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여의도의 문법도, 셈법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누구에게도 빚진 것 없고, 어떠한 패거리도 없습니다. (중략) 저처럼 여의도 정치 전혀 모르고 발 디뎌본 적도 없는 사람이 정부를 맡는 것 자체가 정치교체 아닙니까.”
검사 출신의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유세 과정에서 여의도 정치 경험이 없다는 점을 내세워 정치교체를 약속했습니다. 후보 시절 한 예능 방송에 출연해서는 정치 경험 부족에 대해 “나는 어려움이 생겨도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며 “어떤 새로운 일이라도 성공시키는 건 자신 있다”고 말했습니다.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의 내로남불식 국정운영에 지친 많은 유권자들은 초보 정치인을 과감하게 선택했습니다. 살아 있는 권력에 맞서며 공정과 상식을 내세웠던 윤 대통령에게 기대를 걸었던 것입니다.
이제 다음 달이면 윤 대통령의 임기도 3분의 1을 지나게 됩니다. 집권 3년 차인 내년에는 현 정부의 중간고사 성격을 가진 총선이 치러집니다. 윤 대통령이 유권자에게 했던 약속에 대한 평가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 여의도식 소통 문법 거부한 尹 대통령
윤 대통령은 26년 간 검사로 일한 만큼 대선 과정에서부터 지금까지 전광석화 같은 추진력을 강조했습니다. 효율적인 일 처리를 위해 보안을 중시하고 수직적 체계를 갖춘 검찰식 문화를 선호했습니다. 반면 여의도식 정치는 기질적으로 싫어했습니다. 말로 이슈를 선점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인보다는 입이 무겁고 자기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을 가까이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대통령선거대책본부의 주요 보직 인사 중에는 검찰, 경찰 출신이 유독 많습니다.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선거 캠프임에도 보안과 근무 기강을 강조했습니다. 일부러 여의도에서 멀리 떨어진 광화문에 초기 캠프를 꾸렸고, 선대본부 상황실에서는 종종 캠프 실무자들의 근무 태도를 점검하기도 했습니다. 기존 선거 캠프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었습니다.
이러한 수직적인 리더십은 선거 과정에서 신속한 의사결정으로 빛을 발했습니다. 윤 대통령은 지지율 위기 때마다 이준석 대표와의 극적 화해, 유튜브 쇼츠·페이스북 단문 메시지 활용, 빠른 사과 등을 통해 반전을 이뤄냈습니다.
하지만 집권 후에는 이러한 조직문화가 발목을 잡았습니다. ‘119 대 29’ 대패로 끝난 2030 부산 엑스포 유치 과정에서 윤 대통령은 득표 상황을 제대로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선거 막판 사우디아라비아가 우리나라보다 돈을 10배로 쓴다는 소문과 함께 국정원, 외교부, 심지어 대통령실 내부에도 ‘도저히 뒤집을 수 없는 판세’라는 전망이 나왔지만, 윤 대통령에게는 보고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 주력 사업에 대해 실패를 예견하며 심기를 건드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발생해도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실 특정 참모의 책임을 묻는다고 해결될 일도 아닙니다. 한 국민의힘 관계자는 “윤 대통령이 듣기보다는 말하는 걸 좋아하는 유형이다 보니 직언하기 더욱 어렵다”고 했습니다. 대통령 통치 스타일이 문제의 원인이 아니었는지 차분히 살펴볼 시점입니다.
0선의 윤 대통령은 정치적으로는 반(反) 여의도 성향에 가까운 언행을 보이고 있습니다.
서로 싫더라도 만나서 치열하게 협상하면서 양보와 협치를 하는 것이 의회 정치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여소야대 국면임에도 민주당 이재명 대표와의 만남을 꺼리고 있습니다. 그간 이 대표가 여덟 차례에 걸쳐 영수회담을 제의했지만 이를 모두 거절했습니다.
아무리 사법 리스크를 안고 있는 피의자 신분의 대표이더라도 그를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정국은 꼬일 대로 꼬이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이준석 전 대표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여러 가지 혐의로 기소돼 있는데, 그가 다시 미국 대통령이 되면 안 만날 건가”라고 꼬집었습니다.
민주당은 틈만 나면 국무위원 탄핵안을 발의하고, 법안 강행 처리를 시도하면서 의회 내 힘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윤 대통령은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역시 힘으로 맞서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야당이 법안을 대거 강행 처리하는 것도, 대통령이 사안마다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도 ‘0선 대통령’과 ‘0.5선 제1야당 대표’ 시대가 낳은 K정치의 신(新)풍경입니다.
● 아쉽게 끝나버린 0선 새정치 실험
물론 정치권 경험이 없는 윤 대통령이 취임 후 기성 정치 문법을 깨고 새로운 정치 문화를 만들어 간 사례도 있었습니다.
