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에서 교동대교를 건너면 나타나는 교동도(喬桐島)의 대룡시장. 과거가 마치 영화세트장처럼 남아 분단과 휴전의 흔적을 보여주는 곳이다. 38선으로 남북이 분단될 때 황해도 연백군(현재는 연안군과 배천군)의 남쪽은 경기도에 편입됐지만 1953년 7월 휴전 이후 북한 땅으로 남았다. 피란 온 3만여 명의 연백군 주민들은 돌아가지 못하고 고향 연백시장을 본떠 전통시장 거리를 조성했다.
단층 가게와 좁고 굽은 골목, 이발관 다방 과잣집 등의 예스러운 간판 중에 ‘황해도 연백차떡’ ‘연백 강아지떡’처럼 고향인 연백을 넣은 것도 종종 눈에 띈다. ‘교동 이발관’은 피란민 1세대인 지모 씨가 1950년 전쟁 발발 직후 내려와 60여년 같은 장소에서 일했던 곳으로 지금은 자손들이 간판은 그대로 두고 술빵과 국수 등을 팔고 있다.
교동도 인사리의 북진나루에서 북한 황해남도 호동면까지는 불과 2.6km. 북쪽 해안에서 육안으로도 북한 땅이 보인다. 보이지 않는 바다의 경계선이 교동도를 남한 속의 북한 땅으로 만들었다. 북한 해안을 마주 보는 고구리 해안에는 ‘UN8240 을지 타이거 여단 충혼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충혼탑에는 ‘군번도 계급도 없는 육군 을지 제2병단과 유격군 8240부대 타이거 여단 이름의 방공 유격대 용사들의 넋이 잠들어 있다’고 씌어 있다. 섬 곳곳에는 방공 대피소가 있다. 1990년대 후반에는 북한에서 군인이나 주민이 바다를 헤엄쳐 넘어와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해 철조망도 쳐 있다. 서해에서 전쟁의 상처를 간직한 분단의 최전선이다.
● 해상의 휴전선 ‘북방한계선(NLL)’
교동도 북쪽 해안을 지나는 NLL은 휴전협정 서명 한 달가량 지난 8월 30일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해상에서의 정전협정 관리를 위해 설정한 것이다. 휴전협정 당시 육상 군사분계선은 설정됐지만 해상경계선은 별도의 협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엔군사령부는 구체적인 내용을 즉시 북측에 통보했다.(남도현, 374쪽)
NLL은 우리 군의 해양 작전 북방한계선을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의 서해 5개 섬과 북측 관할 옹진반도의 중간지점으로 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1972년까지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 11조는 ‘남과 북의 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은 1953년 7월 27일 자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해 온 구역으로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는 서해의 말도를 시작으로 12개의 좌표를 표시해 놓고 오랜 기간 관리해왔다.
육상 군사분계선 설정 원칙은 협상 체결 당시의 전투경계선이었다. 해양에서도 NLL 설정 당시 아군이 장악하고 있던 도서와 바다를 연결해 분계선을 긋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다 북한은 육상 전력에 비해 해군력은 약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NLL은 남한 해군이 이 선을 넘어 북쪽으로 가지 않겠다는 통보였다. NLL 설정 당시 NLL 북쪽의 서해와 동해에는 국군이 상당수 섬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엔군사령관이 한국군에 제시한 제한이었다.
NLL 설정으로 해병대가 피와 땀으로 차지했던 옹진반도 북서쪽의 초도와 석도, 원산 앞바다의 여도 명도 등 전략적 요충의 섬들이 NLL 북쪽에 있다는 이유로 북한에 내주게 됐다. 그럼에도 북한이 뒤늦게 시비를 걸고 나온 데는 휴전협상에서 합의 문서로 해양한계선을 명확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전 70년이 되었으나 분쟁과 갈등의 ‘휴화산’처럼 남아있다.(남도현, 391쪽)
● 중공군에 배운 땅굴, 휴전선 침투 ‘두더지 작전’
“여러분은 북한이 정전협정을 위반한 명백한 증거를 보게 될 것입니다.” 임진각을 찾는 관광객들이 도라전망대와 함께 찾는 3호 땅굴을 안내하는 가이드가 외국인들에게 설명하는 말이다. 6월 찾아가 본 3호 땅굴 전시관의 설명 자료에는 높이가 2m지만 일반에 개방된 ‘도보 관람로’의 땅굴은 높이가 1m 남짓에 불과했다. 천장이 모두 바위여서 성인은 허리를 구부리고 걸어야 하고 안전모를 착용하지 않으면 큰 부상을 입을 수 있다. 중공군은 유엔군의 포격과 공중 폭격 등 화력을 피하기 위해 땅굴을 팠으나 북한군은 휴전선을 지하로 침투하기 위해 두더지 작전을 펴다 발각된 것이다.
