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기억하는 한 21대 국회 초반까지는, 즉 지난 대선 전까지만 해도 더불어민주당은 굉장히 말이 많고 시끄러운 당이었습니다. 일단 인원 자체가 많다 보니 그 안에서 자기들끼리 뭉치는 계파도 많고 모임도 많았죠.
2020~2021년 제가 기록해뒀던 민주당 계파 분류를 오랜만에 다시 꺼내 봤는데요, 당내 계파 및 모임이 10개에 육박하더군요. (물론 그 새 배신과 의절이 판을 쳤기에 지금 계파와는 또 다릅니다)
①청와대 출신 친문재인 =고민정 김영배 윤건영 윤영찬 전해철 정태호 한병도 등 ②친이해찬=김성환 김태년 윤호중 이해식 조정식 등 ③참여정부 출신 친노무현·친문=김종민 김한정 이광재 전재수 홍영표 등 ④친정세균=김교흥 김영주 안규백 이원욱 등 ⑤친이낙연계=설훈 이개호 전혜숙 등 ⑥더좋은미래·운동권·민평련=강훈식 송갑석 우원식 우상호 이인영 인재근 등 ⑦친박원순계=기동민 김원이 박홍근 천준호 등 ⑧친이재명계=김병욱 김영진 이규민 정성호 등 ⑨비문·비주류=박용진 변재일 이상민 조응천 등 ⑩더민초=고영인 등 초선 의원 모임
당연히 여러 주장과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고, 의원총회는 물론이고 고위 당정청(당-정부-청와대) 회의, 당정 협의 때마다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매번 갈등설이 불거지면 지도부는 “원래 건강한 정당은 일사불란하지 않다. 다양한 목소리가 민주주의”라고 수습하기 바빴죠. 그때는 그런 갈등과 말썽이 나쁜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이재명의 민주당’을 보고 있자면 그때가 나았던 듯싶습니다.
저 명단만 봐도 알 수 있지만, 21대 국회 초반만 해도 이재명계는 비주류 중의 비주류였습니다.
이 대표는 2007년 대선 때 정동영 당시 후보를 지지하는 ‘정동영과 통하는 사람들’ 공동대표를 맡으면서 정치권에 입문했죠. 이후 성남시장, 경기도지사에 줄줄이 당선됐지만, 당내에선 여전히 “이재명은 행정가일 뿐, 중앙정치 경험이 없어서 안 된다”는 박한 평가가 많았습니다.
2017년 문재인 전 대통령과의 대선 경선 과정에서 대표적 ‘비문’으로 찍힌 뒤 더욱 아웃사이더가 됐습니다. 가까운 의원도 사법연수원 시절부터 함께 한 정성호 의원을 비롯해 김병욱 김영진 등 극히 소수에 불과했죠. 대선 경선 과정에서 과격한 팬덤 활동으로 줄곧 논란을 일으켰던 이 대표의 강성 지지층 ‘손가락혁명군’도 늘 문제 집단으로 분류돼왔고요.
그렇게 음지에서 버티던 ‘미운 오리새끼’ 이재명에게 20대 대선 경선 때 마침내 기회가 왔습니다. 대선주자 1위 가도를 달리던 이낙연 당시 대표가 ‘사면 발언 논란’으로 삐끗하면서 당 대선주자가 된 거죠. 돌고 돌아 어렵게 주류가 된 이 대표는 다시는 그 자리를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이라도 한 듯합니다. 그해 대선에서 지고도 “0.73%포인트 격차였다”고 ‘정신승리’하더니, 불과 2개월 만에 다시 선거판에 직접 뛰어들어 인천 계양을 보궐선거에서 원내에 입성합니다. 인생 첫 배지를 단 그는 멈추지 않고 8월 전당대회까지 직행했죠. 이 과정에서 ‘개딸’이란 이름으로 재무장한 이 대표의 강성 지지층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요.
