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50, 필리핀 신규 전투기 도입 사업에서 경쟁국 압도

  • 주간동아
  • 입력 2023년 8월 27일 10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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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현지서 실전 능력 이미 입증, 스웨덴은 ‘악성 재고’ 기종 투입

한국 공군 FA-50 전투기가 8월 21일 한미연합연습 일환으로 실시된 방어제공훈련에 참여하기 위해 이륙하고 있다. [공군 제공]
한국 공군 FA-50 전투기가 8월 21일 한미연합연습 일환으로 실시된 방어제공훈련에 참여하기 위해 이륙하고 있다. [공군 제공]
1990년대 초반 스웨덴이 완성한 소형 전투기 JAS-39 ‘그리펜(Gripen)’에 많은 나라의 이목이 집중됐다. 항공기 분류 기호에 붙은 JAS는 스웨덴어로 각각 요격(jakt), 공격(attack), 정찰(spaning)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이는 단일 기종으로 여러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멀티롤 전투기’로서 강점을 드러낸 작명이었다.

기대 못 미친 저조한 그리펜 수주 실적
다재다능한 전투기로 개발됐음에도 그리펜의 덩치는 상당히 작았다. 당시 서방 세계의 표준 경량 전투기였던 F-16은 자체중량 8.5t, 최대이륙중량 19t 정도였다. 반면 그리펜은 자체중량 6.8t, 최대이륙중량 14t으로 F-16보다 한 체급 낮은 전투기로 개발됐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인 지난해 5월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 의사를 밝히기 전까지 스웨덴은 군사중립 노선을 고수했다. 유사시 자국 군사력만으로 외침을 막아야 했기에 스웨덴 군 당국은 그리펜 개발 과정에서 “스칸디나비아의 거친 자연환경에서 전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렇게 개발된 그리펜의 강점은 저렴한 획득비용과 유지비였다. 1990년대 후반 F-16 가격은 예비 부품과 무장 등을 포함해 이미 600억~800억 원이 넘었다. 반면 그리펜 가격은 400억~500억 원에 불과했다. 부품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데다, 정비에 필요한 인력도 적어 유지비가 낮게 책정된 것이다. 그럼에도 그리펜의 전반적인 전투 능력은 F-16에 크게 뒤지지 않았다. 최대속력은 마하(음속)2에 달했고 무장 장착대 8개에 최대 5.3t의 무장을 탑재할 수 있었다. 그리펜은 스웨덴 공군의 작전요구성능(ROC)을 반영해 일반 공군기지는 물론, 고속도로나 국도에서도 최소 활주거리만 확보되면 이착륙이 가능했다. 이는 공군기지 같은 인프라가 부족한 제3세계 국가들에 상당히 매력적인 요소였다. 저렴한 가격과 상당한 수준의 성능을 갖춘 그리펜이 출시된 후 “세계 전투기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킬 것”이라는 호평이 쏟아졌다.

그러나 돌풍은 없었다. 1998년 남아프리카공화국, 2008년 태국이 소량 도입했을 뿐 그리펜은 당초 예상과 달리 이렇다 할 수출 실적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펜 제조사 사브는 자기네 제품이 세계 시장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 것이라고 생각해 대량 생산 인프라를 갖추고 많은 전투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예상과 다른 저조한 판매 실적에 상당수 그리펜이 재고 신세를 면치 못했다. 남아공과 태국은 주문한 이듬해 전투기를 인수했는데, 이 물량도 재고품이었다. 이에 사브는 1990년대 나토에 가입한 동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세일즈에 나섰다. 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등이 그리펜에 관심을 보였지만, 구매가 아닌 임대 형태로 스웨덴 공군의 비축 기체를 가져다 쓰는 데 그쳤다.

스웨덴 그리펜 전투기. [뉴시스]
스웨덴 그리펜 전투기. [뉴시스]


개량형 그리펜NG, 높은 가격이 흠
사브는 수출 대박을 터뜨릴 것으로 예상된 그리펜의 실패 원인이 성능 부족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확대개량 모델인 JAS-39E/F 그리펜NG를 출시했다. 그리펜NG는 기존 그리펜 기체를 전면 재설계하고 엔진과 레이더, 항공전자장비를 일신한 4.5세대 전투기다. 최대이륙중량이 16.5t까지 증가하고 무장 장착대도 기존 8개에서 10개로 늘어났다. 불어난 덩치를 감당하고자 엔진은 미국 F/A-18E/F ‘슈퍼 호넷’용 F414로 파워업했다. 그리펜NG는 F-16에 비해 전체 중량은 가볍지만 무장 탑재량은 7.2t으로 대등한 수준이다. 능동전자주사식위상배열(AESA) 레이더와 센서융합기술, 네트워크 협동 교전 능력도 갖춰 전투 능력이 우수하다.

