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플리트(1892〜1992)는 8군 사령관에서 유엔군사령관으로 영전해 자신의 상관이 된 리지웨이에 비해 육군사관학교 2년 선배다. 두 사람은 2차 대전 중에도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았다. 리지웨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밴플리트가 8군 사령관으로 투입된 것은 그가 그리스에서 1948년 2월부터 1950년 7월까지 공산게릴라 소탕 작전을 완벽하게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마셜 국방장관의 강력한 추천을 트루먼 대통령이 수용했다.
● 그리스 공산 게릴라 토벌한 밴플리트
밴플리트가 부임한 1951년 4월은 공산측과 휴전이 모색되던 때였다. 7월부터는 정전 협상이 시작됐다. 그가 1953년 2월 떠날 때까지 약 2년간 미군 수뇌부는 ‘승리’보다는 ‘패하지 않는 전쟁’에 더 관심을 두었다.
이런 분위기는 ‘승리말고는 대안은 없다’는 맥아더와 소신이 같았던 밴플리트와는 맞지 않았다. 그는 휴전 정책이 군사적 승리를 가로 막고 있다고 생각했다.(남정욱, 11쪽) 그는 휴전 협상중에도 전선의 북상을 원했다. 중공군이 70만의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1951년 4월과 5월 두 차례의 춘계 대공세를 폈으나 격퇴된 것도 밴플리트의 ‘공산 게릴라 토벌’ 같은 단호한 대응 때문이었다.
밴플리트는 부임 직후 서울 광화문에서 마포 한강변까지 155mm와 105mm 야포 400문을 세워 놓고 밤낮없이 포격을 가했다. ‘밴 플리트 탄약량’이라는 말이 있다. 좌표를 찍어 적정량을 쏘는 것이 아니라 물량 공세를 펴는 것이다. ‘400문 야포’ 시위도 그 중 하나였다. 서울 재탈환을 목표로 한 대규모 중공군 공세 앞에서 서울을 내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었다. 미 의회 등에서 탄약 소모량이 너무 많다고 문제를 제기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중공군의 대공세는 밴플리트의 2년 재임 기간에는 다시는 펼쳐지지 않았다. 다만 휴전 회담이 진행되고 있는 중에 수세적인 리지웨이가 1년간 유엔군사령관으로 있는 동안 그의 공격적인 계획은 종종 제동이 걸렸다. 리지웨이가 소극적이고 수세적으로 대응한 대표적인 조치가 밴 플리트가 최북단 통제선으로 설정한 와이오밍선(연천∼고대산∼화천) 이북으로 진격할 때는 도쿄 사령부의 승인을 받도록 한 것이다. 밴플리트의 탈롱스 작전(맹금 발톱작전), 랭글러 계획(대타격 작전) 등은 동부 전선의 방어선을 밀어올리거나, 평강〜금성〜고지 선을 확보하는 것이었으나 모두 승인을 받지 못했다.
작전 제약 속에서도 휴전선이 지금과 비슷한 위치로 형성된 것은 밴플리트의 공세작전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한다. 그리스에서 공산 게릴라 토벌의 경험은 1951년 말 백선엽 지휘하에 지리산 빨치산 토벌에도 적극 나서도록 했다.
● 밴 플리트, 이승만과 가장 가까웠던 미 사령관
한국을 관할하는 미국 사령관과 이승만 대통령은 서로 껄끄러운 일이 많았다. 인간적인 요소가 작용할 때도 있었지만 주로는 서로의 지위와 역할이 달랐기 때문이다.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이승만 대통령을 상대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워커는 개전 초기 낙동강까지 밀려만 가는 것에 이승만은 불만을 나타냈다. 북진과 통일에 모두 거부감을 가졌던 리지웨이와는 ‘물과 기름’이었다.
