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타진요’를 기억하시나요. 2009년 한 네티즌이 “가수 타블로가 사실은 미국 스탠퍼드대를 졸업한 게 아니다”라며 타블로의 학력위조설을 주장했죠. 그 뒤로 몇 년 간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근거 없는 ‘타진요’(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 사태의 시작이었습니다.
사태 초반에만 해도 타블로는 직접 스탠퍼드대 졸업증명서와 성적표를 제시하며 해명에 나섰죠. 하지만 ‘타진요’ 카페 회원들은 “조작된 성적표”, “학교가 동명이인을 착각해 잘못 발급한 것”이라며 부정했습니다.
타블로는 2010년엔 ‘MBC스페셜’ 제작진과 함께 스탠퍼드대를 직접 찾아가 교수와 교무 담당자, 동문을 만나 ‘증언’을 받았습니다. 당시 스탠퍼드 교무 담당자는 방송 카메라 앞에서 즉석에서 타블로의 성적증명서를 출력하기까지 했죠. 하지만 이미 ‘타블로 학력위조’에 대한 확신에 가득찬 19만여 명의 타진요 회원들에겐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짜깁기 방송” “MBC의 교묘한 편집”이라고 항의하며, 방송 속 내용을 일일이 문제 삼는 등 학력 위조에 대한 ‘셀프 확신’을 이어갔습니다.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음모론에 결국 경찰까지 나섰습니다. 2010년 10월 서울 서초경찰서 사이버수사팀은 “타블로는 1998년 9월 스탠퍼드대에 입학해 2001년 3월 학사 학위를 땄다. 다음 달 대학 석사과정에 입학해 2002년 6월 졸업했다”는 최종 수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스탠퍼드대로부터 받은 ‘대니얼 선웅 리’(타블로 본명)의 학·석사 성적증명서를 대검찰청 문서감정실에 의뢰한 결과 문양 및 형식이 일치하는 진본이다.” “타블로는 1998년 이후 2002년까지 총 19번에 걸쳐 출·입국했다. 이 가운데 국내 체류 기간은 모두 방학 기간과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진영근 당시 서초경찰서 수사과장)
당시 경찰은 스탠퍼드대 한인동문회 총무와 대학 재학 시절 타블로와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한 한국계 미국인 S 씨 등에 대한 참고인 조사를 벌여 타블로가 실제 재학하고 졸업한 사실을 거듭 확인했습니다. 타블로가 TV 프로그램 등에서 밝힌 국내 체류 시점과 스탠퍼드대 재학 기간이 맞지 않는다는 ‘음모론’을 풀기 위해 타블로의 출입국 기록까지 분석했다죠.
하지만 타진요는 곧장 ‘경찰 불신론’을 주장했습니다. 타진요 게시판에는 “경찰 수사를 어떻게 믿느냐”, “미국 FBI에 수사를 요청하자”라는 글이 쏟아졌고, 서초경찰서에 단체 항의 전화 운동을 제안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당시 사회부 기자로 이 사건을 취재했던 저는 솔직히 이들의 ‘무한 불신론’이 정말 황당했습니다. 이쯤 되니 누가 뭘 더 이상 어떻게 증명하는가에 관계없이 그냥 타블로가 스탠퍼드 졸업생인 걸 믿고 싶어하지 않는 집단 같아 보이더군요.
13년만에 다시 문득 ‘타진요’의 악몽이 떠오른 건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관련 한국 정부의 발표도, 유엔 산하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보고서도 모두 “못 믿겠다”라는 더불어민주당 때문입니다.
“핵폐수 안전성을 검증하지 못한 깡통 보고서” “중립성을 상실한 정치적 평가” “일본 정부의 ‘용역보고서’”
7월 5일 IAEA가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오염수 방류 계획의 안정성에 문제가 없다”는 종합보고서를 발표하자, 민주당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투기 저지 대책위원회는 곧장 기자회견을 열고 이런 혹평을 쏟아냈습니다. 내용이 부실하고 일본 정부의 입김이 많이 반영돼 결과를 믿을 수 없다는 거죠. 민주당은 IAEA 보고서가 나오기 전부터 “IAEA를 어찌 믿냐”는 불신론을 이어왔습니다. 박광온 원내대표는 종합보고서가 나오기 하루 전 최고위원회의에서 이미 “IAEA 보고서는 과학적 보고서이기보다는 정치적 보고서일 우려가 크다”고 했죠.
