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산하 화정평화재단은 정전(停戰) 70주년을 맞아 6·25 전쟁 3년을 재조명하는 기획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를 연재합니다. 아픈 과거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취지로 회고록과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전쟁을 통해 각국이 추구했던 목표의 허실을 조망하고 아울러 전국에 산재한 6·25 격전 현장을 찾아 당시 격전 상황도 재구성합니다.
경기 파주군 적성면 ‘영국군 설마리 전투 추모공원’의 벽면 부조물에는 무사히 귀환한 남편를 꼭 안고 안도하는 아내의 표정과 뒤에서 아빠의 바지를 잡고 기뻐하는 딸의 모습이 있다. 하지만 이 병사처럼 집으로 돌아와 다시 가족을 만나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6·25 전쟁 기간 영국군은 전사 1078명, 실종자도 179명이었다.
옆 부조물에는 이곳 전투에 참가한 제29여단 글로스터 대대원들 12명이 활짝 웃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도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을 것이다. 6·25 전쟁 3년간 전투병을 보낸 16개 참전국 장병 3만7886명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로 길게는 한 달 가량 배를 타고 와 낯설은 곳에서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다. 인적도 드문 파주의 감악산 자락에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고 세워놓은 추모와 감사의 비석만으로는 그들의 희생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 “미국과 공동 책임” 의식한 영국
영국은 1950년 1월 가장 먼저 신중국을 승인하고 중공과의 대립을 원하지 않았다. 자국이 총독 통치를 하고 있던 홍콩 때문이었다. 영국은 중공의 대만 점령 주장도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맥아더의 만주 폭격 등 중국과 전면전을 일으킬 수 있는 이른바 ‘확전’에 영국은 가장 반대했다. 그렇지만 일단 전쟁이 발발하자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책임을 다했다.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전투 병력을 미국에 이어 가장 먼저 한반도에 투입했다. 육군 파병 규모도 미국 다음으로 많았고 해군도 항모 1척을 포함 17척을 파견해 미국 다음으로 많았다. 희생자도 미국 다음으로 많았다.
영국은 18개월이던 군복무 기간을 2년으로 늘려 연인원 5만6000여명을 보냈다. 영국은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등과 영연방군을 편성해 설마리 전투, 가평 전투 등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영국은 1951년 7월 ‘영연방 1사단’을 창설했는데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6개국이 참가한 것으로 ‘다국적 사단’은 세계 전사상 유례가 없다.(UN군지원사, 176쪽).
미국은 1950년 7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유럽부흥계획에 따라 28억5000만 달러를 지원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영국은 한국 전쟁에 지상군을 파병해 미국의 영국에 대한 지원이 축소되지 않기를 원했다.(김계동, 100쪽)
● 참전 동기와 계기는 달라도 명분과 목적은 하나 ‘평화유지’
6·25 전쟁에 전투와 의료 지원을 위해 파병한 각 국가의 목적과 경위는 다양했다. 하지만 한반도에 발을 들여놓은 후에는 불법 침략 세력의 격퇴라는 목적은 같았다. 각 국은 낯설고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나라에 전투병을 보내기 위해 부대를 새로 만들고 병력을 모집했다. 의무 복무 기간을 늘려 병력을 충원했다. 많은 국가에서는 참가하겠다는 자원병이 넘쳐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발했다. 6·25 전쟁 한국과 북한 지원 국가
지원 항목
한국
북한
전투지원
미국 영국 등 16개국
중국 소련 2개국
의료지원 6개국
인도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이탈리아 서독 6개국
체코 동독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물자지원
일본 쿠바 베트남 이스라엘 등 38개국
몽골 1개국
총계
60개국
8개국
● 16개국 파병, 4개국은 육해공 모두 보내
유엔 안보리는 6·25 전쟁 발발 이틀만인 6월 27일 군사원조를 한국에 제공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7월 7일에는 유엔군사령부도 창설됐다. 파병 결의안이 통과되고 유엔군 사령부 창설 1주일이 지났지만 미국 외에 지상군을 파병하겠다는 국가가 없었다. 트뤼그브 리 유엔사무총장은 7월 14일 52개 회원국에 파병을 요청하는 서신을 발송했다.
미국은 6월 27일 해군과 공군이 평양까지 공습을 시작됐다. 일본에 주둔해 있던 육군 제24사단의 스미스 특임대대가 7월 1일 부산에 도착해 5일 오산 죽미령에서 첫 전투를 벌였다. 미국 다음으로 육군이 도착한 것은 영국으로 8월 28일이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다부동 전투가 한창이던 때다. 당시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었던 자유중국(대만)은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3만3000명의 지상군 파병을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쟁 3년간 16개국이 전투 병력을 파견했다. 육해공군을 모두 파견한 국가는 미국 호주 캐나다 태국 4개국이다.