밴플리트는 한국에 부임해 처음 이승만을 알게 됐지만 애국과 열정을 존경해 자국의 국가지도자처럼, 이승만은 친자식처럼 대할 정도로 친밀했다.(남정욱, 89쪽) 그는 지휘 계통상 작전 활동 제약으로 군사적 행동을 하지는 못했으나 이승만의 북진 통일론을 이해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재임 중 밴플리트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수여했고, 8군 사령관을 마치고 떠날 때는 태극무공훈장을 주었다. 밴플리트는 1953년 3월 전역 후 아이젠하워로부터 주한 미 대사직을 제안받았으나 바로 거절했다. 부임하면 직책상 휴전에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맞서야 했고 휴전을 반대하는 그의 소신과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 한국 국방과 한미 우호의 초석닦은 은인(恩人)
밴플리트는 6·25 전쟁 3년간 6명의 유엔군사령관과 미 8군 사령관 중 가장 긴 2년간 근무했다. 중공군의 2차례 춘계 대공세를 격퇴한 후에는 휴전회담속에 지리한 고지전을 이어가던 때였다. 밴플리트는 향후 분계선이 될 대치 전선을 밀어올리는 공세를 펴면서도 한국군 전력을 증강하는 많은 조치들을 취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초급 장교 육성을 위해 육군사관학교를 4년제로 전환하고 국군 20개 사단의 증편, 국군 장교들의 미 군사학교 유학 등이 대표적이다. 백선엽은 105mm 포 밖에 없었던 한국군이 1952년 4월 한국군 포병으로 이뤄진 155mm 포 4개 대대를 보유한 2군단의 재창설은 한국군 현대화에 큰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했다.(백선엽, 2009, 88쪽)
한국에서 38년의 군경력을 마친 밴플리트는 한국을 제2의 조국이라고 여기며 한국과 한국군의 발전, 한미 우호 증진을 위해 헌신했다. 미국의 저명한 인사들이 참여한 ‘코리아 소사이어티’라는 민간단체를 만들어 한국을 지원하고 한미 우호 증진에 기여했다. 코리아 소사이어티는 1992년부터는 한미우호에 기여한 인물들에게 밴플리트 상을 수여하고 있다. 미국의 카터와 아버지 부시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 키신저, 이건희 정몽구 등이 이 상을 받았다. ‘한국 육군사관학교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밴 플리트는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1960년 미 사령관으로는 유일하게 동상이 건립됐다.
● 이승만 제어하면서 존경한 클라크 사령관
클라크 사령관(1896∼1984)이 유엔군사령관으로 부임한 1952년 5월 7일 거제포로수용소에서는 포로들이 수용소장을 포로로 잡는 폭동이 일어났다. 휴전협상의 마무리를 위해 파견된 그의 임무가 얼마나 험난한 지 첫날부터 잘 보여주었다.
클라크는 공산측이 휴전 회담 기간에 땅굴을 파는 등 방위선 구축을 위해 이용했다고 보고 있었다. 그는 회담은 결국 협상이 아니라 총포에 의해 타결되었다고 생각했다. 회담 중 수풍댐이나 평양에 대규모 폭격을 가한 것도 그 때문이다.
클라크는 휴전 회담을 위해 넘어서야 할 장애가 한국의 안전보장 없는 휴전을 단호히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이 신봉하는 유일한 무기는 힘’이라고 생각한 그는 이승만의 북진통일에 대해 누구보다 공감했다. 미 정부의 지휘를 받는 신분이자 유엔군사령관으로서의 역할 때문에 정전 협정에 끝내 협조하지 않으면 이승만을 하야시키는 ‘에버레디 계획’까지 세우고 이승만이 협정의 조건으로 요구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반대했지만 이승만의 반공 신념에는 누구보다 높이 평가하고 존경을 나타냈다.
