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 정교한 ‘덫’의 전술[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7월 14일 11시 00분


[11회]

동아일보 산하 화정평화재단은 정전(停戰) 70주년을 맞아 6·25 전쟁 3년을 재조명하는 기획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를 연재합니다. 아픈 과거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취지로 회고록과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전쟁을 통해 각국이 추구했던 목표의 허실을 조망하고 아울러 전국에 산재한 6·25 격전 현장을 찾아 당시 격전 상황도 재구성합니다.
‘수풍댐 상류, 영하 10도의 압록강 물속으로 방한복과 신발 양말을 벗어 등 뒤에 묶은 반나체의 병사들이 걸어 들어갔다. 강을 건너왔을 때는 온몸에 얼음이 주렁주렁 매달려 은색 갑옷을 착용한 유령 같았다. 응급처치를 담당하는 여군도 마찬가지였다. 강이 얼어붙기 전 이렇게 수 만명이 건넜다. 주간에는 동굴, 기차 선로 터널, 탄광 갱도, 마을 초가집에 숨어 있다가 어두워지면 이동했다.’(웨이트라웁, 43쪽)

중공군은 북한에 들어온 뒤 미군의 공군력을 두려워해 야간에 병력을 이동시켰다. 낮에는 병사 한사람 한사람이 야산의 나무를 베서 등에 지고 이동하다가 미 공군기가 뜨면 그 나무를 세워 놓고 주저앉아 공습을 피했다. 산 가득히 나무를 태워 그 연기로 연막을 형성해 미군 조종사의 시야로부터 숨기도 했다.(백선엽 1권, 196쪽)

중공 항미원조지원군 훙쉐즈(洪學之) 제1부사령관은 “1950년 10월 19일 4개군과 3개 포병사단이 안둥(安東·이하 단둥), 창뎬허커우(長甸河口) 지안(集安) 3곳 다리를 건너 씩씩하게 조선으로 들어갔다”고 했다.(훙쉐즈, 64쪽). 하지만 많은 병력은 야음을 틈타 다리가 아닌 강물을 직접 건넜다.

중국 랴오닝성 단둥 ‘압록강 단교’위에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가 병력을 이끌고 도강하는 장면을 재현해 놓았다. 참전 중공군을 ‘인민지원군’이라고 한 것은 국가가 전쟁에 나선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지원해서 나선 것이라는 의미다. 전국에서 연인원 120만 명 이상을 동원한 전쟁에 맞지 않는 ‘눈가리고 아웅’식 명분일 뿐이다. 단둥 = 홍진환 기자


● ‘13일의 재결정’, “압록강 다리 폭파 전 일거에 투입”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해 빠른 속도로 북진해 중공군의 참전은 시간 문제였다.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간 중공군 파병을 둘러싼 막판 신경전 끝에 파병이 최종 재결정된 것은 10월 13일 0시 이후여서 중국측 연구서는 ‘13일의 재결정’이라 부른다고 한다. 소련군 공군 지원이 없어 마오쩌둥이 갑자기 출병 중지 명령을 내리는 우여곡절이 있어 출병 날짜는 19일로 늦춰졌다. 초기 투입 병력은 1차 25만여 명, 2차 15만 명, 3차 20만 명으로 총 60만 명이었다.(이상호, 252쪽)

북한 파병 준비를 위해 단둥(丹東)에 온 중국인민지원군 부사령관 훙쉐즈는 10월 7일 미군 전투기가 단둥이나 압록강대교를 폭격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전쟁 확대를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은 후에 알았다. 그는 미군 전투기가 압록강 철교를 폭파하기 전에 4개군(군단)을 투입하기로 했다고 술회했다.(훙쉐즈, 53쪽)

중국 단둥의 압록강 단교, 강 중간부터 북한쪽으로 다리가 끊겨 교각만 남아있다. 강 건너편은 북한 신의주. 단둥 = 홍진환 기자


● 유엔군의 빠른 북진으로 작전 변경
중공군은 당초 압록강을 건넌 뒤 북한의 허리부분까지 진격해 방어선을 구축하려고 했으나 유엔군 북진 속도가 빨라 작전을 변경했다. 압록강을 넘어오기 전부터 북쪽 산악지대에서 진지전과 기동전을 배합한 반격 습격 매복 등을 구상했다.(훙쉐즈, 68쪽).