4개 북한 땅굴 비교
1호
2호
3호
4호
발견시기
1974년 11월15일
1975년 3월19일
1978년 10월17일
1990년 3월3일
위치
경기 연천 고랑포 동북방 8km
강원 철원 북방 13km
경기 파주 판문점 남방 4km, 서울에서 52km
경기도 양구 동북방 26km 비무장지대
제원
지하 25~45m, 폭 0.9m, 높이 1.2m
지하 50m, 폭 2.2m, 높이 2m, 길이 3500m
지하 73m, 폭 2m, 높이 2m, 길이 1,635m
지하 145m, 폭과 높이 1.7m, 길이 2,052m
특이점
레일 3.5km와 궤도차 설치
·지하 폭음소리로 지하수 개발용 시추장비 투입해 발견
·탐사 중 지하수 분출로 발견
북한 남한 굴착 억지. 폭약 장치 방향, 남고북저의 배수로 경사 등으로 북측 굴착 확인
·남측 출구 3방향, 시간당 3만 명 병력과 야포 차량 이동 가능
·남쪽에 3갈래 출구, 시간당 3만 명 이동 가능
출처 : 파주 DMZ 전시관
● 협정이 무색한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1976년 8월 18일 오전 11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의 남쪽 초소를 가리는 미루나무의 가지치기를 지휘하던 유엔군 소속 미군 아서 조지 보나파스 대위와 마크 토머스 배럿 중위가 갑자기 달려든 북한 병사들에게 도끼로 머리를 맞아 후송 중 사망했다. 북한 병사 30여명의 무차별 공격으로 한국과 미국 장병 9명이 부상했다.
미군은 미루나무를 밑동에서부터 잘라버리는 ‘폴 버니언’ 작전을 벌였다. 북한의 반발에 대비해 미국은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F-111 전투기 20대, B-52 전폭기 3대, F-4 팬텀 전투기 24대가 출동했고, 제7함대 항공모함 미드웨이를 동해로 보냈다. 한국 특전사는 북한 초소 4곳을 초토화했다. 유엔 측 경비대대 캠프 이름도 ‘캠프 보나파스’로 바꿨다. 사건 후 충돌을 막기 위해 공동경비구역(JSA) 내부에 남북 경계선이 그어졌다.
● 누더기가 된 정전협정
2022년 12월 북한 무인기 5대가 사흘간 서울과 경기 인천 상공을 휘젓고 돌아갔다. 국군은 자위권 차원에서 무인기 ‘송골매’ 2대를 군사분계선 북쪽 5km 상공까지 올려보냈다고 밝혔다. 유엔사령부는 “남북 무인기 모두 정전협정 위반”이라고 했다. 정전협정은 체결 70년을 맞은 오늘도 끊임없이 위반 논란을 빚고 있다.
정전협정에 따라 양측은 1953년 7월 30일 임진강 하구에서 동해안의 감호에 이르는 155마일(약 248km) 휴전선을 경계로 남북방 약 2km 폭의 비무장지대(DMZ)에서 군사력 철수를 마쳤다. 8월 2일에는 서해 5도 이외 동해안과 서해안의 DMZ 이북 도서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모두 돌아왔다.
군사분계선을 따라 남북 경계를 나타내는 표지주가 약 200m 간격으로 1292개가 설치됐다. DMZ 내에서는 어떠한 적대행위도 허용되지 않으며 군사정전위 허가 없는 인원 출입도 금지됐다.