● ‘맥아더 확전론’에 공감한 클라크
클라크는 부친이 참모학교 소령일 때 맥아더가 중위로 집에 찾아오면서부터 친교가 있는 사이. 1951년 2월 현장 실태 조사를 위해 한국에 왔을 때 만난 맥아더는 압록강 이북 중공군 기지 공격을 막는 워싱턴 합참을 비판하는 얘기를 들었다. 훗날 1974년 출판된 자서전 ‘댜뉴브에서 압록강까지’에서 “중공군이 개입한 이상 압록강 이북에 적의 안전지대를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맥아더의 견해에 완전히 동의했고, 그후에도 견해를 바꾼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전임자인 리지웨이와 동기로 밀접한 관계라고 했지만 한국전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큰 차이가 있었다.(클라크, 65쪽)
클라크는 자신이 미 정부의 지시와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현장 사령관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도 “역사는 휴전을 앞세운 미국의 주장보다 이승만이 더 정당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라고 훗날 자서전에서 극찬했다.(클라크, 19쪽). 그가 유럽 전선 ‘다뉴브’에서 겪은 공산주의자의 경험 때문이었다. 휴전협정에 서명하면서도 ‘승리없는 휴전에 서명한 첫 미군 사령관’이라며 불명예스럽게 생각한 것도 그 때문이다.
● ‘휴전을 위한 군정가 테일러’
테일러(1901∼1987)는 휴전 협상 막판인 1953년 1월 부임했다. 2차 대전 중 101공수사단장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했고 베를린 봉쇄 사태 당시 서베를린 주둔 미군 사령관을 역임한 맹장이었다. 백선엽 장군은 포병 출신으로 7개 언어가 가능한 명석한 인물로 군정가로도 손꼽혀 그의 임명은 휴전을 염두에 둔 포석이라고 평가했다.(백선엽, 2009, 317쪽)
군의 경제적 운용을 강조해 탄약과 물자의 소모에 강력한 통제를 가한 테일러는 중공군 격퇴를 위해 적정량을 따지지 않고 포탄을 퍼부었던 ‘밴플리트 탄약’과는 달랐다.
● 포로 교환으로 3년 만에 돌아온 딘 24사단장
딘 소장은 북한군과의 초전인 죽미령 전투에 투입된 미 24사단 사단장으로 한국에 왔다가 대전 전투에서 후퇴하는 과정에서 ‘실종’됐다 포로가 됐다. 그는 “전투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것은 적에게 포로로 잡히는 것이다”라는 신념이 있어 2차 대전에서 그가 지휘하는 부대는 포로가 적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6·25 전쟁에서 자신이 포로가 됐다. 전쟁 중 포로가 된 유일한 미군 장성이다.(최상진, 41쪽)
딘은 부대가 대전에서 북한군에 3면으로 포위된 상황에서 직접 3.5인치 바주카포를 들고 전차에 맞서기도 했으나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대전에서 처음 고립될 때는 17명의 미군 병사와 함께 있었지만 부상한 병사에게 물을 구해주러 나섰다가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진 뒤 혼자가 됐다.
지리를 모르는 딘 소장은 60km 떨어진 무주까지 이동했다. 그는 완주군에서 주민 한 모씨에게 돈을 주고 대구로 가는 길 안내를 맡겼는데 그가 북한군에 밀고해 포로가 됐다. 한 씨는 전쟁 후 체포돼 5년형을 받았다.
그는 처음에는 전주 형무소에 갇혔다가 나중에는 평양, 압록강 인근의 만포진 포로수용소, 심지어는 만주 지역으로 이동해 포로 생활을 했다. 3년이 넘는 시간이었다. 휴전 후 돌아왔다. 그는 만포진 수용소에게서 안흥만이라는 북한군 장교에게 몰래 친절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백선엽이 부산에서 5연대장을 할 때 부하였으나 전쟁 직후 북한군에 가담했던 인물이었다.(백선엽 2권, 217쪽)
그는 정전 협정이 체결된 뒤 1953년 9월 4일 낙동강방어선이 무너진 뒤 투항한 북한군 중좌 이학구와 포로교환으로 귀환했다. 미 의회는 1951년 1월 그에게 미군에 최고훈장인 ‘명예 훈장’을 수여했다.(최상진, 45쪽). 그는 포로 경험 등을 담은 자서전 ‘General Dean’s Story’(1954)를 남겼다.