6·25 당시 독립국가 93개국 중 60개국이 전투, 의료, 물자지원 등으로 참여했다. “인류 역사상 단일 연합군으로 한 나라의 자유와 민주를 지키기 위해 참전한 규모로는 최대였다.”(국가보훈처 유투브 ‘역사다방’·2021년 11월)
부산의 유엔공원묘지는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다. 매년 11월 11일 11시에 1분 동안 부산 향한 묵념 행사 ‘turn toward Busan’이 진행된다.
6·25 전쟁 전투병 파병 16개국 (참전 병력 숫자 순)
국가
참전병력(명)
사망(명)
한국 도착
1
미국
1,789,100
33,686
7월 1일
2
영국
56,000
1,078
8월 28일
3
캐나다
26,791
516
12월 18일
4
튀르키예
21,212
966
10월 17일
5
호주
17,164
340
9월 27일
6
필리핀
7,420
112
9월 19일
7
태국
6,326
129
11월 7일
8
네덜란드
5,322
120
11월 23일
9
콜롬비아
5,100
213
6월 15일(1951년)
10
그리스
4,992
192
12월 9일
11
뉴질랜드
3,794
23
12월 31일
12
에티오피아
3,518
112
5월 6일(1951년)
13
벨기에
3,498
99
1월 31일(1951년)
14
프랑스
3,421
262
11월 29일
15
남아공
826
36
11월 12일
16
룩셈부르크
100
2
1월 31일(1951년)
※참전병력은 육해공 해병대를 포함한 연인원 기준. 미국 영국은 사망 외 실종자 3,737명과 179명 추가. ※도착은 육군 기준, 육군 없는 남아공은 공군 자료 : ‘통계로 본 6·25 전쟁’,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 프랑스, 전후 복구와 혼란 속 대대 규모 파견
프랑스는 2차 대전에서 나치 독일에 점령당해 괴뢰 정부의 통치를 받는 등 전쟁의 폐허상태에서 겨우 회복되고 있는 때였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과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군예산은 상당한 압박을 받았다. 유엔의 5개 상임이사국 중 한 나라였지만 걸맞는 책임을 떠안을 여유가 없었다.(베르고, 38쪽) 프랑스는 2차 대전이나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싸운 경험이 있는 예비역들로 대대 단위 부대를 만들어 보내기로 했다. 프랑스 대대는 한국전에 참전하기 위해 1950년 8월 창설됐다.
프랑스의 참전 부대를 이끌고 온 랄프 몽클라르 중령은 ‘1차 대전의 영웅’ 칭호까지 받은 3성 장군이었다. 2차 대전 때는 ‘망명 자유 프랑스군’을 이끈 레지스탕스 지휘관이었다. 몽클라르는 가명이었다. 몽클라르는 대대를 지휘하기 위해 계급을 낮춰 중령급이 맡는 대대장을 자원했다.
● 참전 계기로 나토 가입한 튀르키예와 그리스
6·25 전쟁이 발생하자 튀르키예에서는 ‘형제의 나라에 전쟁이 났으니 돕자’는 분위기가 일었다. 1만5천여명이 자원했는데 고등학생들도 참가시켜 달라고 시위를 벌였다.(국가보훈처 유투브 ‘역사다방’·2021년 11월). 튀르키예는 나토에 가입하기를 원했는데 전쟁은 전공을 세워 나토 가입의 명분을 내세울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 튀르키예는 전쟁 중인 1951년 9월 20일 나토 창설 멤버 12개 국가 외에 처음으로 그리스와 함께 가입됐다.
그리스 참전 부대 이름은 ‘스파르타 대대’. 그리스는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도 소련과 그 위성국의 지원을 받는 국내 공산당 세력과 6년간 내전을 치르고 있어 공산군의 침입을 받은 한국에 동질감을 느꼈다. 참전비 좌우의 기둥과 동판에 새겨진 월계수잎이 고대 문명국가 그리스가 우리와 생사를 함께 하며 싸웠음을 보여준다.
