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대 민주당 전반기 국회의장 경선 후보직을 사퇴합니다. 그간 성심껏 도와주시고 지지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죄송하다는 말씀 올립니다. 민주당의 승리와 정권교체를 위해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정성호 의원)
“민주당이 대동단결해서 총선 민심을 실현하는 개혁 국회를 만들고 제가 그 마중물이 되고자 이번 전반기 국회의장직 사퇴하기로 했습니다. 추미애 후보가 최다선이고 연장자라는 부분을 고려했습니다.” (조정식 의원)
주말인 12일 오후 더불어민주당의 국회의장 후보 2명이 줄이어 자진해서 사퇴했습니다. 이번 총선에서 각각 6선과 5선 고지에 오른 조 의원과 정 의원이 후보로 등록한 지 각각 3, 4일 만에 물러난 겁니다.
조 의원은 이재명 대표 체제에서 사무총장을 맡았던 수뇌부였고, 정 의원은 이른바 ‘친명 좌장’입니다. 그런 두 사람이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 마냥, 이날 오후 줄줄이 뒤로 빠진 겁니다. 5선의 우원식 의원만 “끝까지 완주하겠다”며 버티고 있으나 당내엔 사실상 ‘추미애 대세론’이 굳어지는 모습입니다.
● 주말 새 ‘추미애 대세론’
마감일인 지난 8일까지 민주당 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한 후보는 6선 조정식 추미애, 5선 우원식 정성호 의원 총 4명이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네 명 모두 경쟁적으로 ‘내가 찐명’이라 강조하며, 행정부와 맞서 싸우는 ‘강한 입법부, 강한 국회’를 공약으로 내세웠죠.
정 의원은 “역대 국회의장은 ‘의사 정리’라는 제한적 역할에 매몰돼 대통령과 행정부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한 게 사실”이라고 했고, 조정식 의원도 “정치검찰의 입법부 무력화 시도가 있다면 나를 밟고 가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날 우원식 의원은 “나는 이재명의 대선 경선 선대위원장을 맡았다”며 자신이 ‘찐명’이라고 호소했고요.
추 당선인도 후보 등록 당일 “대통령의 본인·가족, 측근이 관련된 이해충돌 사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 제한을 강구하겠다”며 ‘김건희 특검법’ 불가론을 외쳤습니다. 그러면서 “이 대표가 제안한 신용사면 등 처분적 법률 입법도 지원하겠다”며 이재명 대표의 입법을 위한 ‘백업’ 의사는 노골적으로 밝히더군요. 아울러 국회의장이 되면 대선에 불출마해 이 대표와 경쟁하지 않겠다는 의사도 내비쳤습니다. 추 당선인은 “의장에 당선되면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말이 지금도 유효하냐”는 질문에 “검찰 독재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데 한 몸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최대 개혁은 정권 교체”라고 답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렇다지만 나중에는 또 모르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8일까지만 해도 전원이 의지가 넘쳤건만, 이재명 대표가 휴식 겸 치료를 위해 서울대 병원에 입원한 9일 이후 주말을 기점으로 당내 기류가 급격하게 ‘추미애 대세론’으로 기울어진 겁니다.
복수의 민주당 관계자에 따르면 이 배경엔 ‘명심’(이재명 대표의 의중)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당 관계자 A는 “이 대표 측근이 초선 당선인들에게 ‘이재명 오더’라면서 추미애를 지지하라고 하고 다닌다고 전해 들었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관계자 B도 “친명계에서 정성호 조정식을 주저앉히고 추미애를 밀려고 한다더라”고 전했고요.
추미애 당선인도 13일 김어준 유튜브에 나와 “(입원하기 전 이 대표와) 깊이 얘기를 나눴는데, ‘이번만큼 국민 관심이 높은 국회의장 선거가 있었나. 그래서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렇게 과열되다 보니 우려가 많은 것 같다. 잘 좀 해주시면 좋겠다’고 이 대표가 (내게) 말씀을 해줬다”고 밝혔습니다. 여기서 ‘순리’는, 그동안 관례상 국회의장은 원내 1당의 최다선이 맡아왔던 만큼 이번에도 6선, 그중에서도 연장자인 추 당선인이 하는 게 맞는다는 취지입니다.
● 국회의장이 왜 이재명 입법을 지원하나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대표는 ‘추미애 의장’ 카드에 대해 부정적 입장이라는 소문이 당 안팎에 자자했습니다. 한 민주당 핵심 관계자는 이달 초까지만 해도 “강성 권리당원들은 추 후보를 밀지만, 사실 이 대표 의중은 정성호 의원에게 실려있다”고 전하기도 했습니다.
추 당선인이 워낙 강성 마이웨이 스타일이라 자칫 이 대표도 컨트롤하기 어려울 수 있는 데다, ‘추미애 국회의장’이 자신이 예고한 대로 정말 “쫄지 않고” 국회의장직을 수행하면 ‘거야’(巨野) 입법 폭주에 대한 여론이 악화될 수 있다는 점도 우려됐을 겁니다. 당 지지율이 떨어질수록 다음 대선을 준비해야 하는 이 대표 입장에선 불리할 테니까요. 굳이 추 당선인에게 ‘최초의 여성 국회의장’이란 타이틀까지 달아주면서 대권주자 파이를 나눠 먹고 싶지 않은 욕심도 있었을 거고요. 추 당선인이 후보 등록 당일 ‘이재명표 입법 백업’을 약속하고, 추후 대권 경쟁을 하지 않겠다는 점을 어필한 배경이겠죠.