전쟁 3년, 협상 2년이 걸려 가까스로 맺어진 정전협정. 군사분계선과 DMZ를 두고 정화(停火·총격을 멈춤)를 보장하며 정전을 유지 관리하기 위한 군사정전위, 중립국감독위를 설치 운영하기로 했다. 하지만 크고 작은 총격 포격 폭침 항공기 테러 등 무력도발이 계속됐다. 군사정전위가 관할하는 ‘남북한에 새로운 무기를 들여와서는 안 되며 기존 무기 교체도 1:1로 해야 한다’(협정 2조 13항) 등 많은 조항은 사문화됐다.
중립국감독위 4개국 중 2개국은 북한 쪽이 폴란드와 체코를 지명했다. 탈냉전 후 북한이 지명한 공산국가들이 자유진영으로 돌아오자 북한은 두 국가 대표를 추방해 중감위 활동이 무력화됐다. 심지어 북한은 2013년 3월 한미연합훈련을 빌미로 협정의 전면 백지화를 선언했다. 일방의 선언만으로 폐지되지는 않지만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 고도화 시기에 재래식 무기의 증강과 충돌을 막기 위한 협정은 수명을 다했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휴전선과 DMZ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 유엔사가 관리하는 협정을 통해 한반도에서 무력 충돌이 빚어지지 않고 평화가 유지되어 왔다는 평가가 많다.(‘2023년 정전협정 및 한미동맹 70주년 학술회의’ 자료집, 42쪽)
국방부에 따르면 정전협정 체결 이후 70년 동안 한국군 4268명, 미군 92명 등 모두 4360명이 무장 충돌 등으로 전사했다. 연평도 포격이나 천안함 폭침 등도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대규모 무력 충돌은 없었고 전쟁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피와 희생으로 정전이 유지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 ‘적군 묘지’와 유해 송환
정전 70년을 하루 앞둔 7월 26일 6·25 전쟁 국군 전사자 유해 7위가 73년 만에 하와이에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유일하게 신원이 확인된 고 최임락 일병은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했다. 북한이 수습해 1995년 미국으로 송환했다.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미 해군 최초의 흑인 비행사 제스 브라운의 동료 비행사 톰 허드너는 북한 당국의 안내로 장진호에서 브라운의 유해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남방한계선 남쪽 5km 경기 파주 적성면의 ‘북한군과 중국군 묘지(적군 묘지)’에는 6·25 전쟁 사망하거나 그 후 무장공비 등 109구의 북한군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묘지 방향이 임진강 건너 북녘땅을 바라보게 배치되어 있다. 돌아가지 못한 고향 땅을 죽어서라도 바라볼 수 있게 배려한 것이라고 한다.(문관현, 362쪽)
제2 묘역에 안장됐던 중공군 유해 541구는 2014~6년 3차례에 걸쳐 본국으로 송환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6월 중국 방문 중 중공군 유해 송환 의사를 밝혀 이듬해부터 중국으로 보내졌다. 중국은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에 ‘항미원조 열사능원’을 조성해 안장했다.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송환됐으나 횡성지구 전투 등에서 수습된 ‘무명인’ 유해는 몇 구가 그대로 남아있다. 북한군과 중국군 모두 초기에 조성했던 봉분은 모두 없어지고 평면 대리석 표지석으로 바뀌었다. 적군묘지 조성은 적군이라도 사망했을 경우 매장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제네바 협정 추가의정서 34조에 따른 조치다. 정전 70년의 세월 속에 전사자에 대한 상호간 예우는 지켜지고 있는 모습이다.
● ‘끝나지 않은 전쟁’
다부동 전적기념관 내부 전시의 마지막 항목이 나가려는 발길을 잡았다. ‘끝나지 않은 전쟁’이었다. 4차례 땅굴 굴착, 울진 삼척과 강을 잠수함 무장공비, KAL 858 폭파 등 테러가 있었다. 연평해전과 천안함 폭침 그리고 연평도 포격 등은 ‘전쟁 도발’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6차례의 핵실험이다.
북한은 정전 70년을 맞은 6월 27일 밤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괴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불리는 화성-17호와 화성-18호 등을 과시하는 대규모 야간 열병식을 가졌다. 여기에는 중국 리훙중(李鴻忠)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 부위원장과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도 참석했다.