6·25 전쟁을 함께 한 종군기자들
1950년 6월 25일 오전 8시 주한 미국 대사관 기자실. 한국 부임 11개월 가량된 UP 통신 잭 제임스 기자는 ‘인민군이 올해 가을까지는 공격이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는 취지의 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북한의 공격임박설이 끊이지 않아 그날 새벽에도 도쿄 맥아더 사령부의 정보부인 ‘G-2’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전화했으나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그때 대사관 복도에서 황급히 오가는 한 정보관과 마주쳤다.
“무슨 일입니까?”
“망할 놈들, 8사단을 제외한 모든 전선에서 38선을 넘어온 모양이야?”
제임스는 기자실에서 1시간 반 가량 여기저기 전화를 돌렸다. 당시는 실제 싸움이 없는데 과장된 보고들도 많았다. 그는 아시아에서 오래 근무한데다 평소 정직하고 성실하다고 인정을 받아 대사관에서 긴급히 열린 주한 미 군사고문단(KMAG) 회의에도 참석할 수 있었다.
한 장교가 (개전 소식을) 워싱턴에 급히 알려야 한다고 보고했다. 제임스는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나와 긴급으로 송고했다. 6·25 전쟁 첫 외신 보도였다.(굴든, 55쪽)
냉전이 열전(熱戰)으로 전환되고 2차 대전 후 5년 만에 미국 소련 중공 등 강대국이 참전한 가운데 3년 여 계속된 6·25 전쟁의 현장에는 때로는 목숨을 건 많은 종군 기자가 있었고 특종도 쏟아졌다.
● 맥아더 동행 기자보다 빨리 인천상륙 특종
AP통신의 신화봉 기자는 부산에 있으면서 인천상륙작전을 특종 보도했다. 1950년 9월 15일 오후 1시 50분 ‘유엔군이 오늘 아침 인천 월미도에 상륙했다…’는 뉴스를 맥아더 사령부가 공식 발표하기 9시간 전 부산발로 보도했다. 맥아더의 상륙작전에는 도쿄 사령부 출입기자들이 동행해 현장에도 있었으나 이들보다 부산에 있던 신 기자가 먼저 보도한 것이다.
정일권 소장은 후일 회고록 ‘전쟁과 휴전’(1986)에서 상륙작전 이틀 전 신 기자가 보도해 북한이 사전에 알았을 것이라고 적었는데 이는 명백한 오류라고 지적했다. 자신은 미 제5 해병연대 정보통으로부터 듣고 사전에 알고 있었으나 사전보도하면 ‘이적행위’로 군법회의에 회부되기 때문에 실행된 후를 기다렸다고 밝혔다. 그는 인천상륙작전 작전 과정에서 부상을 입고 후송되어 온 환자를 인터뷰하고 해군 관계자를 통해 확인했으며 정일권 소장 명의를 빌려 보도하기 위한 노력 등을 기울였다고 자세히 소개했다.(신화봉, 132쪽)
정일권은 워커 미 8군 사령관이 참모회의를 마치고 돌아간 뒤 회의에 참석했던 K모 소령과 늦게까지 신 기자가 술자리를 하다 내용을 듣게 됐다고 했다. 정 총장 이름으로 발표한 것도 임의로 이름을 쓴 것이라며 옆에 있었으면 총을 빼들었을 것이라고 했다.(정일권, 131쪽) 하지만 신 기자는 2000년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이 정 총장을 설득해 정 총장 이름으로 한 것이라고 했다.
