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방위산업체의 가장 큰 고민은 신제품을 어떻게 홍보할지다. 일반 공산품이야 TV, 인터넷, 라디오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광고하거나 판촉 행사를 벌여 홍보할 수 있다. 반면 일반인이 구매할 수 없는 특수 상품인 방산물자는 구매자가 각국 정부로 한정돼 있기에 일반 공산품과는 다른 홍보 전략과 수단이 필요하다. 정부 입장에서도 수만 곳에 이르는 전 세계 방위산업체를 전부 수소문할 수는 없다. 이런 이유로 각종 방산물자 거래에서는 공급자와 수요자를 연결해주는 이벤트가 필요하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열리는 방위산업 전시회가 일종의 직거래 장터 역할을 하는 배경이다.
역대 최대 규모 MSPO
방산업체들은 전시회에 부스를 설치하고 최신 제품 실물이나 모형을 전시한다. 이런 전시회는 수요자와 공급자만 입장할 수 있는 ‘비즈니스 데이’와 일반인도 관람할 수 있는 ‘퍼블릭 데이’로 나뉘어 진행된다. 전시회 목적 자체가 직거래 장터 역할이기에 이벤트는 대부분 비즈니스 데이에 집중된다. 이 같은 방산 전시회에는 보통 자국 방산의 육성과 홍보를 위해 행사를 마련한 주최국이 있다. 세계 최대 방산 전시회라는 영국 방위·보안장비 전시회(DSEI)나 프랑스 유로사토리(Eurosatory)는 각각 영국과 프랑스 정부가 주최하고, 대부분 그 나라 업체들이 참여한다. 국내 업체들이 주로 참여하는 서울에어쇼(ADEX)나 대한민국방위산업전(DX KOREA)도 한국 정부나 정부 산하 기관이 행사를 주최하고 전반적인 운영을 맡는다. 그런데 9월 5~8일(현지 시간) 폴란드에서는 대한민국을 ‘주도국(lead nation)’으로 하는 ‘국제방위산업전시회(MSPO) 2023’이 열려 이목을 끌고 있다.
MSPO는 1993년부터 매년 열리는 폴란드의 방산 전시회다. 유럽에서 유로사토리와 DSEI에 이은 3번째 규모로, 참여국과 업체가 꾸준히 늘고 있다. 지난해에는 33개국 613개 업체가 참여했고, 이번 행사에는 33개국 614개 업체가 참여 등록을 마쳤다. 올해 MSPO에는 약 2만5000명이 참석할 것으로 추산돼 지난해(약 1만9000명)를 뛰어넘는 역대 최대 규모 행사가 될 예정이다.
지난해 폴란드에서 ‘방산 잭팟’을 터뜨려 화제를 모은 한국 방산업체들도 MSPO 출격 준비를 마쳤다. 현대로템,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한국항공우주산업(KAI), LIG넥스원, 풍산 등 대기업은 물론, 여러 중소기업이 참여 등록을 마치고 부스 설치에 나섰다. 폴란드 현지 매체들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국방예산을 대폭 증액한 유럽 각국이 대규모 무기 구매에 나설 것”이라고 전망한다. 특히 올해 MSPO는 11월 런던에서 열리는 DSEI에 필적할 규모라는 점에서 세계 각국 방산물자 공급자와 수요자 모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런 무기 전시회가 열리면 세계 각국과 방산업체는 대규모 구매 계약에 앞서 양해각서(MOU)를 체결한다. MSPO를 앞두고 이미 유럽에서는 또 한 번 ‘K-방산’ 돌풍이 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폴란드에서 다시금 주목받을 국산 무기의 면면을 살펴보자.
‘K-방산’ 열풍 조짐
최근 유럽이 특히 주목하는 K-방산 품목은 전차다. 올해 MSPO에서 현대로템은 폴란드군에 납품한 K2를 비롯해 현지화 개량모델 K2PL 등 차세대 전차를 선보일 예정이다. K2의 경우 소폭 개조된 모델 180대가 순차적으로 폴란드에 납품되고 있고, 현지에서 개량형 800대 이상이 생산될 예정이다. 폴란드에 대량 생산 거점이 마련된 후 인접한 동유럽 국가가 동종 모델을 도입할 경우 구매 가격은 물론, 유지비용도 저렴해진다. 상대적으로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동유럽 국가들이 특히 K2 전차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다.
