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이) 아메리칸드림의 완전한 구현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아메리칸드림을 지키기 위해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미국 공화당 조지 산토스(35) 하원의원은 지난해 11월 뉴욕주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이같은 출마의 변을 밝혔습니다. 그가 살아온 과정은 마치 드라마 주인공 같았습니다. 브라질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조부모가 홀로코스트 피해자고, 어머니는 9·11테러 생존자라고 밝혔습니다. 자신은 동성애자라고 공개했습니다.
그는 굴하지 않고 노력해 자신의 어려운 환경을 극복해나갔습니다. 뉴욕 명문 공립대인 버룩 칼리지를 졸업하고 뉴욕대 경영전문대학원(MBA)을 졸업했습니다. 골드만삭스와 씨티은행 등 월가의 대형은행에서 일하면서 부를 쌓았습니다. 그 돈으로 13개의 부동산을 샀고, 동물 구호 자선단체를 설립해 2500마리가 넘는 개와 고양이를 구하는 등 사회 공헌에도 힘썼습니다. 그의 말처럼 자기 삶이 ‘아메리칸드림’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젊은 나이, 굴곡진 인생, 화려한 경력을 바탕으로 중간선거에서 민주당 텃밭으로 꼽히는 뉴욕주(뉴욕 3구)에서 공화당 소속으로 수십 년 만에 당선됐습니다. 그는 일약 정계에서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 학력·경력 모두 가짜… 국회 조사서 실체 드러나
그러나 영광은 얼마 가지 않았습니다. 뉴욕타임스(NYT) 보도로 그의 학력과 경력이 대부분 거짓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버룩 칼리지에서는 그의 졸업 기록을 찾을 수 없었고, 씨티은행과 골드만삭스에도 그가 일했다는 자료는 없었습니다. 그가 설립했다던 동물 구호 단체도 실체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오히려 남의 아픈 반려견을 내세워 모금한 뒤 돈을 가로챈 사실만 드러났습니다. 동성애자라더니 한 여성과 수년간 결혼생활을 하다가 이혼한 것도 밝혀졌습니다. 진보 성향이 강한 뉴욕 유권자를 겨냥해 선거용으로 경력을 지어낸 것이었습니다.
언론 추적 보도 과정에서 그가 19살 때 브라질에서 사기 혐의로 기소된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결국 산토스 의원은 자기 학력과 회사 이력이 허위이며, 13곳의 부동산을 소유하지 않고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많은 이들이 이력서를 과장하거나 조금 왜곡한다”며 의원직을 사퇴할 뜻이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분노한 뉴욕 주민들이 나섰습니다. 주민들은 그간 밝혀진 허위 경력 이외에도 산토스의 선거자금 유용 정황에 대해 하원 윤리위원회에 제보했습니다. 공화당 의원들도 그에 대한 조사를 촉구했습니다. 공화당 마이클 게스트 의원이 위원장을 맡고 있는 하원 윤리위는 올해 2월 조사소위원회를 꾸렸습니다.
약 10명의 변호사로 구성된 조사소위는 그의 불법 선거운동, 이해충돌 의혹, 정치자금법 위반 등에 대한 조사에 나섰습니다. 10개월여에 걸친 조사 끝에 16일(현지 시간) 56페이지 분량의 보고서가 발간됐습니다. 그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산토스 의원은 선거 과정에서 모금한 정치자금으로 에르메스와 페라가모 같은 명품 옷을 사 입었습니다. 보톡스 시술 등 피부관리를 받고, 포르노 사이트 연회비를 결제한 것도 밝혀졌습니다. 가족 휴가 때 초호화 호텔에 머물며 정치자금으로 숙식비를 냈습니다. 남는 돈은 자신이 설립한 컨설팅 회사 계좌로 이체해 신용카드 대금을 결제하고 은행 빚을 갚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게스트 윤리위원장은 보고서 발간 다음 날인 17일 “산토스 의원은 미국 하원의원으로 활동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며 “밝혀진 증거는 처벌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하다”고 제명안을 발의했습니다. 공화당 지도부도 동조하고 나섰습니다.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은 조사소위 보고서 내용에 대해 “매우 우려스럽다. 심각한 수준”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하킴 제프리스 하원 원내대표도 “산토스 의원이 공직에 부적합하다”고 밝혔습니다.
제명 결의안이 본회의에 넘어가자 산토스 의원은 다급해졌습니다. 올해 5월에 사기와 돈세탁, 공금 절도 등 23개에 달하는 혐의로 체포됐을 때도 재선 도전 의사를 굽히지 않았던 산토스 의원은 돌연 “내 가족을 언론 공격에서 보호하겠다”며 차기 선거 불출마를 선언합니다.
의원들의 동정심을 유발해 제명을 피하겠다는 의도였습니다. 하지만 의회 내 여론은 좋지 않습니다. 17일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에 따르면 공화당 하원의원 약 60명이 제명 찬성 의사를 밝히고 있으며, 그 숫자는 계속 늘고 있습니다. 의원직 제명에는 재적의원 3분의 2 찬성이 필요합니다. 민주당 의원 전원이 찬성표를 던진다고 가정했을 때 공화당 의원 20명만 더 동조하면 제명안은 가결됩니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23일 추수감사절 연휴가 끝나고 하원 본회의에서 의원직 제명안에 대한 투표가 이뤄질 예정입니다. ‘선거 사기꾼’ 산토스 의원의 정치생명은 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 있으나 마나 한 K 윤리특위
K국회에서도 부적절한 언행을 한 의원을 국회 윤리특별위원회(윤리특위)에 회부해 조사합니다. 참여연대의 ‘열려라 국회’ 자료에 따르면 21대 국회에서 34명이 윤리위에 회부됐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장경태(3건)·윤호중(2건)·김의겸(2건) 의원, 국민의힘 조수진 의원(2건)을 비롯해 민주당을 탈당한 김남국 의원(2건) 등이 포함돼 있습니다.