미군은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와 산악지대에 숨어있는 것을 몰랐고 중공군은 미군과 국군이 압록강에 그렇게 빨리 도달할지 예상 못했다. 초반에는 서로가 서로를 잘 모르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후 상반된 대처가 전황을 갈랐다. 중국은 현대화된 장비와 해공군을 갖춘 미군과 정면 대결하기 보다 우회 공격과 분산, 은폐 등으로 대응했다.

<중공군의 미군 대응 전술 지침 >
  • 지구전, 적 측면 우회 각개 격파
  • 접근전, 야간전, 속전속결, 적의 강한 화력의 장점 발휘 방지
  • 낮에는 병력 분산 은폐해 공습 회피
  • 전투기 활동 제한되는 야간전투
  • 폭격 우려있는 철로 도로 이동 회피
  • 진지 매복후 북진하는 상대 공격

<중공군의 7차례 공세>
순서
시기
기간(일)
특이 사항
1
1950년 10월 25일〜11월 5일
12
공세 후 중공군 잠적
2
〃 11월 25일〜12월 10일
15
장진호 전투
3
〃 12월 31일〜1951년 1월 10일
11
1·4 후퇴
4
1951년 2월 11〜18일
7
유엔군 37도선까지 후퇴
5
〃 4월 22〜30일
9
1차 춘계공세, 최대 단일 군사작전으로 70만 명 동원
6
〃 5월 16〜20일
5
2차 춘계공세, 공세 실패 후 본격 지구전, 전선 교착 상태 지속
7
1953년 7월 13 〜27일
15
휴전 서명 직전 최후 공세
중국 랴오닝성 단둥 항미원조기념관 외부에 중공군 중포가 대규모로 전시되어 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 ‘7차례 공세’를 알리는 신호탄 운산 전투
미군이 중공군의 공세에 일정한 패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3차례나 당한 뒤였다. 1주일에서 보름 가량 ‘인해전술(人海戰術)’로 공격을 해오다 일정 기간 휴지 기간을 지난 뒤 다시 공격하는 패턴이 반복됐다.

중공군 출병을 신고한 운산전투(1950년 10월 25일~11월 3일)에서 중공군에게 일격을 당한 뒤에도 중공군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실패하고 교훈을 얻지 못한 댓가는 ‘무사안일 북진’하던 미군과 국군의 전황을 훅 뒤집을 정도로 컸다.

운산전투는 국군 제1사단과 미군 제1기병사단이 중공군과 처음으로 치른 전투다. 중국은 첫 전투가 벌어진 10월 25일을 참전 기념일로 삼고 있다. 중공군은 “미군의 최정예라는 제1기병 사단의 콧대를 꺾어 흥분되는 일이었다”고 평가했다.(훙쉐즈, 108쪽)

국군 1사단 15연대는 25일 금광으로 유명한 운산에서 박격포 세례를 받았다. 첫날 전투에서 35세 가량의 포로 한 명이 생포됐다. 두툼하게 누빈 무명 방한복으로 겉은 카키색, 속은 흰색이어서 눈이 오면 위장복도 됐다. 그는 자신이 제39군 소속으로 광둥성 출신이라고 밝힌 뒤 인근에 2만 명 가량의 중공군이 있다고 술술 털어놨다. 직접 신문한 백선엽 사단장은 미 8군을 통해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에 보고했다. 도쿄 사령부는 조선족 의용병이 가담한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15연대는 운산에서 ‘전투부대로서 존재하기를 멈췄다’고 할 정도로 괴멸됐다. 미 제8기병 연대도 중공군에게 포위돼 병력 과반수를 잃었다. 중공군 포로 한 명의 진술을 흘려버린 댓가였다.

