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일 양국이 중국의 안보위협에 맞서 주일미군 사령부를 강화하기로 했습니다. 주일미군 사령관을 4성 장군으로 격상하고, 주일미군의 작전지휘 기능을 강화해 일본 자위대와의 일체화를 가속화하겠다는 겁니다. 얼핏 보면 한미 연합사령부를 지휘하면서 전시 작전통제권을 쥔 주한미군사령부를 연상시키는 대목입니다.
주한·주일미군이 동아시아에 주둔한 미국 군사력의 양대 축임을 감안할 때 주일미군 지휘체계의 변동은 주한미군에도 직접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주한·주일미군의 변화는 한반도 안보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죠. 한국전쟁 이후 약 70년에 걸친 주한·주일미군의 역사를 통해 미일 안보조약 업그레이드의 파장을 짚어보겠습니다.
주한미군 철수 둘러싼 한미갈등의 역사
한국전쟁을 계기로 체결된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제4조(‘상호적 합의에 의하여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여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에서 주한미군 주둔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원치 않는 전쟁에 연루될 걸 우려한 미국은 당초 동맹조약 체결에 극히 부정적이었지만, 미소 냉전 국면에서 첫 열전으로 발화한 한국전쟁이 이런 분위기를 일거에 뒤집었죠.
이승만 대통령이 집요하게 요구한 북한 침략시 미국의 자동개입 조항이 조약에 명시되진 않았지만, 전방에 배치된 주한미군의 존재 자체가 인계철선(引繫鐵線·수류탄 등을 폭발시키는 철선) 기능을 발휘했습니다(이는 노무현 정부에서 동두천 등 전방의 주한미군 기지를 후방으로 이전하면서 약화되기는 했습니다)
주한미군은 1950년대에 32만5000명에 달했지만, 미중 데탕트와 탈냉전 등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규모가 줄었습니다(2020년 기준 약 2만8500명) 중국과의 데탕트로 한반도에서 현상유지가 가능해졌다는 판단과 더불어 막대한 재정적자 부담을 줄이기 위한 조치였죠. 문제는 1960~70년대 북한의 안보위협을 둘러싼 한미 간 인식이 서로 달라 주한미군 감축을 놓고 양측이 적지 않은 갈등을 벌였다는 겁니다.
예컨대 1960년대 초 존슨 행정부는 주한미군을 9000명가량 감축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한국 정부와 협의에 들어갔습니다. 안보불안에 휩싸인 박정희 정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다했는데, 1965년 예기치 않은 베트남전 확전이 숨통을 틔워주게 됩니다. 존슨 행정부가 지상군 증원을 위해 한국군 파병을 요청하면서 주한미군 철수를 막을 수 있는 지렛대가 한국에 생긴 거죠.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5월 열흘간 미국을 방문해 베트남 파병을 조건으로 주한미군 병력 유지와 1억5000만 달러의 차관을 얻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낳은 중요한 경제적 토대가 마련된 겁니다.
미국의 주한미군 감축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특히 중국과 데탕트를 추진한 닉슨 행정부는 한국의 강한 반발에도 1970년 5월 “주한미군 일부 철수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철수는 점진적으로 추진될 것이고, 1개 사단 이하 병력부터 철수할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결국 이듬해 6월 말까지 주한미군 1만8000명이 감축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절치부심 끝에 핵개발을 포함한 자주국방의 길을 걷게 됩니다.
소련 붕괴에 따른 탈냉전도 주한미군 감축의 요인이 됩니다. 1990년 4월 미 국방부는 10년에 걸쳐 아시아 태평양지역에서 미군을 점진적으로 감축하는 내용의 ‘동아시아 전략구상(EASI)’을 의회에 제출합니다. 13만5000명의 아시아 주둔 미군 중 1단계로 3년간 최대 1만5000명을 줄이기로 했는데, 이에 따라 1992년까지 주한미군 6987명, 주일미군 4773명이 각각 본토로 철수했습니다.
‘주일미군-자위대 일체화’ 추구한 일본
노무현 정부 들어 ‘자주파’의 득세와 미국의 아시아 군사전략 변화가 맞물리면서 한반도 방위에 주력하던 주한미군의 성격은 크게 바뀌게 됩니다. 한미동맹에서 한국의 자율성을 높이겠다는 자주파의 주도로 주한미군의 전시 작전통제권 전환을 추진하는 동시에 의정부, 동두천 등에 있던 전방 미군부대를 평택, 대구 등 후방으로 이전하면서 미군의 인계철선 기능이 약화된 겁니다
이는 주한미군을 한반도 붙박이에서 벗어나게 해 동아시아 전역에서 ‘작전 기동군’으로 활용하고자 한 미국의 국방전략에 부합했죠. 미국의 가려운 등을 한국이 알아서 긁어준 셈입니다.
이 과정에서 2002년 ‘미선이 효순이 사건’(미군 훈련 과정에서 여중생 2명이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팽배하진 반미감정이 전작권 전환 논의에 영향을 미칩니다. 실제로 미국은 2004년 주한미군 전력의 3분의 1과 주독미군 2개 사단을 철수한 결정에 한국과 독일 내 반미정서가 한 요인이었음을 인정한 바 있습니다.
주한미군의 성격이 동아시아 역내의 작전 기동군으로 바뀌면서 2011년부터 해외 연합훈련에 참가하기 시작했고, 그해 3월엔 동일본 대지진 지원을 위해 U2 정찰기를 일본에 파견했습니다. 이어 2015년부터는 다연장 로켓(MLRS) 대대와 미 2사단 여단전투단, AH-64 공격헬기 대대 등 주한미군 주요 전력이 순환배치 형태로 한반도와 미국 본토를 드나들기 시작하죠.