윤 대통령은 대통령 당선 직후부터 기자들과의 출근길 문답(도어스테핑)에 강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인수위 시절부터 당선자와 현장 기자들 간 자유로운 소통이 이뤄졌습니다. 윤 대통령은 취임 후 용산으로 집무실을 이전하면서 기자실을 같은 건물에 만들고 도어스테핑을 꾸준히 진행했습니다.
도어스테핑은 용산 시대를 상징하는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MBC 기자와 대통령실 비서관과의 충돌 이후 잠정 중단됐고, 지난해 11월 총 61회를 끝으로 막을 내린 상태입니다.
올해에는 신년, 취임 1주년 기자회견마저 열리지 않아 국내 언론 기자들은 이제 윤 대통령에게 질문할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대신 윤 대통령은 일본 요미우리 신문, 미국 워싱턴포스트,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 로이터통신 등 해외 언론사와의 인터뷰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윤 대통령은 올해 초 신년사를 통해 노동, 교육, 연금 3대 개혁 추진 방침을 밝혔습니다. 3대 개혁은 국가적으로 꼭 필요한 일이지만 이해당사자의 반발이 커 표 계산에 빠른 여의도 정치에서는 회피하는 의제입니다. 여의도 카르텔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윤 대통령이 용기 있는 도전에 나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한 해가 저물어가는 지금까지 3대 개혁 중 어느 분야에서도 행동으로 보여준 게 없습니다. 여권에서는 “과반 의석을 가진 민주당 벽에 가로막혀 국회에서 제대로 된 논의조차 안 되는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윤 대통령이 야당 설득에 나서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서 과연 개혁 의지가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 ‘0선 지도자’ 돌풍은 전 세계적 현상
정치 경험이 없는 이들이 지도자가 되는 것은 비단 K정치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0선 지도자 돌풍이 일고 있습니다. 정치 경험이 없어도 성공적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 해외 지도자가 입증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45)은 2015년 자신이 제작과 주연을 맡은 드라마 ‘국민의 종’을 통해 단숨에 국민적 스타가 됐습니다. 드라마에서 부패 정치인을 몰아내는 대통령 역할을 맡았던 그는 2019년 5월 대선에서 73% 지지를 받으며 눈 깜짝할 새 현실에서 대통령이 됐습니다.
당선 초기 국제사회가 그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봤습니다. 그러나 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국가를 지키겠다면서 전투복을 입고 국내외를 돌면서 몸을 사리지 않는 리더십을 보여줬습니다. 전쟁이 장기화하는 상황에서도 국민을 결집하고, 국제사회의 지지를 모으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미 시사 주간지 타임은 젤렌스키에 대해 “찰리 채플린이 윈스턴 처칠로 변모한 것 같다”고 평가했고,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그를 유럽에서 가장 매력적인(Rizz) 정치인으로 꼽았습니다.
국민적 저항을 뚫고 연금 개혁을 완수한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46)도 의회 경험이 없었습니다. 30대의 나이로 경제 장관을 역임했던 그는 좌우가 극한 대립하는 정치 현실에 절망했습니다. 스스로 좌파도 우파도 아닌 자유주의자로 규정하면서 청년과 함께 사회운동 단체 ‘앙 마르슈(전진하는 공화국)’를 이끌고 정치 세력화에 나섰고 대선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는 좌우 한쪽 진영이 아닌 중도파 유권자의 지지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이념과 진영을 떠나 국가적 의제에 자신의 정치적 승부수를 걸 때가 많습니다. 연금 개혁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컸지만 그는 지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동, 의료 개혁에 거침없이 나서고 있습니다.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 2030 엑스포 유치 실패 등 악재가 이어지면서 내년 총선을 앞두고 대통령실과 내각 인사 폭이 커지고 있습니다. 임기 3분의 1을 지나는 시점에서 새 얼굴로 윤석열 정부 2기가 구성되는 모습입니다.
그의 2기는 어떨까요. 윤 대통령이 잘 모르는 인사들이 깜짝 발탁되고 여성 장관 비중이 높아진 점은 긍정적입니다. 다만 국민권익위원장에 임명한 ‘존경하는 검찰 선배’를 5개월만에 방송통신위원장에 앉힐 정도로 검찰 출신을 중용하는 모습에서 인사를 통한 변화의 메시지는 흐려진 상태입니다.
이제 곧 윤 대통령도 집권 3년 차에 접어들면서 더 이상 정치 신인이라는 보호막 뒤에 숨을 수 없게 됐습니다. 기득권 정치에 물들지 않겠다고, 성과 하나만은 자신 있다던 윤 대통령이 집권 2기에는 어떤 모습을 보일까요. 그가 0선 정치인의 한계를 뚫고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한국 정치의 수준은 왜 나아지지 않는가?’라는 주제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를 각각 두 번씩 취재하며 가진 의문에 대해 해외 정치와 비교하면서 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empty@donga.com으로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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