있는 정황이었다. 하지만 윤호가 숨지기 전까진 경찰도 지방자치단체도 이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윤호는 출생신고가 안 된 아이였기 때문이다.
윤호처럼 출생신고가 안 돼 있어 심각한 학대를 당한 뒤에야 존재가 알려진 아이들이 2019년 이후부터 최소 22명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동아일보가 2019년 1월부터 이달 23일까지 출생신고 안 된 자녀를 학대한 혐의로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피고인의 판결문 22건을 분석한 결과다. 이 중 13건에 대해선 유죄 판결이 확정됐고, 9건은 상급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정부는 2019년 ‘포용국가 아동정책’을 발표하면서 의료기관이 출생신고를 관장하는 시·읍·면 장에게 출생 사실을 반드시 통보하도록 하는 ‘출생통보제’를 도입하겠다고 했다. 아동의 출생신고를 부모 손에만 맡긴 현행법을 개정해 의료기관이 직접 지자체에 출생 사실을 통보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출생신고가 돼 있지 않아 친모가 자수하기 전까지 7년간 누구도 그 존재를 몰랐던 ‘투명인간 하은이’ 사례를 본보가 2019년 1월 보도한 데 따른 조치였다.
하지만 제도 도입이 미뤄지는 동안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아동 22명에 대한 학대 사례가 새롭게 발견돼 “막을 수 있었던 참사”라는 지적이 나온다. ‘보편적 출생신고 네트워크’의 이진혜 변호사는 “아동학대 사건이 암장되는 것을 막기 위해 ‘출생통보제’부터 시급하게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쓰레기집’ 9시간 방치돼 숨진 영아… 조리원에 버려진 신생아…
또다른 ‘투명인간 하은이’ 혼외자라는 이유로 출생신고 안해 19세까지 학교 가본적 없는 아이도
출생신고가 안 된 아이는 학대를 당하거나 심지어 숨져도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미혼모였던 영훈이(가명) 엄마는 2018년 10월 영훈이와 쌍둥이 여동생까지 바닥에 눕혀 놓고 출근했다. 집 안엔 엄마가 키우던 강아지의 배설물과 담배꽁초, 음식물 쓰레기 등만 가득 쌓여 있었다. 영훈이가 생후 2개월 때였다. 영훈이는 결국 방에서 9시간 방치된 끝에 질식해서 숨졌다.
영훈이 엄마는 시신을 집 안 냉장고 냉동실에 숨겼다. 영훈이의 죽음은 2년 뒤인 2020년 11월 경찰의 압수수색에서야 뒤늦게 밝혀졌다. 경찰은 당시 이웃이 “쓰레기집에 사는 여자아이가 있다”고 신고해 출동했다. 분유를 뗀 여동생은 엄마의 방치 속에 쓰레기 더미 위에 앉아 과자와 빵으로 연명했다. 엄마는 아동학대치사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2021년 10월 징역 5년이 확정됐다.
혼외자라는 이유로 엄마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채 자녀를 방치했고, 자녀에 대한 학대로 이어진 사례도 적지 않다. 3세 다운이(가명)의 엄마는 전남편과 이혼하지 않은 상태로 새로운 남자를 만났고, 그 남자와 사이에서 다운이를 낳았다. 엄마는 “다운이를 전남편의 아이로 호적에 올리고 싶지 않다”며 신고를 거부했다. 결국 고열에 시달릴 때도, 아빠가 던진 소주병에 맞아 머리가 깨져도 다운이는 병원에 가지 못했다. “출생신고 안 된 아이는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다”며 부모가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출생신고가 돼 있지 않아 취학 연령이 지나도록 학교에 가본 적 없는 아이들도 있다. 출생신고가 안 된 현주(가명)는 19세가 될 때까지 학교에 가본 적이 없다.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논 적도 없었다. 부모가 생계유지가 어렵다는 이유 등으로 둘째인 현주의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서다. 현주의 아버지는 지난해 4월 아동복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확정받았다.
일부 부모들은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신생아를 버리고 잠적하는 경우도 있다. 두 살인 정훈이(가명)의 엄마는 2021년 4월 제주의 한 산후조리원에 “아이 먼저 들여보내고 이틀 뒤에 들어가겠다”고 한 뒤 잠적해 버렸다. 엄마는 산후조리원 측 전화도, 경찰의 연락도 받지 않았다. 경찰은 정훈이의 엄마를 2021년 12월 경기 평택에서 체포했다. 정훈이의 엄마는 아동복지법 위반 혐의로 지난해 2월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확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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