지난해 상당수 동유럽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이 보유하고 있던 구형 전차를 우크라이나에 기증했다. 하지만 이들 국가 가운데 신형 전차를 바로 도입한 경우는 드물어 방산시장에서 상당한 수요가 예상된다. 독일은 유럽연합(EU)과 나토에서의 막강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동유럽 국가들에 자국산 레오파르트 2 전차를 구매할 것을 압박하고 있다. 문제는 레오파르트 2 전차 가격이 폭등하면서 대다수 국가가 구매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노르웨이는 당초 레오파르트 2A7NO 모델을 구매하기로 했는데, 최근 독일이 신형 레오파르트 2 전차 시리즈를 A8 사양으로 단일화하면서 계약을 새로 체결했다. 이 과정에서 대당 450억 원이던 전차 가격이 600억 원으로 폭등했다. 최근 동종 전차를 구매하기로 한 이탈리아는 대당 430억 원 예산을 책정했는데, 마찬가지로 결코 낮지 않은 가격이다. 이들 국가가 거금을 들인다 해도 당장 전차를 인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노르웨이는 독일 측으로부터 초도 물량 납품에 향후 4년가량이 소요된다고 통보받았다. 이탈리아도 올해 계약이 이뤄져도 2029년은 돼야 전차를 인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당장 신형 전차가 필요한 국가 입장에선 레오파르트 2에 비해 가격은 절반 이하인 데다, 납품은 빠른 K2에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실제로 300대 규모의 신형 전차 도입 사업을 추진하는 루마니아가 K2를 도입할 것이라는 설이 솔솔 흘러나오고 있다. 전차 도입을 국방 장기 계획에 반영한 불가리아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등 동유럽 국가도 폴란드의 K2PL 전차 사업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이번 MSPO를 계기로 한국 정부와 업체가 분위기만 잘 조성한다면 유럽 여러 나라가 공동구매 형태로 K2PL을 도입하는 것도 꿈은 아니다. K2 시리즈가 ‘동유럽 표준 전차’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제 보병전투장갑차도 세계 각국으로부터 주목받고 있다. 최근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폴란드의 차세대 보병전투장갑차 개발에 참여하게 됐다. 이미 현지에서 크게 호평받고 있는 K9 자주포 차체를 폴란드 차세대 보병전투장갑차(IFV) 플랫폼으로 제공하고, AS21 장갑차 기술도 전수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AS21은 최근 호주 IFV 도입 사업에서 독일 KF41을 누르고 수주에 성공했다. 폴란드와 인접한 루마니아도 298대 규모의 신형 장갑차 도입 사업을 추진하면서 AS21을 유력 후보로 검토하고 있다.
옛 소련제 밀어내는 국산 포병 무기
이제 세계 자주포 시장에서 스테디셀러가 된 K9과 빠른 납품 속도로 폴란드를 놀라게 한 K239 천무 다연장로켓 시스템 등 포병 장비도 향후 추가 수출이 예상된다. K9은 이미 폴란드에 672문이 납품되고 있고 영국(116문), 루마니아(54문) 등에도 수출이 유력한 상태다. 이들 나라가 도입하는 K9 모델은 최신형인 A2 버전이다. 자동화된 무인포탑을 탑재해 분당 최대발사속도가 10발에 달하는 등 경쟁 모델의 성능을 압도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폴란드 현지 버전인 K9PL 생산이 본격화되고 영국과 루마니아 수출까지 성사되면 K9은 동유럽의 구형 소련제 야포를 대체하는 다크호스가 될 전망이다.