이날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유엔군 참전의 날·정전협정 70주년 기념식’이 열린 부산 ‘영화의 전당’은 6·25 전쟁에 처음 파병된 미 지상군 24사단 스미스 특수임무대대가 처음 도착한 곳이다. 한반도의 안보 시계는 마치 70년 전으로 시계를 되돌린 듯해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곧 끝날 것 같지도 않은 것이 엄중한 현실이다.
한·미·중, 영화 속의 6·25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이 미국을 방문한 2011년 1월 19일 백악관에서 국빈만찬이 열렸을 때 중국의 피아니스트 랑랑(郞朗)이 ‘나의 조국’이라는 곡을 연주했다. 이 노래는 중국이 1956년 마오쩌둥(毛澤東)의 지시로 제작한 영화 ‘상감령’의 주제곡. 중국에서는 국가와 비슷하게 여기는 곡이다. 2008년 ‘중화부흥’을 주제로 한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 가장 먼저 울려 퍼진 곡이다.
1952년 10월 강원도 철원의 삼각고지와 저격능선 부근에서 있었던 상감령 전투는 중공군이 6·25 전쟁에서 세계 최강 미군을 상대로 승리했다고 선전하는 전투다. 가사는 어떤가. ‘승냥이와 이리가 침략해오면(若是那豺狼來了), 엽총으로 맞이할 것이네(迎接的有獵槍)’ ‘승냥이와 이리’는 물론 미군이다. 많은 미국인들은 가사의 의미를 모르고 곡조만 들었을 것이다. 요즘 같은 미중 갈등 시대라면 백악관에서 연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 한국, 영화로 되살아나는 6·25
‘인천상륙작전’(2016)은 해군 첩보부대와 켈로부대(KLO)가 상륙작전 직전 인천에서 기뢰 부설 등을 포함한 북한의 정보를 수집해 유엔군에 전달하고 인천상륙작전 당시에는 팔미도의 등대를 밝히는 과정에서 다수의 대원들이 희생되는 내용이다. ‘국제시장’(2014)은 흥남철수부터 베트남 전쟁 파병까지 한국군이 치렀던 두 개의 전투가 모두 배경으로 등장한다. 영화 ‘고지전’(2011)은 정전협정 발효 순간까지 최후의 전투를 벌였던 상황을 가상의 애륵고지 쟁탈전을 통해 보여준다. 정전협상이 타결됐다는 소식에 기뻐하면서도 발효까지 아직 12시간 이상 최후의 전투를 벌여야 하는 현실에 절망하는 장면들이 긴 잔영을 남긴다.
‘포화속으로’(2010)는 1950년 8월 11일 학도병 71명이 포항여중(현 포항여고)에서 북한군과 싸우다 옥쇄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 ‘장사리-잊혀진 영웅들’(2019)도 인천상륙작전이 있던 날 양동 작전을 위해 영덕 장사리 해안으로 상륙작전을 펴다 많은 인명피해를 입었던 학도병 부대인 ‘명부대’의 활약과 희생을 소재로 했다. 1977년에도 ‘학도의용군’이 개봉됐다.
‘태극기 휘날리며’(2005)는 전쟁 발발부터 휴전까지 3년의 전쟁 기간을 한 형제의 궤적을 중심으로 전개한다. 낙동강방어선을 포함한 주요 전투들이 두루 나오고 길거리에서 모병관에 의해 학도병이 충원되고, 형제가 북한과 남한 군대로 갈라서게 되는 등 전쟁의 여러 측면을 담아 ‘6·25 전쟁 종합판’이다.
‘웰컴투 동막골’(2005)는 산간 오지 동막골에 불시착한 미군 조종사와 우연히 이곳을 지나게 된 3명의 인민군, 2명의 국군이 벌이는 에피소드를 다룬다. 정전 협정 체결 직전 마지막 전투였던 베티고지 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로는 ‘베티 고지의 영웅들’(1980), ‘격퇴’(1956)가 있다.
