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이제 국회에서 정면 승부를 벌이게 됐습니다. “더 이상 간 보거나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며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직을 전격 수락한 한 전 장관은 26일 여의도 무대에 공식 등판할 예정이죠. 국민의힘은 당 외부에서 정치 경험이 전혀 없는 인사가 수혈된 점에 바짝 긴장하는 모습입니다. 그런 국민의힘과 총선에서 싸워야 하는 민주당은 오죽하겠습니까.
누구보다 갑갑한 사람은 이재명 대표일 겁니다. 원래 잘 모르는 상대와 싸울 때가 가장 어려운 법이죠. 그동안 이 대표는 한 전 장관과 ‘피의자 대 검사’로 대립했을 뿐, 동료 정치인으로 맞붙은 적은 없습니다. 게다가 한 전 장관은 정치 경험이 없는 말 그대로 ‘쌩’ 신인입니다. 여의도 정치판의 오랜 문법을 따를 생각도 전혀 없어 보입니다. 한 전 장관은 지난달 대전을 찾은 자리에서 “여의도에서 300명이 사용하는 고유의 화법이나 문법이 있다면 그건 ‘여의도 사투리’다. 저는 5000만 국민의 화법을 쓰겠다”고 말 한 바 있습니다. ‘마이웨이’를 가겠다는 겁니다.
이미 민주당 내에선 “그래도 다선 의원들끼리는 여야 할 것 없이 공유했던 시간과 경험이 있기 때문에 으르렁대고 싸워도 막판에 가면 대화나 협상이 이뤄지는 경향이 있다”며 “하지만 한 전 장관은 다르다. 국무위원 시절부터 사사건건 야당 의원들과 갈등을 빚어왔던 탓에 함께 맞춰가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습니다.
친명(친이재명)계 좌장으로 불리는 정성호 의원도 한 장관의 예측 불가능성을 가장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한 바 있죠. 정 의원은 최근 통화에서 “한동훈이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나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대비가 돼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지금 민주당은 ‘한동훈이 김건희 특검 안 받는다’라고 다들 자신만만해하는데 만에 하나 받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 대한 대비가 있느냐는 말이다. 특검 외에도 한동훈은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나올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 때문에 ‘한나땡(한동훈 나오면 땡큐)’가 아니라, 긴장하고 대응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사실 예측 불가능성에 있어선 이 대표 본인도 그동안 만만치 않은 길을 걸어왔죠. 국회의원 불체포특권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더니, 실제 날아 온 구속영장 앞에선 갑자기 단식하는가 하면, 동료 의원들에게 부결을 호소하는 등,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던 나날들이었습니다. 대선 후보 때 “비례대표를 확대하고, 비례대표제를 왜곡하는 위성정당은 금지하겠다”던 약속도 최근 행보를 보면 어느덧 접은 듯하고요. 한 원로 정치인은 “그렇게 말 바꾸는 건 정치가 아니다. 벼랑 끝에 몰리면 원래 손을 놓는 것이 정치”라고 지적하기도 하더군요. ‘0.5선’ 출신 당 대표로서, 일반 여의도 상식으론 이해하기 힘든 ‘이재명식 정치’를 계속해왔던 장본인이기 때문에 상대의 예측 불가능성이 더 두렵고 부담이 될 것 같네요.
이 대표에게 무엇보다 가장 큰 부담은 한동훈 비대위가 들고나올 ‘쇄신’ 카드일 겁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정치권에선 ‘한동훈 비대위’에 대한 기대가 크진 않습니다. 국민의힘 내에서도 ‘윤석열 아바타’, ‘김정은 딸 김주애를 내세우는 꼴’이라는 반발이 나올 정도로 한 전 장관의 ‘리틀 윤석열’의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이죠. 민주당 내에서 “한동훈으로는 중도로의 외연 확장 가능성이 없다”고 안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대가 없기 때문에 한동훈 비대위는 ‘밑져야 본전’입니다. 조금만 잘해도 반응이 올 거라는 거죠. 그렇게 되면 이재명을 향한 당 안팎의 쇄신 압박은 더 거세질 겁니다. 이미 한동훈 등판을 앞두고 당내 기류 변화가 감지되고 있죠. 그동안 당내 ‘통합’을 강조하던 김부겸, 정세균 전 총리가 이 대표를 향해 쓴소리의 강도를 올리고 있는 것이 그 신호탄일 겁니다. 이 대표와 최근 오찬 회동을 한 김부겸 전 총리는 이 대표에게 ‘병립형 선거제로의 퇴행은 안 된다’는 점을 당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에 이 대표가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인 것에 유감스러워하는 분위기인 것으로 전해집니다. 여기에 더해 28일 정세균 전 총리도 이 대표를 만나 선거제 퇴행 우려와 최근 당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천 잡음에 대한 우려를 이전보다 센 톤으로 전달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 전 장관이 새 얼굴들을 잔뜩 포함한 비대위를 출범하고, 실제 변화를 만들어간다면, 이 대표와 친명 체제에 대한 쇄신 요구는 더 거세질 수밖에 없겠죠.
강성 지지층 간 대결도 볼만할 겁니다. 그동안 이 대표는 사실상 국회 내 ‘팬덤 원톱’이었습니다. 그동안 자신의 팬카페 ‘재명이네 마을’에서 ‘이장’직을 맡고, ‘유튜브 라이브’ 등을 통해 그들과 수시로 소통하면서 팬덤을 키워 온 덕이겠죠. 강성 지지층은 스스로를 ‘개딸(개혁의 딸)’이라 자청하며 어떤 위기와 시련 앞에서도 이 대표 뒤를 지켰고요. 이 대표가 민주당 대표로 취임하던 날부터, 취임 1주년, 생일마다 국회 앞에는 그의 지지층이 보낸 축하 화환이 줄 이어 늘어서곤 했습니다.
그런데 한 전 장관의 팬덤도 만만치 않습니다. 보수 진영에선 아주 드물게 강력한 팬덤이 형성돼 있어 가는 곳마다 인파가 몰리고 있죠. 지난달 대구에선 서울행 기차표 시간까지 미뤄가며 3시간가량 시민들과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이 대표가 이제까지처럼 마냥 자신의 팬덤만 믿고 버티기엔, 한동훈 팬덤도 만만치 않다는 겁니다.
물론 한동훈 비대위가 잘 안될 수 있습니다. 이 대표 측도 그걸 누구보다 간절하게 바라는 듯하고요. 그런데 한동훈이 망한다고 이재명이 잘 되진 않을 겁니다. 그냥 둘 다 같이 더 빠르게 망하겠죠. 총선을 앞둔 유권자들이 바보는 아니니까요. 그러니 서로 상대가 먼저 망하길 바라는 안일한 생각은 접고 이왕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김에 진짜 서로 피 튀기는 쇄신 경쟁을 펼쳐주길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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