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때마다 정치권에서 네거티브 전략이 나오긴 했지만, 이번 총선은 유달리 심한 것 같다. 최근 진영논리가 강화되면서 상대 정당에 대한 적개심도 높아졌다. 각 당이 지지세를 강화하는 차원에서 네거티브 캠페인을 벌여 상대편 정당을 악마화하고 있다.”(이현우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전 한국선거학회 회장)
“진영논리 강화돼 상대에 대한 적개심 높아져”
총선에 사활을 건 여야 대표가 경쟁적으로 막말을 쏟아내면서 막장 총선 우려가 커지고 있다. 설화나 막말을 누구보다 경계해야 당대표들이 오히려 막말 제조에 앞장서 국민 갈등을 부추기는 형국이다. 야권에선 ‘해고’ ‘조기 퇴진’ 등 대통령 탄핵을 암시하는 듯한 발언까지 일상적으로 흘러나온다. “상대가 이기면 나라가 망한다”는 심판론만 주장할 뿐, 우리 사회가 당면한 저출생 극복과 국민연금 개혁 같은 중요한 의제에 대해서는 여야 모두 대안이나 비전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윤석열 대통령과 여권을 향해 거친 발언을 쏟아냈다. 4월 3일 제주 4·3 평화공원에서 열린 추념식에서 기자들과 만난 이 대표는 국민의힘을 “4·3 학살의 후예라 할 수 있는 정치집단”이라고 비난했다. 이틀 전인 4월 1일 유튜브 라이브 방송에선 정부와 윤 대통령을 향해 “이성을 잃은 정권” “완전 절대군주가 돼가고 있다. 권력 행사도 매우 폭력적이고 무도하게 하고 있다”며 날을 세웠다. 여권을 향한 날 선 발언 와중에 부적절한 표현이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이 대표는 황상무 전 대통령시민사회수석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그의 ‘회칼 테러’ 발언을 따라 하며 “광주에서 온 사람들 잘 들어. 너희 옛날에 대검으로, M16으로 총 쏘고 죽이는 거 봤지? 너 몽둥이로 뒤통수 때려서 대가리 깨진 거 봤지? 조심해. 농담이야”(3월 21일 전북 군산 유세)라고 말해 논란에 휩싸였다.
거대 야당 대표의 입에서 대통령 탄핵을 암시하는 듯한 발언도 이어졌다. 이 대표는 전국 유세 현장에서 “야단쳐서 안 되면 회초리를 들고, 회초리도 안 되면 해고해야 한다”(3월 17일 경기 화성 유세)거나 “책임을 묻고, 말로 해서 안 되면 내쫓아야 한다”(3월 22일 충남 서산 유세), “차라리 (대통령이) 없는 것이 낫다는 말에 공감이 가지 않느냐”(3월 30일 서울 중·성동을 유세)고 말했다.
당 인사들에게 “말조심하자”던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도 거친 언사로 네거티브 공세에 나섰다.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3월 28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 유세에서 그는 야권을 향해 “정치 자체는 죄가 없다. 정치를 개같이 하는 사람이 문제”라고 비난했다. 한 비대위원장은 이 대표의 이른바 ‘형수 욕설’ 녹음파일 논란을 거론하며 정제되지 않은 단어도 쏟아내고 있다. 이 대표가 “여당과 정부의 ‘악어의 눈물’에 속아선 안 된다”(3월 31일 유튜브 방송)고 발언하자 이튿날 한 비대위원장은 “이 대표는 정작 그런 쓰레기 같은 욕설을 한 형수나, 정신병원에 보낸 형님한테 아무런 사과를 한 바가 없다. 그게 바로 악어의 눈물”(4월 1일 부산 연제구 유세)이라며 날을 세웠다.
‘이·조(이재명 대표·조국 대표) 심판’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한 비대위원장은 두 당대표 등 야당 인사들을 범죄자로 지칭하며 비난했다. 그는 “두 사람(민주당 이재명 대표,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의 유죄 판결이 확정돼 감옥에 가기까지 3년은 너무 길다. (중략) 정치권 어슬렁거리는 범죄자들 치워버릴 것”(3월 28일 서울 광진구 유세)이라거나 “범죄자 심판하고 ‘이·조를 심판’해야 한다”(4월 2일 충남 당진 유세)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윤석열 정권 종식’을 전면에 내세우고 나섰다. 조 대표는 3월 31일 지상파 방송연설에서 조국혁신당이 “윤석열 검찰 독재정권 조기 종식이라는 국민의 바람을 대변한다”고 자처했다. 이날 연설에서 조 대표는 “아홉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독재정권 없다. 9번(조국혁신당 총선 비례정당 기호)을 찍어 나라를 구해달라” “과거 군부 독재정권 시절 군화 신은 군인이 앉은 자리를 이제 검찰 출신이 차지했다. 이것이 검찰 독재국가의 본질”이라면서 현 정부를 여러 차례 ‘독재정권’ ‘검찰 독재국가’로 규정했다.