문제는 성능을 대폭 키우느라 그리펜NG 가격도 덩달아 상승했다는 점이다. 우여곡절 끝에 체결된 2013년 브라질 전투기 공급 계약 당시 그리펜NG 가격은 36대에 54억 달러(약 7조2400억 원)였다. 아무리 사브가 현지 생산, 기술이전 등 좋은 조건을 제시해도 어디까지나 경량 전투기인 그리펜NG를 대당 2000억 원에 살 나라는 많지 않다. 브라질 납품 이후 사브는 그리펜 수출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자국 방산업체의 고전에 자극받은 것일까. 스웨덴 정부는 최근 필리핀의 신형 전투기 도입 사업을 수주하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다.

필리핀은 1992년 미군 철수 이후 경제와 안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잃었다. 1990년대 중반 F/A-18 전투기 도입을 추진했지만 1997년 아시아 전역을 덮친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아 무기 도입 사업을 모두 포기하다시피 했다. 한국이 사실상 공짜로 넘긴 F-5A/B를 2005년 퇴역시킨 필리핀 공군은 한동안 제대로 된 전투기도 없이 암흑기를 보냈다. 필리핀은 2000년대 중국과의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이 심화되자 공군력 재정비 필요성을 절감했다. 중고 전투기 구매를 고려한 필리핀 정부의 레이더에 포착된 기종이 미국 F-5E/F, 이스라엘 크피르, 프랑스 미라지2000 등이었다.

중국과 영유권 분쟁으로 군사력을 확충하고 있는 필리핀의 해안경비대가 남중국해에서 훈련하고 있다. [뉴시스]
중국과 영유권 분쟁으로 군사력을 확충하고 있는 필리핀의 해안경비대가 남중국해에서 훈련하고 있다. [뉴시스]
문제는 필리핀이 눈여겨본 기종들은 부품을 구하기도 어려운 노후 모델이었다는 점이다. 저렴한 비용에 도입해도 결과적으로 유지비용이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필리핀군에는 고등훈련기가 없어 당장 전투조종사를 양성하기도 어려웠다. 이에 따라 필리핀은 전투기로 쓰면서 훈련기로도 사용할 수 있는 저렴한 기체를 찾았다. 한국 FA-50이 필리핀에 수출된 배경이다.

필리핀은 2014년 대당 약 340억 원에 FA-50PH 12대를 구입했다. 그보다 훨씬 전에 남아공과 태국이 도입한 그리펜보다도 낮은 가격이었다. FA-50 시리즈는 가격 경쟁력뿐 아니라 우수한 성능도 갖춘, 최강의 가성비 전투기다. FA-50은 기계식 레이더 가운데 성능이 가장 우수한 EL/M-2032를 탑재해 100~150㎞ 거리에서 적 전투기를 탐지할 수 있다. 링크-16 데이터링크 시스템을 갖춘 덕에 육해군과 전술 정보를 실시간 공유할 수 있는 것도 강점이다. 무장 탑재 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게 아쉽지만 저렴한 가격과 유지비, 필리핀 공군의 작전 환경 등을 고려하면 최적의 선택이었다.

FA-50PH, 필리핀군 실전에서 대활약
실제로 필리핀은 FA-50PH를 인수한 뒤 그 성능과 신뢰성, 후속군수지원에 큰 만족감을 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2017년 필리핀군은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IS(이슬람국가)와 연계된 자국 내 테러조직 토벌 작전에서 FA-50PH를 이용해 큰 성과를 거뒀다. FA-50PH의 우수한 성능 덕에 테러조직 수장과 지휘부를 초정밀 폭격으로 제거한 것이다.

이미 필리핀 공군에서 활약 중인 FA-50 시리즈가 신규 전투기 도입 사업에서도 비상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당초 필리핀은 미국의 최신 4.5세대 전투기 F-16V 도입을 희망했으나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최근 F-16V 주문이 폭주해 빠른 도입이 어려운 데다, 가격도 매우 비싸졌기 때문이다. 필리핀은 약 1조4000억 원 예산으로 전투기 12대를 도입할 계획인데, 최근 F-16V 대당 가격은 1억5000만 달러(약 2005억6500만 원)에 육박한다. 필리핀이 F-16V 도입을 망설이자 스웨덴은 적극적으로 그리펜 세일즈를 시작했다.

스웨덴 정부는 지난해 12월 마닐라 주재 스웨덴대사를 앞세워 국가 차원의 방산 세일즈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그 결과 올해 5월 필리핀 국방장관이 스웨덴을 방문해 그리펜 전투기 생산 라인을 둘러봤고, 6월 두 나라 사이에 상호군수지원을 위한 업무협약(MOU)이 체결됐다. 지금도 외교라인을 총동원한 스웨덴의 그리펜 세일즈는 계속되고 있다.