특히 김남국 의원의 경우 올해 5월 언론 보도를 통해 60억 원가량의 코인 보유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국회 회의 중 코인 거래 정황이 나오는 등 의혹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습니다. 김 의원은 “진실게임을 하자”고 당당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의혹이 커지자 국회 윤리심사자문위원회가 조사에 나섰습니다. 자문위는 올해 7월 김 의원이 국회 상임위원회 도중 최소 200회 이상 코인 거래를 한 것으로 파악했다고 밝혔습니다. 김 의원이 2021년 말 보유했던 가상화폐 거래소 잔액은 한때 약 99억 원에 달했던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선거 홍보 영상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고등학교 2학년 때 산 안경을 20년 동안 쓰고, 부친의 차를 물려받아 24만 ㎞를 타고, 매일 라면을 먹고, 3만7000원짜리 구멍 난 운동화를 신고, 돈이 없어 호텔 대신 모텔에서 잔다던 젊은 의원이 실제로는 국회 상임위 때도 상습 코인 거래를 하며 부를 축적한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자문위는 김 의원 ‘제명’을 권고했습니다. 이에 윤리특위에서도 자문위의 권고를 고려해 김 의원에게 중징계를 내릴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윤리특위의 징계를 논의하는 당일 김 의원은 돌연 다음 총선 불출마를 선언합니다. 민주당 의원들 사이에서 동정론이 퍼지며 징계 논의는 보류됐습니다. 그리고 8일 뒤 국민의힘과 민주당이 3대 3 동수를 이루고 있는 윤리특위 소위원회는 가결 3표, 부결 3표로 김 의원 제명안을 부결시켰습니다.
● 제헌국회부터 지금까지 징계 가결 6건뿐
김 의원 징계가 무산되면서 21대 국회 윤리특위는 지금까지 ‘무(無)징계’ 기록을 남기게 됐습니다. 민주당 신현영 의원의 닥터카 탑승 논란, 장경태 의원의 ‘김건희 여사 빈곤 포르노’ 언급을 비롯해 국민의힘 태영호 의원의 ‘제주 4·3사건은 북한 김일성 일가 지시’ 망언, 동료 의원을 ‘조선시대 후궁’에 비유한 조수진 의원의 발언도 징계 없이 지나갔습니다.
징계 대상
징계 사유
징계 내용
이문원 의원(1948년)
한미협정 국회 결의 위반 성명 발표
본회의 발언 7일 정지
김정식 권태욱 의원(1953년)
법안 처리 과정서 국회 내 수표 전달
30일 출석정지
박재홍 의원(1953년)
폭행, 협박, 공무집행방해 등
30일 출석정지
김영삼 의원(1979년)
외신 인터뷰서 박정희 정권 비판
제명
강용석 의원(2011년)
아나운서 성희롱 발언
30일 출석정지
김기현 의원(2022년)
검수완박법 표결 시 위원장석 점거
30일 출석정지
1991년 국회법에 따라 설립된 윤리특위는 접수된 징계안 상당수가 부결 또는 철회,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되면서 ‘제 식구 감싸기’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참여연대 등의 자료를 종합하면 제헌국회부터 21대 국회까지 접수된 의원 징계안 392건 중 가결된 건 6건(1.5%)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미국에서도 윤리위가 충분한 역할을 못 한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습니다. 다만 산토스 의원 사례에서 보듯 의원들의 명백한 비위 혐의에 대해서는 장기간에 걸친 끈질긴 조사 끝에 상세한 보고서를 내놨고, 이를 의원들이 징계 결정에 반영해 의회가 자정하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여야는 의정활동 평가가 낮은 현역 의원에게 다음 공천에서 불이익을 주겠다며, ‘현역 의원 엄격 평가’를 혁신의 척도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국민의힘 총선기획단은 당 혁신위원회가 제안했던 ‘현역 의원 하위 20% 공천 배제’보다 더 엄격한 컷오프 규정을 적용하겠다고 했습니다. 민주당 총선기획단도 현역 의원 평가에서 하위 10%에 속한 이들에 대한 공천 감점을 기존 20%에서 30%로 강화한다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막말, 성범죄, 역사 왜곡 등으로 국회 윤리특위에 제소된 의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이익 없이 넘어가면서 또 다른 평가 기준을 만들어 공천에 불이익을 준다는 게 합당한 것일까요. 의원들의 잘못된 활동에 대해 무시로 일관했던 여야가 총선을 앞두고 평가한다는 것은 결국 당 지도부의 미운 놈 찍어내기로 흐를 것이라는 우려를 낳게 합니다.
총선이 다가오고 의원들의 지역구 활동이 이어지면서 21대 국회 윤리특위는 사실상 막을 내렸습니다. ‘코인 게이트’ 하나 단죄하지 못한 21대 국회가 훗날 역사상 최악의 국회라는 평가를 받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한국 정치의 수준은 왜 나아지지 않는가?’라는 주제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를 각각 두 번씩 취재하며 가진 의문에 대해 해외 정치와 비교하면서 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empty@donga.com으로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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