반면 일본의 대응은 한국과는 반대였습니다.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일동맹을 강화하고, 자위대와 주일미군의 일체성(통합성)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인 겁니다. 한국과 달리 자율성보다는 안보를 택한 것이죠. 이는 ‘글로벌 전략 기동군’으로서 주일미군의 역할을 확대하려는 미국의 군사전략과 맞물리게 됩니다.
사실 전후 평화헌법에 따라 오로지 방어에만 치중하도록 규정한 자위대의 전수방위 원칙이 오랫동안 주일미군과의 일체화에 걸림돌이 됐습니다. 실제로 1978년 제정된 ‘미일 방위협력지침’에선 소련의 군사위협에 맞서 자위대와 주일미군 간 역할 분담에 중점을 뒀죠.
그러다 소련이 무너지고 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하면서 하나의 전환점이 마련됩니다. 1997년 미일이 ‘신(新) 미일 방위협력지침’을 발표하고 양국의 작전 영역을 한반도, 대만 등 주변지역으로 확대한 겁니다.
2000년대 들어 중국의 부상이 가시화되자, 미일은 2006년 ‘주일미군 재편을 위한 로드맵’에 합의합니다. 이에 따라 미 워싱턴주에 있던 육군 1군단사령부를 일본 자마기지로 옮겨 유사시 아태지역에서 미일 육군의 공동 작전사령부로 임무를 수행토록 합니다. 이어 미일 공군의 통합작전 능력을 높이기 위해 일본 항공자위대를 주일미군 5공군사령부가 있는 요코다 기지로 이동시키죠. 중국과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대응해 미일 통합 미사일방어사령부 격인 ‘공동통합운용조정소’도 새로 만듭니다. 이는 주일미군을 중앙아시아부터 동해까지 광범위한 지역을 관할하는 광역사령부로 격상시키고자 한 미국 국방전략의 일환이었죠.
미국과의 안보동맹에서 자율성을 추구하며 전시작전권 반환을 추구한 한국과는 반대로 일본이 주일미군과의 일체화를 추진한 차이는 왜 발생했을까. 여기에는 노무현 정부에서 자주파 득세 등 한국 특유의 민족주의 정서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이와 함께 한국전쟁 발발로 미군 주둔이 이뤄진 한국과,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해 전수방위에 국한된 일본의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이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됩니다. 김정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한일은 역사적으로 국방정책의 논리적 근거가 서로 달랐다”며 “애초부터 한미연합사 체계를 갖춘 한국은 자주파가 등장해 주한미군과의 분리를 고민한 반면, 일본은 보수파가 집권할 때 주일미군과의 통합을 고민했다”고 분석했습니다.
미일 안보조약 업그레이드 향후 파장은
주일미군사령부 강화 방침은 주한·주일미군의 ‘상호 보완성’이란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육군 병력 위주로 구성된 주한미군(2만8500명)과 해·공군 위주의 주일미군(5만5600명)을 결합하면 육해공군과 해병대를 모두 갖춘 완전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전략에서 중복에 따른 비효율을 최소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안된 편제라고 봐야합니다. 다시 말해 동아시아 역내에서 군사위협이 발생할 때 주한·주일미군이 함께 운용될 수밖에 없다는 얘깁니다.
실제로 미국은 탈냉전 이후 주한·주일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확대하기 위해 작전지역을 확장하며 연합훈련의 강도를 높여왔습니다. 육해공 합동훈련부터 인도주의 지원, 재난재해 및 테러 대응, 국제평화유지 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훈련을 망라하고 있죠. 미국의 전통 우방인 호주, 캐나다까지 끌어들여 중국을 포위하는 형국입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관점에서 주일미군의 역할 내지 전략적 위상이 주한미군보다 사실상 상위에 있다는 점이 주목됩니다. 해외 미군기지는 ‘전력 투사력’ 기준으로 ▲대규모 전력을 원거리로 보낼 수 있는 1급 전력투사 근거지(PPH·Power Projection Hub) ▲장기 주둔 사령부가 있는 2급 주작전기지(MOB) ▲소규모 부대나 순환부대를 위한 시설이 있는 3급 전진작전기지(FOS·Forward Operating Sites) ▲상주시설은 없고 유사시 병력 배치의 법적 근거만 있는 4급 협력적 안보지역(CSL·Cooperative Security Locations)으로 나뉘는데 주일미군은 1급 PPH로 주한미군은 2급 MOB로 각각 분류됩니다.
이에 따라 중국의 대만 침공과 같은 역내 안보 위기가 발생할 때 주일미군이 전투부대로, 주한미군은 지원 혹은 증원 부대나 병참기지로 활용될 거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이런 관점에서 주일미군 사령부 강화는 한반도나 대만에서 전쟁이 벌어질 경우 미군과 자위대의 일체성을 강화해 신속히 전력을 이동 배치하는 등 대응력을 높이려는 포석으로 보입니다. 일각에선 동맹에 비용 전가를 앞세운 트럼프가 재집권할 경우 주일미군 강화를 주한미군 감축의 지렛대로 활용할 가능성도 거론됩니다. 대만 위기 등과 맞물려 미일의 주일미군 강화 움직임을 우리가 면밀히 살펴봐야하는 이유입니다.
[참고 문헌] -임기훈 〈탈냉전기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의 역할 변화〉 (2021년, 한국과 국제정치 37권 4호) -마상윤 〈미완의 계획: 1960년대 전반기 미 행정부의 주한미군 철수 논의〉 (2003년, 한국과 국제정치 19권 2호) -FT 〈US and Japan plan biggest upgrade to security pact in over 60 years〉 (2024. 3. 24)
“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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