중공군은 운산 전투 후 잠적했다. 병사들이 휴대한 식량과 탄약이 바닥나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중공군의 대규모 투입 사실을 모르는 것을 역이용해 더 큰 승리를 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고 했다.(훙쉐즈, 111쪽). 일시적 후퇴로 일종의 진공상태를 만든 다음 전투력이 더욱 우수한 적을 추가로 유인해 매복전술로 섬멸하려는 계략이었다. 중공군의 노림수는 적들에게 겁을 먹고 후퇴하고 있다는 그릇된 인상을 주는 것이었다.유엔군은 이런 중공군의 계략에 말려들었다. (웨이트라웁, 45쪽)

애치슨은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10월 26일부터 11월 17일까지 3주일이라고 했다. ‘한국에서 재난으로 가는 것을 막을 마지막 기회를 잃었다’고 했다.(애치슨, 602쪽). 1차 대공세 이후 중공군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것을 지적한 것이다.

중국 랴오닝성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중공군 각 부대의 출병 및 귀국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 ‘미끼 던지고 보름달 계산하고’, 정교한 덫
1차 공세 후 매복하고 있던 중공군은 유엔군의 북진 속도가 느려진 것을 걱정했다.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서는 적이 먼저 밀고 올라와야 했기 때문이다. 중공군은 의도적으로 비호산, 덕천 등을 포기해 상대를 유인했다. 후퇴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워 작전이 노출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고 한다. 주력 부대는 10여km 후방에 있고, 소규모 부대로 기습공격을 해 공격개시선까지 쫓아오도록 했다.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운산 전투 후 바로 자취를 감추는 등 일부러 약하게 보이려고 했다고 했다. 적을 교만하게 만들어 깊이 유인하려는 전술이었다는 것이다.(펑더화이, 426쪽).

2차 공세를 앞두고는 핵심 정예부대를 ‘미끼’로 던졌다. 항일전쟁과 국공 내전에서 ‘철군(鐵軍)’으로 알려진 112사단을 적의 공격해 노출시켰다. 대비가 허술하다고 판단하고 적이 진격해 오도록 한 것이었다.

3차 대공세 전에는 달뜨는 시기를 살폈다. “보름달 뜨기 며칠전이 공격 개시에 가장 좋다. 전투가 최고조에 이를 때 보름달이 되어 가장 밝다.” 우리에게 신정 공세로 알려진 12월 31일 3차 공세 개시 날짜는 그렇게 정해졌다.(훙쉐즈, 192쪽).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채 안가고, 연말연시 경계심이 풀어진 틈을 이용하자는 계산도 있었다. 중공군은 밤에 산악을 이동할 때는 고무 군화를 신고 어두운 산허리를 소리도 없이 돌아다니다가 침입해 왔다.(리지웨이 회고록, ‘향군’ 3월호, 122쪽)

중공군이 70만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5차 대공세를 편 것은 미군이 동해안 통천 원산 등으로 상륙할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에 따라 반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38선을 치고 올라오면서 상륙작전으로 39도선의 안주~원산선으로 측면 공격해오면 주요 보급선이 차단돼 큰 위협이 된다고 봤다.

중국 랴오닝성 단둥 압록강 상류에 중공군이 도강했던 지점이라며 표지석과 병사들 동상을 세워놓았다. 뒤의 압록강에는 당시 임시 다리를 세웠던 흔적이 남아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 ‘북한의 산악지대로 유인’
중공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할 때부터 유엔군을 북한의 산악지대로 유인했다는 분석도 있다. 중국은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간 북한에 후방 역습을 경고했지만 상륙작전이 성공한 후에는 미군이 북한까지 진격하도록 지상군 투입을 늦췄다는 것이다. 북한 최북단 산악지역에서 맞붙는 것이 중공군의 보급선도 짧고 방어에도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미리 투입해 중공군이 38선까지 내려간 뒤 미군이 함흥이나 남포 등 더 북쪽으로 상륙하면 불리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쑤이, 155쪽)

미군이 압록강으로 진군할 때 마오쩌둥은 “맥아더가 고집과 오만을 부릴수록 우리에겐 유리하다. 오만한 적은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다”면서 미군이 최대한 북쪽으로 올라와 보급로에 문제가 생기기만을 기다렸다.(핼버스탬, 569쪽)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미 육군 2사단 마크. 단둥 = 홍진환 기자
<전쟁 기간 중공군 병력 수 증가>
구분
1950.10.28
1950.12월 초
1951.7.10
1953.7.27
사단 갯수
18
31
51
58
병력(명)
203,640
531,500
948,299
1,221,058
시기
첫 참전
2차 공세
휴전회담 시작
정전협정 서명