그랬던 이 대표의 의중이 갑자기 바뀐 데에는 22대 국회 전반기에 입법 성과를 내기 위해선 어느 때보다 ‘강경파 의장’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됩니다. 이 대표는 총선에서 압승한 직후부터 ‘민심’임을 강조하며 강력한 입법 드라이브를 걸고 있죠. 정치권 관계자는 “2027년 대선을 준비해야 하는 이 대표로선 22대 국회 전반기 2년 동안(2024~2026년) 바짝 자신의 입법 성과를 쌓고, 이를 토대로 경기도지사 때 만들었던 ‘유능한 정치인’ 이미지를 강화하려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환경이 그렇게 만만하진 않죠. 일단 지난달 말 윤석열 대통령과의 영수회담이 사실상 ‘빈손’으로 끝났습니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가 요구한 1인당 25만 원 민생회복지원금 등을 사실상 모두 거부했습니다. 이 대표가 회담 직후 입법부와 사법부를 ‘패싱’할 수 있는 처분적 법률로 입법할 수 있는 안건들을 찾아오라고 당에 주문한 배경일 겁니다. 정부 없이도 민주당 혼자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겠죠.
회담 직후 국회 본회의에서 ‘채 상병 특검법’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민주당 출신 김진표 국회의장이 내세운 ‘여야 합의 우선’ 원칙에 뿔도 났을 겁니다. 한 보좌진은 “22대 국회에서도 이렇게 여야 입장을 모두 반영하려 하는 국회의장으로는 입법 성과를 내기 어렵겠다는 공감대가 지도부 내에 형성됐다”고 했습니다.
최근 원내대표 선거 때도 이 대표가 자신의 의중을 가장 잘 알고, 그대로 잘 실행한다는 평가를 받는 박찬대 원내대표를 단독 입후보시키기 위해 직접 나서 일찌감치 교통정리를 한 배경도 같은 이유일 겁니다. 강성 의장-강성 원내대표를 앞세워 이 대표는 ‘입법 성과’는 가져가고, 부담은 나눠 먹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거죠. 추 당선인의 강성 이미지가 상대적으로 이 대표를 온화하고 합리적으로 보이게 하는 효과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국회의장은 민주당만의 고유 직책이 아닙니다. 대통령에 이은 국가 의전 서열 2위이자 입법부의 수장입니다. 국민을 대표하는 입법부를 통틀어 대표하는 자리입니다.
이런 자리이기 때문에 국회의장은 차관급 비서실장을 포함해 중량감 있는 대규모 보좌진을 꾸릴 수 있고, 경찰로부터 별도 경호도 받습니다. 임기 2년 동안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자리 잡은 660평의 공관도 제공받고요. 모두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지원됩니다.
다만 예우만큼 책임도 막중합니다. 국회법에 따르면 국회의장은 ‘정치적 중립 의무’에 따라 선출 즉시 탈당 절차를 밟아야 하며, 재임 기간 동안 당적을 보유할 수 없습니다. 여야 대치가 극심할 땐 주요 법안이 상임위를 통과하지 않더라도 본회의를 열어 직권 상정해 표결에 부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국회의장을 이 대표의 ‘원픽’으로 뽑겠다는 사고가 정말 터무니없는 발상인 이유입니다.
이번 채 상병 특검법 처리 과정에서 여야 합의를 원칙으로 내세웠다가 민주당 친정 식구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었던 김진표 국회의장은 최근 작정하고 쓴 소리를 쏟아냈습니다. 그는 지난 5일 방송된 MBN 방송에서 ‘국회의장이 중립적일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의장 후보들을 향해 “조금 더 공부하고 우리 의회와 정치 사회의 역사를 보면, 그런 소리를 한 사람 스스로가 부끄러워질 것”이라고 꼬집었습니다. 그는 “만약 한쪽 당적으로 계속 편파된 의장의 역할을 하면 그 의장은 꼭두각시에 불과할 것”이라며 “요새 너무 성질이 급해졌는지, 아니면 팬덤 정치나 진영 정치의 영향으로 그냥 ‘묻지 마 공격’이 습관화돼서인지 그런 얘기를 하는 것 같다”고도 했습니다.
21대 국회에서 민주당 소속 국회의장들은 여야 간 합의를 요구했다는 이유로 같은 당 의원들로부터 “GSGG”(민주당 김승원 의원이 박병석 국회의장에게 한 욕설), “진짜 개××들”(박지원 당선인이 김진표, 박병석 의장에게 한 욕설) 등 원색적 욕까지 먹는 등 유례없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22대 국회 때 ‘강성 친명’, ‘대여 선명성’을 내세운 국회의장은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요. 이재명 대표와 추미애 당선인이 자신들이 그린 그림대로 ‘공생’이 가능할지 지켜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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