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에서 300명만 쓰는 고유 화법이나 문법이 있다면 그건 ‘여의도 사투리’ 아니냐. 나는 나머지 5000만 명이 쓰는 문법을 쓰겠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11월 21일 대전을 방문해 한 말이 화제다. 법무부 공식 행사인 한국어능력평가센터 개소식에 참석하는 일정이었지만 정치권과 국민의 관심은 온통 한 장관의 총선 출마 여부에 쏠려 있다. 앞서 17일 대구를 방문한 한 장관은 “총선이 국민의 삶에 중요한 것은 분명하다”고 말하며 총선 출마 가능성을 열어두기도 했다.
한 장관 여권 대선 주자 1위
“한 장관이 지역구 의원으로 나설 경우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 있다. 비례대표로 나서면서 수도권과 충청권을 중심으로 바람을 일으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당 입장에서 최선의 시나리오가 아닐까. 한 장관이 총선에서 많은 사람이 당선되도록 기여한다면 이들은 훗날 대선 경선에서 한 장관의 든든한 지지 기반이 될 것이다.”
11월 22일 국민의힘 한 의원이 기자와 통화에서 한 말이다. 국민의힘 내에서는 한 장관의 차기 총선 출마를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다. 정계 관심사는 한 장관의 ‘출마 여부’가 아닌, ‘출마 방식’에 맞춰져 있다. 어떤 방식으로 총선에 출마하는 것이 총선 승리는 물론, 향후 대권 주자로서 입지 확보에 유리할지를 두고 저마다 복잡한 셈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 장관은 여권 인사 가운데 가장 유력한 차기 대선 주자로 분류된다. 여론조사 전문업체 한국갤럽이 11월 7일부터 사흘간 전국 성인 남녀 100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장래 정치 지도자 선호도 조사’에 따르면 한 장관은 13% 지지율을 받으며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21%)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표본오차는 95% 신뢰 수준에서 ±3%p. 이하 여론조사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오세훈 서울시장과 홍준표 대구시장(각 4%),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3%)가 한 장관의 뒤를 잇고 있다.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하지 않았음에도 여권 주자 중에서는 가장 높은 지지를 받고 있는 셈이다. 야권이 한 장관의 총선 출마설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다.
“긁지 않은 복권”
한 장관은 이달 들어 대구와 대전, 울산을 연이어 방문했다. 법무부 공식 일정으로 지역을 방문하고 있다는 입장이지만 정계에서는 총선 출마를 염두에 둔 행보가 아니냐는 반응이 잇따른다. 윤석열 대통령 역시 검찰총장 재직 당시 전국 검찰청을 순회 방문하며 정국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직간접적으로 밝힌 바 있기 때문이다. 이중에는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메시지도 있다. 2021년 3월 3일 대구고검·지검 방문 후 “‘검수완박’(검찰수사권 완전 박탈)은 부패를 완전히 판치게 하는 ‘부패완판’”이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후 윤 대통령은 검찰총장직에서 사임하며 본격적으로 대선판에 뛰어들었다.
한 장관 역시 공식 행사 후 시민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여러 메시지를 내고 있다. 당장은 시민들과 소통에 집중하는 분위기다. 한 장관은 대구에서는 “평소 대구 시민을 깊이 존경해왔다”고 말했고, 대전에서는 “과학기술 발전은 내가 태어난 197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대전에서 열심히 하는 젊은 과학자들의 헌신적인 열정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구 일정 당시 오후 7시쯤 출발하는 기차표를 예매했으나 시민들의 사진 요청이 이어지자 예매표를 취소하고 3시간가량 더 시민들과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대구에서 만난 시민의 시간이 내 시간보다 덜 귀할 리 없다”는 이유에서다. 한 장관은 10월 7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을 감상하기도 했다. 당시에도 한 장관은 시민들과 사진을 찍는 등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 장관만이 아니다. 배우자인 진은정 변호사가 한 장관 취임 이후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관심을 받았다. 진 변호사는 11월 15일 서울 중구 대한적십자사 서울사무소에서 열린 ‘2023 사랑의 선물’ 제작 행사에 참석했다. 진 변호사는 한 장관과 서울대 법대 동문으로, 김앤장 법률사무소 외국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한 장관의 보폭이 넓어지면서 ‘동훈여지도’(한동훈+대동여지도)도 등장했다(이미지 참조).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한동훈 갤러리’에서 한 장관의 팬을 자처한 시민이 그의 주요 행보를 정리해 만든 것이다. 동훈여지도에는 한 장관의 전국 방문 일정과 관련된 주요 정보가 담겼다. 한 장관은 취임 초기 청주교도소와 부산고검 등 법무부 내부 기관 위주로 방문했으나 이후 대한상의 제주포럼, 전북 딸기농가 등으로 행동반경을 점차 넓혔다.
한 장관의 행보에 대한 분석은 갈린다. 총선 출마를 염두에 두고 지역을 방문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반대로 한 장관에 대한 관심이 커지다 보니 통상적인 행보에 의미 부여가 더해지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어느 시각이든 총선에서 한 장관이 특정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확장성이 변수
국민의힘 내부에서는 한 장관의 ‘총선 역할론’이 공공연한 분위기다. 10월 11일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민주당에 참패해 위기의식이 커진 탓이다. 인요한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은 11월 20일 한 장관의 역할론에 대해 “환영한다”며 “그런 경쟁력 있는 분들이 와서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신당 창당 가능성’을 언급하며 국민의힘 지도부와 갈등을 빚고 있는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마저 한 장관에 대해 “긁지 않은 복권”이라고 평가했다.
정치권 관심은 한 장관의 ‘총선 출마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험지에 나서 의석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과 보수 정당의 텃밭 지역구나 비례대표로 출마해 안정적으로 국회에 입성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 양립한다. 국민의힘 서병수 의원은 “총선에 출마하는 것이야말로 한 장관에게 주어진 중요한 일 중 으뜸”이라며 “종로도 좋고 험지도 좋다”고 말했다. 같은 당 김웅 의원은 “(한 장관이) 비례로 나가거나 대구에서 출마하면 국민의힘이 일종의 태자당이 돼버린다”며 “오히려 서울 강남 3구가 한 장관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장관의 출마 방식이 차기 총선의 최대 변수로 부상하고 있는 만큼 선거 막바지에 최종 행보가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많다.
다만, 한 장관이 확장성을 갖췄는지가 변수다. 한국갤럽이 9월 8일 발표한 장래 정치 지도자 선호도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 장관에 대한 선호도는 60대(22%), 70대 이상(20%)에서 가장 높았다. 반면 18~29세(5%)와 30대(9%) 지지율은 낮은 편이었다. 전통적으로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연령대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종훈 정치경영컨설팅 대표는 “한 장관이 국민의힘 지지자가 아닌, 일반 유권자의 표심을 가져올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좀 더 두고 봐야 한다”고 평가했다. 이어 “윤 대통령 입장에서는 한 장관이 총선을 기점으로 차기 대선 주자로 부상해버리면 레임덕이 빨리 올 수 있어 다소 부담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