● 미 2사단, 군우리 전투 ‘인디언 태형’ 굴욕
중공군의 ‘매복과 덫’의 전술에 처절한 패배를 당한 것이 군우리 전투다. 국군 6사단을 시작으로 미군과 국군이 압록강에 도달한 직후부터 중공군의 맹렬한 기세로 이제는 포위망을 뚫고 후퇴하기 급급했다. 압록강에 처음 도달했던 국군 2군단 6사단은 초산에서 매복 포위당해 괴멸됐다. 7사단과 8사단 역시 중공군 공격에 하룻밤 사이 무너졌는데 두 사단의 사단장은 부대를 이탈한 뒤 서울 거리를 떠돌다 헌병에 체포돼 군법재판에서 무거운 판결을 받았다.

낙동강 전선에서 일제히 북진할 때 호남지방을 돌며 후방 게릴라 잔병 소탕을 하던 미 2사단이 국군 2군단이 무너져 뚫린 곳에 급거 투입됐다. 미 2사단은 청천강변의 평남 개천군 군우리의 좁은 계곡에서 중공군 제42군의 포위망에 걸려들었다. 미리 매복하고 있던 중공군이 정찰을 맡은 전차 소대를 통과시켰고, 뒤따르는 헌병 정찰대와 수색중대 정찰대, 본대를 분리 타격했다.

군우리 전투는 적이 매복하고 있을지도 모를 골짜기를 야간에 이동한 것부터 큰 실책이었다. 낮이라면 미군의 공군 및 화력지원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야간에는 홀로 적과 맞서야 한다. 카이저 사단장은 곧 바로 현직에서 물러났다. 미군의 전사(戰史)는 카이저 소장의 실수를 상세히 기록해 교훈으로 삼는다고 한다. (백선엽 1권, 125쪽).

미 2사단은 앞뒤가 차단된 상황에서 계곡 위에서 집중 포격과 사격을 받아 사흘만에 병력의 20% 만이 살아남았다. 전투가 끝난 뒤 트럭과 장비, 야포와 각종 무기 그리고 막대한 양의 물자가 고스란히 중공군에 넘어갔다. 그중 상당수는 베이징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등이 있는 최고 지도부에게도 전해졌다고 한다.(핼버스탬, 131쪽)

미 2사단의 부대 마크가 ‘인디언 헤드’이고 인디언들이 계곡 양측에서 공격하는 전술과 닮아 ‘인디언 태형’을 당했다고 미 전사는 기록한다. 군우리 전투(1950년 11월 29일~12월 1일)는 6·25 당시 미군의 사단급 부대가 당한 최악의 피해였다.(남도현, 279쪽).



● 남진(南進) 속도와 범위두고 공산측 내부 이견
미군이 중공군 공세에 38선 남쪽으로 철수한 것은 12월 16일이지만 중공군이 뒤따라 넘은 것은 열흘 뒤인 26일이다. 마오는 12월 4일 평양에 들어온 뒤 서울까지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펑더화이는 너무 멀리 내려가는 것은 보급선도 길어지고 유인 작전에 걸릴 수 있어 서울 점령은 북한군에 맡겨야 한다고 했다.(쑤이, 248쪽).

1951년 1월 8일, 펑더화이는 부대의 진공을 멈추고 전군 2개월간의 재정비를 명령했다. 중공군이 38선을 넘고 서울을 재점령한 뒤에는 중공군을 남쪽으로 더 유인한 다음 육해공 공동 상륙작전을 펴서 독 안에 든 쥐처럼 만들려는 계획인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펑더화이는 “37도선에서 공격을 멈췄는데 우리를 낙동강으로 깊이 유인하려던 적은 우리 방어가 견고하게 완성되지 않은 것을 알고 1월 하순 반격을 가했다”고 당시를 분석했다.(펑더화이, 429쪽)

북한주재 소련대사 라자예프는 “전투에 이기고도 적을 추격하지 않는 작전을 지시하는 사령관은 누구냐?”고 항의하다 스탈린에 의해 조기 귀국당했다.(훙쉐즈, 203쪽).

