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명 동의’ 국민청원 외면하는 여야…청원 145개 중 120개 계류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8월 8일 17시 22분


뉴스1
“아빠가 죗값을 치를 수 있게 도와주세요. 간절히 청원합니다.”

지난해 10월 4일 아버지의 가정폭력 살인으로 어머니를 잃은 아들은 사건 발생 8일 뒤 국회 국민동의청원 사이트에 “아빠가 심신미약을 주장하며 형량을 줄이려고 노력 중”이라며 “접근금지 (위반)과 심신미약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달라”고 청원을 냈다. 청원을 올린지 3주 만에 국민 5만 명이 동의해 지난해 11월 5일 국회에 청원이 제출됐다. 하지만 8일 현재 276일이 지났지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되지 않았다. 법사위 관계자는 “여야 간에 해당 청원을 처리하자는 의견이 모이지 않았다”고 했다.

8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1대 국회 들어 접수된 청원 145개 중 83%인 120개가 계류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105개는 국회법상 국회의장에게 청원 접수뒤 심사 결과를 보고하도록 정한 90일도 넘긴 상태다. 입법 기관인 국회가 5만 명의 동의를 받거나 의원을 통해 접수된 청원을 심사하고 입법을 통해 문제 해결책을 모색하는 역할에 소홀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치적 쟁점 사안이 아닌 사건·사고 관련 법과 제도 개선을 호소하는 청원 심사도 계속 미뤄지고 있다. 학창 시절 12년 동안 학교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한 20대 여성이 “학교폭력 공소시효를 없애달라”고 낸 청원은 접수 111일째 법사위에 상정되지 않았다. 친부와 계모의 학대로 멍투성이로 숨진 인천 12살 아이의 삼촌이 “아동학대 범죄를 신상 공개 대상에 포함해 달라”고 한 청원도 심사가 진행되지 않았다. 이에 국민의힘 소속 법사위원장인 김도읍 의원은 6월 29일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가정폭력 살인 사건 등 청원 8건의 심사 기한을 연장하며 “청원 심사에도 만전을 기해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처리 속도라면 청원 대부분이 폐기될 전망이다. 지난달 서울 서초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1학년 담임교사가 극단적 선택을 한 뒤 교사 권리 보호, 확대와 관련한 청원 3개가 국민 5만 명 동의로 접수됐지만 논의조차 시작되지 않았다. 앞서 20대 국회에서 접수된 청원 207개 중 166개(80%)도 임기 만료로 폐기된 전례도 있다.

국회가 청원 처리에 손을 놓은 이유는 상임위 의결만으로 심사 기간을 얼마든지 연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개선하고자 더불어민주당 진성준 의원 등이 청원 심사 무기한 연장을 폐지하는 내용의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이 역시 계류 중이다. 국회 관계자는 “의원들이 입법 실적 채우기 목적으로 무분별하게 법안을 발의하면서 이들 법안을 심사하느라 정작 국민의 간절한 호소를 담은 청원 심사가 지연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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