또 다른 포병 시스템인 천무도 폴란드에 288문이 수출된 ‘대박 상품’이다. 옛 소련제 BM-21 계열 다연장로켓을 대신할 무기체계를 찾는 국가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다. 이미 노르웨이 업체와 제휴해 현무 수출이 추진되고 있다. 스웨덴, 루마니아 등도 천무와 전술지대지유도무기(KTSSM)를 패키지 형태로 도입하는 데 관심을 보인다. 천무의 장점은 우수한 품질과 저렴한 가격이다. 폴란드가 발사차량과 전용 탄약 2만3000발을 구매하면서 전반적인 도입 가격이 크게 낮아졌기 때문이다. 경쟁 모델인 미국 하이마스(HIMARS)보다 발사차량 및 탄약 가격이 저렴하고 납기도 빠르다. 이번 MSPO를 계기로 천무를 구매하려는 국가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한국산 보병용 무기 중에선 현궁 대전차미사일이 주목받고 있다. 현궁은 이미 중동에서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았다.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등 중동 국가 정규군이 성능에 크게 만족하는 것은 물론, 현지 게릴라들도 노획하고자 애쓴다는 후문이 있을 정도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현궁과 같은 톱어택(top attack: 방호력이 취약한 기갑차량 상부를 노리는 공격) 방식의 재블린 미사일이 맹활약하면서 수요가 크게 늘었다. 재블린 공급이 달리자 일종의 대체재로서 현궁 몸값이 덩달아 올랐다. 재블린과 현궁을 모두 운용하는 사우디에서는 “현궁 성능이 재블린보다 뛰어나면서도 가격은 저렴하다”는 호평이 나오고 있다. 이번 MSPO에서 적절한 홍보만 뒷받침된다면 현궁이 대량 수출될 가능성도 커 보인다.
지상무기뿐 아니라 국산 전투기도 틈새시장을 공략하며 수주 성과를 올리고 있다. KAI의 FA-50은 폴란드가 48대를 전격 구매하면서 화제가 됐다. 세계 경전투기 시장에서 동급 기체인 스웨덴 그리펜과 이탈리아 M-346FA가 고전을 면치 못하는 가운데 FA-50의 가치가 더 높아졌다. 최근 출시된 모델은 능동전자주사식위상배열(AESA) 레이더와 신형 무장, 공중급유장치 등을 갖춘 블록 20인데, 체코와 아일랜드가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최근 유럽 국가들은 F-35, 유로파이터, F-16V 등으로 전투기 기종을 통일하는 추세다. 다만 하나같이 획득 및 유지비용이 큰 기종이라, 상당수 국가가 보조용 전투기 도입을 병행하고 있다. 이런 수요를 정확히 파악해 파고든 게 바로 FA-50이다. 폴란드의 FA-50 운용이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면 구매를 추진하는 국가가 더 늘어날 것이다.
한-폴 협력으로 유럽시장 교두보 확보
올해 MSPO에는 국내 조선사들도 참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폴란드와 캐나다의 신형 잠수함 도입 사업을 앞두고 한국형 잠수함을 홍보할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한화오션과 HD현대중공업은 3000t급 잠수함 외에도 다양한 유형의 호위함, 초계함 수출 모델을 각국에 제안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신형 초계함·잠수함 구매 사업을 추진 중인 루마니아도 국산 무기 수출이 유력한 나라다. 루마니아는 프랑스제 초계함·잠수함을 도입할 예정이었으나, 업체 측이 가격을 인상해 최근 초계함 계약은 취소했고 잠수함 구매도 재검토 중이다. 경쟁력 있는 가격을 제시한다면 루마니아의 해군력 현대화 사업을 한국 업체들이 수주할 수 있다.
폴란드가 올해 MSPO 주도국 역할을 대한민국에 맡긴 것은 한국과 손잡고 유럽 무기시장의 새판을 짜기 위해서다. 폴란드는 나토 가입 후에도 독일, 프랑스의 강력한 견제로 유럽 방위산업에서 변방 취급을 받았다. 그렇기에 한국의 도움을 받아 방산 제품의 경쟁력을 높이는 동시에, 한국산 무기를 유럽에 전파하는 공급자로서 국가 위상을 높이려는 것이다. 이번 MSPO는 폴란드에서 열리지만, 사실상 한국산 무기와 한국의 기술 지원으로 폴란드에서 제작되는 무기체계가 주인공인 ‘K-방산 홍보의 장’이 될 전망이다. 각 업체의 철저한 준비와 정부의 지원사격으로 폴란드를 교두보 삼아 K-방산의 세계화가 본격화되길 바란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