중국 랴오닝성 단둥의 ‘압록강 단교’에서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단교 왼편으로 북중 교역의 주요 통로인 ‘중조우의교’로 불리는 압록강 철교가 보인다. 철로와 도로로 쓰인다. 단둥 = 홍진환 기자


● 중소의 ‘제한전’
미국에서도 맥아더의 만주 폭격 등 확전론과 트루먼의 제한전론 간에 갈등이 있었지만 중소도 확전을 피하고자 했다. 1951년 4월 11일 트루먼이 맥아더를 해임하자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공포로부터 해방됐다’고 반겼다고 한다. 전쟁이 한반도에 국한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에 따라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하고 지원했던 소련과 중국은 미군이 신속히 지상군을 보내 참전하자 직접적인 대결이나 확전을 막으려고 했다.

중공은 공중전을 확대시키지 않아 미국의 핵공격 또는 중국 본토에 대한 보복행위의 위험을 피하려고 했다. 트루먼이 중국 본토로 전쟁을 확대하지 않은 데는 중국이 공군력 행사에 신중한 것도 한 요인이라는 분석이다.(쑤이, 260쪽) 소련도 미국과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기 위해 공군 작전에서 제한을 두었다. 전쟁에 참가했다는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이유는 다르지만 미국도 소련 공군의 참전 사실을 비밀로 했다. 소련 참전한 것이 부각되면 여론을 자극해 전쟁이 확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선즈화, 504쪽).

소련 공군 참전 및 교전 수칙
  • 소련 영토에서 이륙해 작전 투입 금지
  • 중국 혹은 조선비행기로 위장, 조종사는 중국 군복 착용
  • 조선 작전 투입 사실 누설 금지 각서와 선서
  • 비행 중 러시아어 사용금지
  • 유엔군 통제구역 혹은 전선 인접지역 비행 금지
  • 서해 상공 교전 금지
  • 평양〜원산 남쪽(39도선) 적기 추격 금지


절반만 끊어진 ‘압록강 단교(鴨綠江 斷橋)’
중국 랴오닝성 단둥의 ‘압록강 단교’. 강 가운데부터 북한쪽은 1950년 11월 미군 폭격으로 부서져 교각만 남아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중국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의 압록강 단교(斷橋)는 북한쪽이 없고 중국쪽 교각만 남아있다. 다리의 절반만 폭격으로 부서진 것이다. ‘압록강 단교’로 보존되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 이곳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한 6·25 전쟁을 읽는 중요한 코드가 담겨 있다.

다리가 절반만 끊어진 것은 ‘중공군에 대한 미군의 공습은 저기까지’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압록강 중간이 국경인데 북한쪽 절반만 폭격한 것은 중국으로의 확전을 막겠다는 트루먼 대통령과 군 및 보급품 차단을 위해 다리를 끊어야 한다는 맥아더 사령관의 절충점을 보여준다. 중공군 개입에 대응하기 위해 다리는 폭격하지만 절반 밖에 하지 못한 확전론과 제한전의 갈등이 절반만 파괴된 끊어진 다리에 응축되어 있다.

중국 랴오닝성 단둥의 ‘압록강 단교’ 끝에는 ‘역사의 귀감’으로 삼는다며 폭격 사실을 기록해 놓았다. 단둥 = 홍진환 기자
“워싱턴이 내린 제한 명령으로 나는 중공군의 대량 개입을 저지하기 위하여 취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만은 남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스트레트메이어 장군에게 B29 폭격기 90대로 압록강 철교를 폭파하라고 명령했다. 폭격을 잘못하여 폭탄이 만주 땅에 떨어질 위험이 있어서 나는 그때까지 그 명령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맥아더, 222쪽)