‘전장과 여교사’(1966)는 개전 직후인 7월 초 6사단 7연대가 북한군 15사단을 격파한 ‘동락리 전투’를 소재로 했다. 당시 동락초 김재옥 교사가 국군에게 북한군의 동향을 알려 전투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빨간 마후라’(1964)는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배우의 전성기에 만들어진 영화로 공군을 소재로 했다. 1952년 경남 사천기지에서 강으로 이동한 제10전투비행단 소속 조종사 9명의 활약을 담았다. 주인공인 편대장 나관중 소령은 6·25 전쟁 중 203회 출격 기록을 세운 공군 조종사 유치곤 장군을 모델로 했다.(김용호, 162쪽)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을 탈환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시가전 등을 담았다.
‘5인의 해병’(1961)은 귀신 잡는 해병의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전쟁영화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고 한다. 통영과 인천상륙작전 등과 함께 해병대의 ‘5대 대첩’으로 불리는 강원도 양구의 도솔산지구 전투(1951년 6월)와 김일성고지 전투(1951년 8월) 등이 배경이 됐을 것이라는 관측이다.(김용호, 147쪽)
백선엽장군기념사업회 등은 백선엽 장군의 다부동 전투 등을 다룬 영화 ‘나를 쏴라’(가칭) 제작을 추진 중이다.
● 미국, 장진호 영화만 몇 편
미국에서 오랫동안 한국전쟁은 인기도 없고 잊힌 전쟁이었다. 그런 탓에 할리우드 제국을 거느린 미국에서 6·25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도 거의 없다. ‘도라 도라 도라’(1970),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 ‘미드웨이’(2019) 등 2차 대전을 소재로 한 대작들이 잇따라 나오는 것과 대비된다. 다만 혹한과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성공적인 철수를 했다고 자부하는 장진호 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가 눈에 띈다.
‘디보션’(2022)은 장진호 전투에 공중 지원에 나섰다가 비상 착륙한 뒤 사망한 해군 첫 흑인 조종사 제시 브라운을 소재로 했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 나온 ‘장진호 전투’(1952년)의 원제는 ‘후퇴는 무슨!(Retreat hell!)’이다. 장진호 전투에서 흥남으로 철수한 미 해병대 장교가 자신들은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후방으로 전진하는 작전을 펴고 있다며 한 말에서 따왔다. ‘싸우는 젊은이들’(1961)도 장진호 전투에서 벌어진 해병대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평생 들어보지 못했고 처음 와보는 곳에서 치러야만 했던 미군들의 희생을 그리고 있다.(김용호, 126쪽)
1962년 제작된 ‘맨츄리안 캔디데이트’는 미군 포로가 중공군 포로수용소에서 미국 대통령 후보를 암살하도록 세뇌를 당해 공산주의자의 조종을 받는 암살 기계가 된다는 내용이다. 1959년 리처드 콘든의 소설 ‘만주가 만든 대통령 후보’를 원작으로 한 것이다.
● 중국, 애국심 고취 영화 제작 잇따라
중국에서는 미중 갈등 속에 애국심을 높이기 위해 미국과 적이 되어 싸웠던 ‘항미원조’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 제작이 잇따르고 있다.
‘장진호’(2021년)는 미중 갈등 속에서 애국심에 편승해 많은 중국인들이 관람했다. 중국은 병사들의 희생과 영웅 정신을 그린 것으로 혹한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국을 퇴각시켰다고 선전한다. ‘장진호 수문교’(2022)도 장진호에서 흥남으로 철수할 때 지나야 하는 황초령의 수문교 쟁탈전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1953 금성대전투’(2020년·원제 금강천)는 정전협정 체결을 앞둔 1953년 7월 강원도 화천 북쪽에서 벌어진 금성전투를 배경으로 한다. 미군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등 중공군의 참전을 정당화하는 전형적인 선전물 영화다. 영상물등급심의위원회에서 ‘15세 이상 관람가’ 판정을 받아 국내 수입이 추진되자 여론이 악화돼 수입사가 상영을 철회했다.
중국 관영 중앙(CC)TV가 40부작 드라마로 방영했던 중공군의 참전 과정을 영화 ‘압록강을 건너다’도 같은 이름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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