● 인천상륙작전 알고 보도 안한 기자들
인천상륙작전에서 9m 높이의 인천항 벽을 올라가는 것이 큰 과제였다. 사령부가 일본의 여러 공장에 200개의 알루미늄 사다리를 주문했다. 도쿄 사령부의 기자들은 인천에서 상륙 작전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을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기자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외부로 누설하지 않았다. 맥아더 사령부는 이를 감사하게 생각했다고 맥아더의 대변인이었던 로우니는 밝혔다.(로우니, 71쪽)
맥아더 사령부 취재 기자들 사이에서 인천상륙작전은 (언제 실행되는 지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언젠가 할 것으로 예상한 ‘누구나 아는 작전’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히긴스, 188쪽)
● ‘대동강 철교 폭파’ 사진 특종
6·25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진 중 하나는 ‘폭파된 대동강 철교’다. 이 사진을 촬영한 AP통신의 막스 데스포 기자는 이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데스포는 전쟁이 터진 1주일 후 급파돼 3년 동안 줄곧 한국전에 종군했다. 그는 1950년 11월 말 중공군 참전으로 후퇴하던 미군과 함께 움직일 때 수천 명의 피난민이 폭파된 대동강 철교를 타고 넘어오는 장면을 찍었다. 이 사진은 미군이 1950년 12월 4일 다리를 폭파한 이후 남은 구조물로 아슬아슬하게 필사적으로 넘어오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은 물에 떨어져 떠내려갔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당시 글쓰는 기자는 몇 명 있었지만 사진 기자는 자신 혼자였다고 했다. 날씨가 추운데다 적의 추격으로 오래 머무를 수 없어 잠깐 동안 찍은 8장의 사진 중 한 장이 부서진 철교 사진이었다.
● ‘귀신잡는 한국 해병대’, 마거릿 히긴스
종군 여성 기자로 널리 알려진 미국 ‘뉴욕 해럴드 트리뷴’의 마거릿 히긴스는 개전 직후 도쿄에서 건너와 1950년 말까지 취재했다.
6월 29일 한강방어선을 둘러보고 도쿄로 돌아가는 맥아더의 전용기 바탄호에 동승해 맥아더로부터 ‘미 지상군 파병’ 얘기를 듣고 특종을 낚았다. 그는 인천상륙작전과 장진호 전투 등을 취재한 뒤 돌아가 ‘자유를 위한 희생(War in Korea)’을 집필해 1951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는 1950년 8월 17일 한국 해병대 1개 중대가 북한군 대대 병력을 섬멸하고 경남 통영을 탈환하자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기사를 써서 지금도 해병대 애칭으로 쓰인다.(‘1129일간의 전쟁’, 533쪽).
히긴스는 한국전쟁 보도에 대해 “준비 안 된 군대가 겪은 절망과 공포의 순간들을 사실 그대로 전해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해서는 안된다는 여론을 미국내에 조성하는 것”이라고 했다.(히긴스, 135쪽)
6·25 개전 당시 육군본부 인사국장이었던 강영훈 전 국무총리는 남자 야전복을 입은 히긴스 기자를 만난 일화를 소개했다. 김백일 군단장을 통해 한국군 전선을 둘러보고 싶다고 해서 안내를 하게 됐다. 히긴스를 대대본부로 데려갔더니 총격전이 벌어지는 일선을 보고 싶지 대대본부는 관심이 없다고 했다. 다시 500m 이상 전방 능선까지 가서 소대 병사들이 적을 향해 사격을 하는 곳으로 갔다. 히긴스는 병사에게 요즈음 무엇을 먹느냐고 물었다. 병사가 하루 세 끼 주먹밥 한 개씩을 먹는데 반찬은 소금이라고 대답했다. 더 필요한 것 없느냐고 묻자 “임무가 적을 격퇴시키는 것인데 개인적인 소원이 있겠느냐”고 해서 강 전 총리는 통역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고 했다.(강영훈, 151쪽)
히긴스는 은퇴한 뒤 1965년 베트남을 여행하던 중 풍토병에 감염돼 치료받다 사망했다. 한국 정부는 2010년 히긴스의 딸 린다 밴더블릿씨에게 수교훈장 흥인장을 전달했다. 미국 정부는 군인도 아닌 그를 워싱턴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해 예우했다.