요즘 민주당 내에선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IAEA는)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에 관여할 권한이 없다”(이재정 의원), “IAEA는 유엔 산하 기구가 아니다, 원전 국가들이 분담금을 내서 운영하는 기구”(양이원영 의원) 등 IAEA 자격마저 의심하는 발언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IAEA는 핵확산 방지와 핵 안보, 핵 안전을 다루기 위해 1956년 유엔 총회 승인을 거쳐 설립된 기구입니다. 한국을 포함한 171개 국가가 회원국으로 가입해 있고, 이들이 내는 분담금으로 운영됩니다. 박구연 국무조정실 국무1차장은 최근 브리핑에서 “IAEA는 유엔 사무총장이 주재하는 회의에 정기적으로 참여하고, 매년 유엔 총회에 활동 보고서를 제출하고 있으며, 회원국의 안전조치 의무 불이행 사항 등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보고한다”며 “유엔 산하에 있는 원자력 분야 전문 독립기구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민주당의 ‘IAEA 자격 시비’에 직접 반박했죠.
최근 방한한 라파엘 그로시 IAEA 사무총장도 민주당 의원들을 직접 만나 “IAEA는 국제 안전기준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조사를 진행했다”, “보고서 관련 팀은 11개국에서 온 원전 안전 관련 전문가들로 구성됐으며, 그 안에 한국인 과학자도 있다”고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타진요 마냥 민주당의 ‘불신론’에는 끝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들은 그로시 총장이 출국한 뒤에도 IAEA를 향해 “스스로 중립성을 증명하라”는 요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대체 뭘 얼마나 더 해명하고 증명하라는 걸까요.
“우리가 바라는 것은 후쿠시마 오염수가 안전하다는 말의 성찬이 아니라, ‘왜 안전한지’에 대한 과학적인 입증입니다. IAEA의 중립성부터 증명해야 합니다.” (홍성국 원내대변인·7월 10일 서면 브리핑) “(그로시 사무총장에게 후쿠시마 오염수를) 일본에서 음용수 또는 농·공업용수로 쓰도록 일본 정부에 권고할 의사가 있는지 물었지만, 이조차도 제대로 해명하지 못했습니다.”(윤준병 후쿠시마 오염수 원내대책단 위원·7월 11일)
그로시 총장이 한국에 이어 찾아간 뉴질랜드와 호주의 반응을 한 번 보시죠.
“뉴질랜드는 방류 계획에 대한 IAEA의 조언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다만 태평양 지역 국가들이 일본의 방류 계획에 대해 의미 있는 참여가 지속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10일 뉴질랜드 나나이아 마후타 외교부 장관)
“호주는 IAEA가 계획된 방류가 진행됨에 따라 지속적인 모니터링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우리는 앞으로도 대화나 투명성, IAEA에 대한 경의, 국제 안전기준의 존중을 장려한다.”(14일 호주 외교통상부) 이들은 우리보다 과학적 지식이 부족해서, 국제기구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IAEA의 계획을 믿고 지지한다는 걸까요. 민주당도 “IAEA를 존중한다. 다만 민주당은 한국 국민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IAEA의 모니터링 결과를 주시하겠다”는 정도의 날 서 있는 메시지만 냈어도 제1야당으로서의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겁니다. 굳이 출구전략 없는 불신론을 고집한 탓에 오히려 국민 불안감을 더 조장한 건 아니었을까요.
생각난 김에 오랜만에 타진요 카페를 다시 찾아봤습니다. ‘원조 타진요’는 운영자 ‘왓비컴즈’의 명의도용 문제로 경찰 수사 이후 폐쇄됐지만, 그 뒤로 ‘제2의’, ‘제3의’ 타진요 등 아류들이 남아 ‘음모론’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더군요. 이 카페에는 아직도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사기꾼 타블로의 증거 동영상’ 등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의심 대상의 범위를 넓혀 국민의힘 이준석 전 대표와 한동훈 법무부 장관 딸 등의 학력 위조 가능성까지 주장하고 있더군요.
“못 믿는 게 아니라 안 믿는 거잖아요.”
2010년 타블로가 MBC 방송에서 눈물을 흘리며 타진요를 향해 호소했던 말입니다. 민주당이 그 어떤 검증과 해명에도 각종 괴담과 불신론을 이어가는 것이, 타진요마냥 못 믿어서가 아니라 내년 총선을 앞두고 안 믿으려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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