1950년 11월 6일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압록강 대교 등을 폭격하겠다는 스트레이트마이어 극동공군사령관의 전보를 받고 워싱턴이 발칵 뒤집혔다. 중간선거 전날 캔사스시에 있던 트루먼에게 애치슨이 긴급 전화를 걸었다. “사안이 중대해서 즉각적인 결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트루먼은 “아군에 대한 즉각적이고 심각한 위협이 있을 경우에 한해서 허락할 것”이라고 했다. 미 합참은 도쿄에서 폭격기가 이륙하기 1시간 20분 전 전문을 발송했다. 영국과 협의없이 만주에 영향을 미치는 행동을 취하지 않기로 했다고 알렸다. 명령이 있을 때까지 국경 5마일 이내 표적에 대한 폭격을 연기하라고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맥아더가 “대규모 병력 및 물자가 압록강 전 교량을 통해 만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고 있어 휘하 부대를 위태롭게 하고 궁극적으로 와해되도록 위협하고 있다”며 폭격의 필요성을 강조한 긴 전문을 보냈다. “합참의 지시는 중대한 재난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즉시 대통령이 제기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애치슨, 600쪽)

브래들리 합참의장이 맥아더의 전문을 전화로 트루먼에게 그대로 읽어주었다. 부대가 위협을 당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 트루먼은 결정을 번복했다. 다만 “압록강 교량의 한반도측 연결 부분을 포함하는 한만 국경에 대한 폭격을 허락한다. 압록강의 댐이나 수풍발전소 폭격을 허락하는 것은 아니다” “만주의 영토와 영공을 침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북한 신의주의 압록강 건너편의 중국 랴오닝성 단둥은 변경 관광도시 중 하나다. ‘압록강 단교’가 변경 10대 관광명소 중 한 곳이라는 안내문과 포토존이 마련되어 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스트레이트마이어는 “워싱턴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허가했다. 다리 절반만 폭격하려면 압록강 하류에서 일직선으로 비행하면서 폭격해야 한다. 그러면 적은 비행 코스를 알고 고사포를 발사할 것이다”고 했다. 실제로 이 작전으로 대공포 사격을 받아 부상을 입은 조종사는 “워싱턴과 유엔은 도데체 누구 편입니까”라고 물었다. 맥아더는 ‘절반 폭격’ 지시에 반발해 자신을 해임하라고 요청하는 전보 문안을 준비했다가 참모들의 만류로 찢어버리고 보내지 않았다.(맥아더, 224쪽). 맥아더는 “미국 역사상 야전 사령관에게 주어진 결정 중에서 이처럼 융통성이 없고 무모한 결정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영화 ‘디보션’에는 미 항모에서 출격한 비행기가 대공 사격을 받으며 아슬아슬하게 교각 사이를 지나며 폭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1950년 11월 미군의 압록강 철교 폭격 장면.
1950년 11월 미군의 압록강 철교 폭격 장면.
트루먼의 수정 명령에 따라 압록강 교량에 대한 폭파가 11월 8일부터 14일까지 진행됐다. 8일 스트레이트마이어의 일기는 이렇게 기록했다. “첫 비행에서 B-29 3대가 교각 사이의 수면위로 비행하며 폭격을 했다. 중공군은 (실력은) 보잘 것 없었지만 대공포격을 해왔다. 두 번째 비행에서는 4대의 B-29가 다른 쪽 교량 첫 번째 교각 사이 수면위로 비행했는데 결과에 만족한다. 내일은 B-29가 남은 교량들을 휩쓸고 지나갈 예정이다.”

참고문헌
남도현 지금, 『6·25, 끝나지 않은 전쟁』, 플래닛미디더, 2010.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이은진 옮김, 『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
데이빗 쑤이(徐澤榮) 지음, 한국전략문제연구소 옮김. 『中國의 6·25 戰爭 參戰』, 한국전략문제연구소, 2011.
딘 애치슨, 『Present at the Creation』, Norton & Company Inc., 1969.
백선엽 지음, 유광종 정리, 『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 1권, 2020.
선즈화(沈志華) 지음, 김동길 옮김, 『조선 전쟁의 재탐구』, 도서출판 선인, 2014.
스탠리 웨인트라웁 지음, 송승종 옮김,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작전』, 북코리아, 2015.
이상호 지음, 『맥아더와 한국전쟁』, 푸른역사, 2012.
펑더화이(彭德懷) 지음, 이영민 옮김, 『나, 펑더화이에 대해 쓰다』, 앨피, 2018.
훙쉐즈(洪學智) 지음, 홍인표 옮김, 『중국이 본 한국전쟁』, 한국학술정보, 2008.
『향군』 1991년 3월호, 대한민국재향군인회,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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