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쿠바 수교는 박정희 외교의 유산?[김상운의 빽투더퓨처]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3월 4일 11시 00분


[18] 남북한 외교전의 역사

최근 한국과 쿠바의 수교가 전격 발표되자 북한이 일본과 정상회담 가능성을 타진하는 등 남북관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지난 달 1일 김정은이 쿠바 혁명 65주년 축하전문을 보내고 2주일도 되지 않아 한-쿠바 수교가 발표된 데 대해 북한이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쿠바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도하던 북한 언론이 수교 이후 쿠바 관련 동정을 일체 다루지 않고 있는데서 북한이 받은 충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뉴욕의 주유엔대표부를 통한 한-쿠바 양국간 접촉은 비밀리에 급속도로 이뤄졌는데 수교 기념사진조차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양국이 각각 최대 동맹국인 미국과 북한의 심기를 살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번 수교는 70여년에 걸친 남북한 외교전쟁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남북한 체제경쟁이 치열한 외교전으로 비화했던 1960, 70년대로 시계를 돌려보겠습니다.

북방외교의 효시, 박정희 ‘6.23 선언’
1973년 6월 23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6.23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e영상역사관
1973년 6월 23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6.23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e영상역사관
“남한과 북한의 외교전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1973년 6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이 모든 재외공관에 보낸 친서 중 일부입니다. 박 대통령은 “지금까지는 북한과 절차적 문제를 놓고 외교전을 벌였으나, 앞으로는 본질적인 문제로 외교전을 벌여야 하기에 몇 갑절 더 치열한 외교전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도 했죠. 비장한 어조의 대통령 친서에 당시 외교관들이 적지 않은 부담을 느꼈으리라 생각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날은 박 대통령이 대국민 연설을 통해 ‘6.23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을 발표한 날이었습니다. 발표 제목만 봐서는 남북화해를 언급한 것 같은데, 재외공관에는 ‘치열한 대북(對北) 외교전’이라니? 이게 무슨 조화일까요. 이 기묘한 상황을 이해하려면 미중 데탕트로 대표되는 이 시기 국제정세가 한반도에 미친 파급효과를 짚어야 합니다. 일단 그 전에 6.23 선언의 내용부터 훑어보죠.

‘6.23 선언’의 골자는 크게 네 가지입니다. 첫째, 남북통일은 평화적 방법으로 달성돼야 한다. 둘째, 남북한 긴장완화에 도움이 된다면 북한이 유엔 등 국제기구에 참여하는 걸 반대하지 않는다. 셋째, 남한은 통일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북한과 함께 유엔에 가입하는 걸 반대하지 않는다. 넷째, 한국은 호혜평등의 원칙 아래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공산권 국가들에 문호 개방을 촉구한다.

내용만 봐서는 남북한 체제경쟁이 극심했던 당시로선 매우 이례적인 조치로, 1980년대 후반 노태우 정부가 추진한 북방정책의 효시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6.23 선언의 진의는 북한과의 진정한 화해협력 추구가 아니었습니다. 이보다는 새로운 차원의 대북 외교전에 가까웠죠.

실제로 당시 외무부는 박 대통령의 6.23 선언 직후 내부 보고서에서 ‘외교면에서 남북전쟁의 상황이 전개될 것임에 대비해 우리가 항시 북한에 비해 외교적 우위를 견지할 수 있는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적시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중소 간 적대관계를 활용, 공산권 내에서 북한의 지위를 약화시키고 국익에 유익한 방향으로 대공산권 정책을 추진한다’는 계획도 포함됐죠.

김일성 주석이 1972년 11월 3일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악수하고 있다. 동아일보DB
북한도 6.23 선언의 이면에 있는 진의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선언 바로 다음 달인 그해 7월 남한은 공산권 국가 중 소련의 영향권에서 상대적으로 벗어나 있던 유고슬라비아에 통상사절단을 보냅니다. 북방정책의 닻을 올린 겁니다. 앞서 한국은 1971년 9월 KOTRA 사장을 단장으로 하는 경제사절단을 보내는 등 유고와의 경제교류에 공을 들였죠.

하지만 유고에 무역대표부를 개설해 교역을 시작하려고 한 시도는 결국 실패합니다. 북한의 부탁을 받은 중국의 방해 공작으로 유고 정부가 사소한 사항을 갖고 트집을 잡아 협상을 좌초시켰기 때문입니다. 남북한이 상대방의 외교적 입지가 넓어지는 걸 막기 위해 끊임없이 견제하는 일이 계속 벌어진 겁니다.

사실 6.23 선언이 발표된 1973년은 한국 외교사에서 ‘좌절의 해’로 기록돼 있습니다. 정부의 온갖 외교전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그해 4월 28일 비정부간 국제기구인 국제의회연맹(IPU)에 이어 5월 18일 세계보건기구(WHO) 가입에 연이어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북한의 WHO 가입은 북한이 건국 이후 처음으로 유엔체계에 편입됐다는 점에서 남한에 뼈아픈 것이었죠. 한국전쟁 발발 이래 미국의 입김으로 남한만이 특권적으로 누려온 유엔 옵서버(observer) 지위를 상실하게 된 겁니다. 이에 따라 북한은 1973년 이후부터는 유엔에서 남한과 거의 대등한 위치에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됩니다.

이 같은 당시 정황으로 볼 때 6.23 선언이 북한의 국제사회 진출을 봉쇄할 수 없었던 현실을 감안한 수세적 정책 전환이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정부가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전격적으로 제안해 북한에 역공을 가하는 동시에, 북방외교로 외교공간을 넓히려고 했다는 겁니다.