● 반공포로 석방 특종
UP 통신 이상규 기자는 1953년 6월 18일 새벽 부산 동래에서 일을 보고 부산으로 나오다 포로들의 탈출 광경을 목격했다. 서울 취재본부인 내자아파트에 전화를 기사를 불러 5시 40분 경 1보가 타전됐다. 이날 부산 마산 광주 논산의 포로수용소에서 반공 포로 석방이 개시된 것은 오전 2시경이어서 3시간이 채 되지 않아 첫 보도가 나갔다.(이용호, 117쪽)
● 아이젠하워 극비 방한 스토리로 퓰리처상
1952년 11월 한국 전쟁의 명예로운 종식을 공약으로 내건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당선되면 한국을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지켜 그해 12월 2일부터 5일까지 극비 보안속에 한국에 왔다. 수행 기자는 6명이었는데 기자들은 가족들에게도 출장지역을 알리지 못하도록 했다. 기사는 아이젠하워가 한국을 떠난 후 보도하도록 했다.
동행 기자 중 AP통신의 돈 화이트헤드 기자는 아이젠하워의 극비 방한 기사 ‘거대한 속임수(the great deception)’로 1953년 국내보도 부문 퓰리처상을 받았다.
‘1952년 11월 29일 새벽 5시 30분, 두 사나이가 뉴욕의 모닝 사이드 드라이브 60번지 저택문을 통해 별이 총총한 차가운 밤거리로 급히 걸어나왔다. 추위를 막으려는 듯 코트깃을 세운 그들이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리무진에 재빨리 오르자 차는 어디론지 사라졌다. 두 사람 중 하나는 비밀경호원 에드워드 그린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 장군이었다.’
● ‘평화 열차(peace train)’ 휴전협상 취재
판문점 휴전회담을 위해 유엔군 대표단 숙소 및 지원시설을 갖춘 전방기지가 문산역 인근에 설치돼 ‘문산 베이스 캠프’라고 불렀다. 문산역 구내에는 11개의 객차 침대차 식당차 조리실로 구성된 유엔측 기자들의 전방취재 공간이 마련됐는데 이를 ‘평화 열차’라고 불렀다. 서울 내자(內資) 아파트에는 각 외신 언론사의 사무실이 있어 두 곳이 휴전회담 취재의 두 포스트였다. 한국 전쟁 중 이 두 곳을 거친 외신기자는 500명 이상이었다.
내외신 기자들은 서울에서 문산까지는 각 자의 지프차, 문산에서 판문점은 헬기를 타고 다녔는데 회담 초기에는 평화열차에서 숙식을 하다, 회담이 지루하게 계속되면서 관심이 많이 줄었다.(이용호, 109쪽)
● 6·25 전쟁 순직 종군기자 18명
한국기자협회는 6·25 전쟁을 취재하다 순직한 한규호 서울신문 기자 등 국내외 기자 18명(국내 1명, 외국 17명)의 추념비를 건립했다. 전국 일선기자들의 성금과 사회 각계 지원을 받아 1977년 4월 27일 파주 통일공원 내에 추념비를 마련하고 매년 추도식을 갖고 있다.
최기원 홍익대 교수가 설계한 추념비는 타자기 모양의 화강암으로 된 받침대 위에 저널리스트의 머리글 ‘J’자를 본 딴 텔리타이프 종이가 높이 솟은 형상이다. 추념비 윗부분에는 승리의 월계수와 기자정신을 상징하는 펜을 쥔 손, 한국전쟁을 뜻하는 지구가 조각돼 있다.
한규호 기자는 개전 직후 북한군이 국군 복장과 견장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할 때 서울에 남아있던 한 기자는 신문 보도로 이름이 알려져 북한군에 체포돼 피살된 것으로 전해졌다.
<참고 문헌>
남정욱 지음, 『밴플리트 대한민국의 영원한 동반자』, 백년동안, 2014. 백선엽 지음, 『군과 나』, 서울: 시대정신, 2009. 백선엽 지음, 유광종 정리, 『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 2권, 2020. 마크 W. 클라크 지음, 김형섭 옮김,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 국제문화출판공사, 1981. 최상진 지음, 『영원한 친구들』, 한미우호협회,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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