● 영연방 국가들 :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는 유엔 결의안 직후인 6월 30일 마침 일본 극동군사령부에 파견 중인 2척의 함정과 1개 보병대대가 있어 파견을 유엔에 통보했다. 호주 국내에서도 자원병을 모집했는데 정규군의 98%가 지원 의사를 밝혀 심사를 거쳐 선발했다. (‘6·25 전쟁 참전사’, 136쪽)
1951년 10월 경기도 연천의 ‘마량산 전투’에서는 ‘능선 방향 공격’ 전술을 구사했다. 능선 을 달리며 공격하는 것은 적에게 노출이 쉬워 위험하지만 신속한 기동이 가능하다. 산악 기동에 장점이 있다는 중공군도 혼비백산했다고 한다.(국가보훈처 유투브 ‘역사다방’·2021년 11월). 호주는 가평 전투에 영연방군 일원으로 참여했는데 자국 현충일인 4월 25일(1차 대전 당시인 1915년 뉴질랜드와의 연합군이 튀르키예 해안에 상륙했던 날)의 하루 전날을 ‘가평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1129일의 전쟁’, 342쪽)
뉴질랜드 육군은 7월 27일부터 부대 명칭을 ‘한국부대(K-Force)’로 명명하고 파병부대원을 모집했다. 모집 9일 만에 다수의 원주민 마오리족을 포함, 전국에서 5천982명이 지원했다. 캐나다는 6·25 전쟁이 터졌을 때 한국과 서로 대표부도 설치되지 않은 관계였지만 의회가 만장일치로 파병을 결의했다. 생 로랑 총리는 “참전은 특정 국가를 상대로 한 싸움이 아니라 유엔의 평화 회복을 위한 것”이라고 명분을 밝혔다.(‘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6·25전쟁 참전사’, 26쪽)
● 아시아의 우방국 태국과 필리핀
태국은 2차 대전 시 추축국인 독일 일본과 같은 진영에서 싸워 6·25 전쟁을 통해 국제사회의 신뢰를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빨리 파병했고 가장 오래 머물러 1972년 철수했다. 파병 당시와 철수할 때의 부대장이 부자간이어서 화제가 됐다.
필리핀은 6·25 전쟁 4년 전 독립한 뒤 공산 반란군과 교전 상태에 있어 국내 정세도 매우 불안했다. 그럼에도 국군과 미군이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나자 공산군 토벌 작전에 투입된 10개 대대 중 한 개 대대를 빼내 한국에 보냈다.(‘UN군 지원사’, 295쪽)
● 자국 상비군도 부족한 유럽 국가도 파병
네덜란드는 보유중인 지상군이 인도네시아에 주둔하고 있는데다 1951년 5월 귀국할 예정이어서 정부는 파병에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국내 참전지원자와 언론이 ‘한국참전 지원병 임시위원회’까지 결성해 정부에 참전을 강도높게 요구했다.(UN군 지원사, 217쪽). 국민 여론에 따라 지상군 파병이 이뤄졌다.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1949년 영세중립국을 포기하고 나토에 가입했다. 변변한 상비군도 없는 상황에서 두 나라는 통합 대대를 편성했다. 벨기에가 엄격한 기준과 적성검사를 통해 선발한 장병 중에는 전 상원의원이자 당시 국방장관도 포함됐다. 벨기에 6·25 전쟁 박물관이 있는 제3공수 대대에는 ‘임진강’ ‘학당리’ ‘잣골’ 등 벨기에 부대가 전투를 벌였던 지명을 딴 건물들이 있다고 한다.(황인희, 96쪽). 룩셈부르크는 연인원 100명을 파견했는데 당시 룩셈부르크 인구는 20만 명가량이었다.
● 왕실 근위대를 보낸 에티오피아와 공군 정예 보낸 남아공
에티오피아는 2차 대전 때 이탈리아에 무장해제되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황실근위대 정도만이 남아있었다. 하일레 세라시에 황제는 황실근위대에서 1천200명을 선발해 수도 인근 한국의 지형과 유사한 곳에서 훈련을 시켜 파병했다. 에티오피아는 ‘전사한 영웅들의 시신은 반드시 수습한다’는 전통이 있어 적진에 남겨두지 않는다. 붙잡힌 동료도 반드시 구해내 포로가 한 명도 없다고 한다.(황인희, 25쪽)
강원도 춘천 이디오피아길 1번지에 있는 참전기념비는 1968년 하이레 세라시에 1세 황제가 친히 제막하였다. 한국에 새로 부임하는 에티오피아 대사들은 이곳부터 찾는다고 한다.
아프리카 최남단의 남아공은 206명의 전투비행대대를 파견하되 먼 거리 수송 문제로 항공기나 장비는 없이 병력만 보냈다. 대대 병력은 40일간의 항해 끝에 요코하마에 도착해 무스탕(F-51기) 전투기와 장비를 인수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참전한 콜롬비아는 1948년 4월 공산분자들에 의한 최악의 폭력사건으로 참변을 겪었다. 공산 반정부 게릴라 활동으로 내부 사정도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유엔의 결정에 따라 파병을 결정했다.
● 의료지원 6개국
전쟁 기간 중 의료지원을 한 5개국과 독일도 포함돼 6·25 전쟁 의료지원국은 6개국이 됐다. 독일은 1953년 5월 6·25 참전 유엔군을 지원하기 위한 야전병원 설립 의사를 유엔본부에 전달했고, 이듬해 80여명 규모의 의료지원단을 파견했으나, 정전협정 체결(1953년 7월 27일) 이후 의료지원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6·25 전쟁 의료지원국에 포함되지 않았다. 국방부는 2018년 6월 독일이 1954년 5월부터 부산에 적십자병원을 설립해 의료지원 활동을 펼친 것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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