미중 데탕트와 한국의 안보위기
1972년 2월 중국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과 악수하고 있다. 미중 데탕트는 남북관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뉴리퍼블릭 웹사이트 캡처
1972년 2월 중국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과 악수하고 있다. 미중 데탕트는 남북관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뉴리퍼블릭 웹사이트 캡처
이제 처음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 한국에 안보위기를 가져온 미중 화해를 들여다 보겠습니다.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이 6.23 선언과 동시에 북한에 대한 외교전에 나선 건 미중 데탕트라는 국제정세 변화가 시발점이었습니다. ‘미국과 중국이 화해하면 한반도에 안정이 찾아오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중국과의 화해 무드로 나아간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 가능성이 낮아졌다고 보고,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960, 70년대 북한의 각종 무력도발은 끊이지 않았죠. 1968년 1월 북한군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휴전선을 넘어 남한에 침투한 1.21 사태가 대표적입니다. 남북한 체제경쟁이 극심하던 당시 최고 권력을 제거하려는 이른바 ‘참수 작전’에 나설 정도로 남북관계가 험악했던 겁니다.

게다가 박정희 정부는 소련제 탱크와 순항미사일, 미그21 전투기 등을 보유한 북한의 당시 군사력이 남한을 압도하고 있다고 봤습니다. 북한에 대한 위협인식에 있어 미국과 한국이 서로 큰 차이를 보였던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한미군 일부를 철수하겠다는 미국의 정책방향을 한국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고, 이는 결국 대북한 외교전과 더불어 자주국방 강화로 이어지게 됩니다.

한미동맹의 균열은 1.21 사태 이틀 뒤 터진 북한의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1.21 사태에 대한 한국 정부의 보복 공격 주장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미국이 자국 해군 병사들이 납치되자 영해 침입을 사과하는 등 신속한 대응에 나섰기 때문입니다. 당시 박정희는 푸에블로호 사건을 1.21 사태와 연계해 대응하고자 했지만, 미국은 남한을 배제한 채 북한과 단독협상을 벌였죠. 미국의 이런 일방적인 행동은 박정희의 자주국방 의지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습니다.

무엇보다 한국 정부에 큰 충격을 안긴 건 닉슨 행정부의 주한미군 감축이었습니다. 한국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1970년 5월 29일 멜빈 레어드 미 국방장관은 “주한미군 일부 철수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철수는 점진적으로 추진될 것이고, 1개 사단 이하 병력부터 철수할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결국 이듬해 6월 말까지 주한미군 1만8000명이 감축되면서 극도의 안보불안을 느낀 박정희는 절치부심 끝에 핵개발을 비롯한 자주국방의 길을 걷게 됩니다.

닉슨 행정부는 주한미군 감축에 그치지 않고 북한이 극도의 무력도발을 일삼는 상황에서도 한국 정부에 북한과의 대화를 압박합니다. 중국과의 화해를 바탕으로 한반도에서 현상유지(status quo)를 실현하고자 한 겁니다. 이에 박정희는 1970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8.15 평화통일구상 선언’을 발표하며 의미 심장한 메시지를 발신합니다.

“민주주의와 공산독재 중 어느 체제가 국민을 더 잘 살게 할 수 있으며, 그럴 수 있는 여건을 가진 사회인가를 입증하는 개발과 건설과 창조의 경쟁에 나설 용의는 없는가를 (북측에) 묻고 싶은 것입니다.”

매우 단도직입적인 어조의 이 발언 속에는 북한과 대화를 추구하되, 남북 체제경쟁에서 남한이 반드시 승리한다는 강한 확신이 담겨있습니다. 닉슨의 대화 압박에도 박정희는 무력통일을 포기하지 않은 북한을 진정한 화해협력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대신 남북한 체제경쟁에서 이겨야 할 대상으로 봤죠. 이것이 3년 뒤 6.23 선언을 발표하면서 박 대통령이 대북 외교전에서 승리를 재외공관에 주문한 배경입니다.

사실 박 대통령이 북한과의 대화에 나선 건 닉슨 행정부의 압력과는 별도로 전략적인 이유도 있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1970년대 고도 경제성장이 본격화됐지만, 자주국방 강화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에 시간을 벌고 북한의 침략을 지연시킬 목적으로 박 대통령이 남북대화를 추진했다는 겁니다. 박 대통령은 1971년 남북대화에 나서면서 참모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리 적의를 가진 사람이라도 그의 한쪽 손을 붙들고 있으면 그가 나를 칠지, 안 칠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박정희 시대 안보위기를 가져온 미중 화해 구도는 최근 미중갈등으로 돌아섰습니다. 미중갈등이 북한의 핵위협과 맞물려 한국의 안보불안을 키우고 있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북중에 대한 위협인식을 매개로 한미동맹이 굳건해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셈입니다.

다만, 올 11월 미국 대선에서 동맹체제를 경시하는 트럼프가 당선된다면 셈법이 복잡해질 수 있는 것이 우려됩니다. 이 경우 주한미군 철수에 대비해 자주국방 강화를 결단한 박 대통령 사례에서 보듯, 특단의 안보대책을 준비해야하지 않을까요.

[참고 문헌]
-장덕준 <박정희 시기 대륙지향 외교의 배경과 특징> (2019년·중소연구 43권 2호)
-신종대 <남북한 외교경쟁과 ‘6.23 선언’> (2019년·현대북한연구)
-마상윤 <미중관계와 한반도- 1970년대 이후의 역사적 흐름> (2014년·역사비평)
-마상윤·박원곤 <데탕트기의 한미 갈등: 닉슨, 카터와 박정희> (2009년·역사비평)
-마상윤 <미완의 계획: 1960년대 전반기 미 행정부의 주한미군 철수 논의> (2003년·한국과 국제정치)

“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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