스웨덴이 필리핀에 제안한 모델은 최신형 그리펜NG가 아닌, 중고 그리펜을 개량한 일명 ‘그리펜 플러스’다. 사브가 보유한 잉여 기체와 스웨덴 공군에서 퇴역한 기체를 신품 수준으로 오버홀(정밀수리) 한 뒤 그리펜NG에 적용된 신기술로 업그레이드해주겠다는 것이다. 이 같은 방법으로 필리핀 예산 범위에 맞춰 그리펜 14대를 공급할 수 있다는 게 스웨덴의 설명이다. 최근 필리핀 측과 회동에서 스웨덴대사는 전투기 판매와 함께 정부 차원의 금융 프로그램도 제안했다고 한다. 필리핀이 필요로 할 경우 차관 또는 대출 보증 같은 지원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스웨덴의 세일즈 행보가 다급해진 것은 6월 필리핀 국방장관이 교체된 것과 무관치 않다.

변호사 출신인 길버트 테오도로 신임 필리핀 국방장관은 FA-50 전투기 도입 당시 필리핀 공군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예비역 공군대령 신분을 부여받았다. 자국 공군의 FA-50PH 도입 및 운용 전반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FA-50 시리즈에 우호적인 인사로 알려졌다. 스웨덴으로선 자국과 관계를 형성해왔던 전임 국방장관이 생각보다 빨리 물러났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테오도로 장관 취임 직후 그동안 숨죽여 있던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필리핀에 FA-50 블록(Block) 20 판매와 기존 FA-50PH 성능 개량을 제안하고 나섰다.

FA-50 블록 20, ‘다목적 경전투기’ 활용 가능
FA-50 전투기가 8월 15일(현지 시간) 바르샤바 상공에서 폴란드 공군과 편대 비행을 하고 있다. [한국항공우주산업 제공]
FA-50 전투기가 8월 15일(현지 시간) 바르샤바 상공에서 폴란드 공군과 편대 비행을 하고 있다. [한국항공우주산업 제공]
KAI가 제안한 FA-50 블록 20은 중고 그리펜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대안이다. FA-50 블록 20은 최근 폴란드와 말레이시아 공군이 주력 경전투기로 도입을 결정했을 만큼 이미 품질을 인정받았다. 최대이륙중량은 13.5t으로 그리펜과 비슷하고, AESA 레이더와 최신 항공전자장비도 탑재했다. 암람(AMRAAM)과 IRIS-T 등 각종 고성능 공대공미사일 탑재가 가능하며, 스나이퍼 타기팅 포드를 적용해 다양한 정밀유도무기를 투발할 수 있다. FA-50 블록 20의 미사일 운용 능력은 앞으로 더 강화될 전망이다. 현재 한국은 타우러스 KEPD 350-2 공대지미사일을 개발 중인데, 완성되면 FA-50 블록 20에도 탑재할 수 있다. 미국이 협조할 경우 NSM 공대함미사일을 탑재하는 것도 기술적으로 가능하다. 공중급유 기능을 갖춘 것도 강점이다. 필리핀 공군이 미군 지원을 받아 남중국해 배타적 경제수역을 모두 작전권 하에 둘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FA-50 블록 20은 공대공·공대지·공대함 모든 임무에 투입할 수 있는 다목적 전투기로서 잠재력을 갖춘 셈이다.

FA-50이 그리펜을 압도하는 또 다른 소구력은 가격 경쟁력이다. FA-50 블록 20은 한국군 도입에 앞서 폴란드, 말레이시아 수출이 성사되며 ‘규모의 경제’를 확보했다. 앞서 언급한 모든 사양에 예비 부품과 무장을 합쳐도 대당 가격은 600억 원이 넘지 않을 전망이다. KAI 측은 신품 기체 12대를 공급하는 것은 물론, 기존 FA-50PH 성능 개량도 가능하다고 필리핀에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필리핀으로선 1조4000억 원 비용으로 고성능 4.5세대 전투기를 사실상 24대나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같은 분위기가 이어진다면 FA-50 블록 20의 필리핀 수출은 성공적으로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악성 재고’ 성격의 그리펜과 달리, FA-50은 각국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는 고성능 모델이다. 미국 공군과 해군, 해병대의 차기 전술훈련기로 대량 도입이 유력시되는 기종이기도 하다. FA-50이 필리핀 시장에서 그리펜을 물리치고 자유진영 표준 경전투기로서 입지를 확고히 하길 기대해본다.

〈이 기사는 주간동아 1404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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