원내 입성 직후부터 이 대표는 민주당의 오랜 체계를 조금씩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2022년 8월 전당대회가 열리기 이틀 전 당은 ‘부정부패 혐의로 기소됐을 때 당직을 정지한다’는 당헌 80조를 “정치탄압 등 부당한 이유가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당무위 의결을 거쳐 달리 정할 수 있다”라고 살짝 개정했습니다. 당시에도 이미 ‘이재명 방탄용’이라는 논란이 있었는데, 이 대표는 그 정도 논란에 눈도 깜짝 안하죠. 지난해 3월 기소되자마자 “위례·대장동 특혜개발 및 성남FC 후원금 의혹은 모두 검찰의 정치탄압”이라는 마법의 논리를 앞세워 실제 당헌80조 개정의 첫 수혜자가 됐습니다. 미리 개정해 둔 당헌으로 ‘셀프 구제’해 당 대표직을 유지한 거죠.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남은 이 대표는 당내 장악력을 계속 더 키워갔습니다. 지난해 12월, 당 대표와 최고위원을 뽑는 전당대회에서 대의원 투표 비중은 줄이고, 권리당원 비중을 지금보다 키우도록 당헌을 개정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현역 의원과 지역위원장 등 직업 정치인의 힘은 빼고 자신의 강성 지지층의 힘을 대폭 키워준 겁니다.
강성 지지층의 입김이 강해지면서 자연스레 원내에도 ‘친명 호위무사’, ‘친명 호소인’ 등을 자청하는 ‘신(新)친명’계도 두터워졌습니다. 권리당원 권한 강화 움직임에 그때도 혹시 이 대표가 차기 전당대회 재선을 노리고 미리 손쓰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었죠. 당시엔 ‘설마’하는 생각이었는데 요즘 그의 엄청난 총선 공천 작업을 보면 정말 그런 것도 같습니다.
실제 민주당의 당헌 당규엔 ‘당대표 및 최고위원의 임기는 다음 정기전국대의원대회에서 당대표가 선출될 때까지로 한다’ 한 줄 뿐, 연임 등에 관한 규정은 없습니다. 민주당의 당직자는 “이제까지 전례가 없을 뿐, 연임이 안 된다는 규정은 없다”며 “이 대표라면 연임하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이 대표가 이렇게 민주당을 점령해가는 사이 다른 계파들은 와해됐습니다. 2022년 6월, 대선에 이어 지방선거까지 참패하자 이낙연계와 정세균계는 각각 ‘모임 해체’를 발표했습니다. ‘이낙연계’ 이병훈 의원은 “친목 모임 해체 결정이 당내 남아있는 분란의 싹을 도려내고 당이 새로 태어나는 데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고 했고, ‘정세균계’인 김영주, 이원욱 의원은 “당내 모든 계파 정치의 자발적 해체만이 당 재건을 이룰 수 있다”고 촉구했습니다.
‘우리가 먼저 자진 해산할 테니, 이재명계도 작작하라’는 거죠. 하지만 이 대표가 누굽니까. 어떻게 점령한 당인데 그렇게 쉽게 포기하겠습니까.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지금, 이병훈 의원은 자신의 지역구인 광주 동남을 경선에서 탈락하고 억울하다며 재심을 신청했습니다. 김영주 의원은 현역 의원 평가 하위 10% 통보에 반발하며 탈당을 선언해 국민의힘에 입당했고, 이원욱 의원은 일찌감치 “이재명 너 밑에선 아무것도 안 하련다”며 가장 먼저 탈당했죠.
당에 남아있는 친문, 운동권도 지리멸렬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컷오프되던 당일, 임 전 실장 측은 당내 친문들에게 유세 현장에 지원을 와달라고 요청했던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실제 이날 저녁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홍영표, 윤영찬, 송갑석 의원뿐이었죠.
한 친문 관계자는 “친문 중에서도 이미 공천을 확정받은 한병도, 윤건영, 고민정 등은 자기 지역 선거 챙기기 바쁜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내 최대 의원 모임인 더좋은미래 소속 기동민 의원도 컷오프된 뒤 “같은 의혹으로 재판받고 있는 이수진(비례) 의원은 경선을 치를 수 있고 나는 왜 안 되냐”며 당에 재심을 신청했지만, 메아리 없는 외침일 뿐이고요.
이게 그 시끄럽던 민주당이 모두가 입 다물고 조용해지는 ‘이재명당’이 되는 과정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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