정제되지 않은 말을 쏟아내기는 조 대표도 마찬가지다. “이 꼬라지(꼬락서니) 그대로 가다 나라 망하겠다 이런 판단으로 힘을 실어달라”(3월 28일 부산 해운대구 출정식)거나, 여권이 조국혁신당 등 야권을 ‘범죄자 연대’라고 표현하자 “한 비대위원장과 윤석열 대통령, 김건희 여사가 범죄자 연대라는 자백인가”(3월 30일 광주 서구 유세)라며 날을 세웠다. 이번 총선 전략에 대해 조 대표는 “응징투어로 콘셉트를 잡았다”며 “이 정권의 창출과 유지, 운영에 책임을 가진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 정권 문제점을 얘기하는 게 전략”이라고 말했다.
각 당 지도부가 이번 총선에서 막말 쏟아내기 경쟁에 골몰하는 주된 이유가 ‘지지자 동원’ 효과를 노리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선거학회 회장을 지낸 이현우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정치 양극화에 따라 중도층이 줄고 이들의 정치 무관심은 강화된 반면, 좌우 양극단 지지자는 각 당 네거티브 캠페인에 쉽게 휩쓸리는 경향이 있다”면서 “양극화가 심각해진 정치 구도에서 정치인들이 강한 네거티브 메시지를 통해 지지자를 정치적으로 동원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거대 양당 지도부의 말이 어느 때보다 거칠어진 배경에는 ‘불안감’이 작용했다는 시각도 있다. 이종훈 정치평론가는 “이 대표는 조 대표가 총선 정국에서 자신보다 더 주목받는 듯한 상황이 불안하고, 한 비대위원장은 (정치권에서) 내쳐질까 불안해 센 발언을 해서라도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당초 한 비대위원장은 ‘한동훈 효과’에 기세등등했는데, 찻잔 속 태풍에 그치는 것 아니냐는 관측까지 나온다. 당장 언론 보도만 봐도 예전보다 한 비대위원장이 언급되는 빈도가 줄어들었다. 센 발언을 해서라도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최근 총선 후 유학설을 부인하고 나선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 대표는 최근 총선 정국에서 조 대표가 더욱 주목받는 듯한 상황에서 조 대표보다 자신이 더 떠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낄 것 같다. 조국혁신당 약진으로 단독 과반에 실패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야권 선명성 경쟁에 나서 언론의 이목을 끄는 것이다.”
네거티브 공세가 잠식한 선거전에서 공약 대결은 실종된 지 오래다. 당 지도부 입에서 나온 급조된 정책마저 차별성·현실성이 떨어질뿐더러, 선거 국면에서 유불리에 따른 임기응변식이라는 비판이 적잖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최근 선거에서 거대담론이 퇴조한 빈자리를 정치투쟁 구호가 대체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 대표의 ‘무상’ 공약도 과거 성남시장, 경기도지사 시절부터 주장해온 내용이라서 유권자 입장에선 시쳇말로 타격감이 없다”며 “한 비대위원장도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가 들고 나온 사실상 민주당계 공약을 뜬금없이 갖고 나와 영향력이 없다”고 평가했다. 여야 공히 ‘돈 준다’ ‘건설한다’ ‘이전한다’ 같은 공약만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종훈 정치평론가는 “이 대표의 ‘결혼하면 10년 만기 1억 원 기본대출’이나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세종시 이전’ 등 각 당이 내건 중요 공약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권자 입장에선 실현 가능성이 낮은 데다 ‘흘러간 옛 노래’처럼 과거 공약과 차별성이 안 느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탄핵병’ 걸린 야권? 유권자도 식상”
전문가들은 사실상 대통령 탄핵을 선거 슬로건처럼 내건 점에 우려를 나타냈다. “야권이 ‘탄핵병’에 걸린 것 아닌가 싶다. 야권이 계속 탄핵을 얘기하지만 유권자들은 그 가능성이 없다고 보기에 식상해하고 있다”(이종훈 정치평론가)는 점에서 유의미한 선거 전략이 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정부와 여당이 잘못한 것은 마땅히 꾸짖어야 하지만, 탄핵이 일상적으로 거론되는 현상은 정치적 퇴보”(이준한 교수)라는 평가도 있다. 이현우 교수는 “탄핵은 정치체제의 비상(非常)이자 중단을 의미하는데, 이 같은 용어가 일상적으로 쓰이는 것은 정치 퇴보이자 위기”라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야권이 탄핵이라는 단어를 직접 쓰지 않더라도 이를 암시하는 듯한 슬로건을 여럿 내놓고 있다. 정치에서 극히 이례적이어야 하는 상황을 일상적으로 거론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자극은 더 큰 자극을 부르기 마련이다. 지지자를 자극하고 동원하거나, 정치적 반대를 나타내기 위해 탄핵 같은 용어를 일상적으로 써선 안 된다. 용어가 사람의 사고를 규정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치 지도자들은 더욱 신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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