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미 양국 외교안보 라인 사이에서 미묘한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장호진 국가안보실장이 국내 한 방송에 출연해 “미국 여러 고위층과 얘기해봤는데, 미국은 북핵 문제에서 ‘중간 단계(interim steps)’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발언한 게 발단이었다. 며칠 뒤 ‘미국의 소리(VOA)’를 통해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대변인이 장 실장 발언을 반박하는 보도가 나왔다. 그러자 한국 외교부가 이를 또다시 반박하는 입장을 내면서 양국 간 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
에이드리언 왓슨 NSC 대변인은 “미국은 중간 조치를 고려할 용의가 있다고 계속해서 말해왔다”며 장 실장 주장에 반박했고, 한국 외교부는 “장 실장 말은 미국 정책에는 비핵화를 덮어두고 핵 동결이나 제재 완화 교환 수준의 미봉책에 그치는 그런 중간 단계가 없다는 점을 재확인한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은 “중간 단계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한국은 “미국 정책에는 중간 단계가 없다”고 하는 희한한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때아닌 한미 양국의 ‘중간 단계’ 논쟁
‘중간 단계’란 북핵 문제 해결에서 현실적 판단에 바탕을 둔 일종의 절충안이다. 북한 핵전력이 고도화된 상황에서 핵무기 개발 저지를 목표로 추진한 기존 비핵화 정책은 그 의미를 상실했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이미 북한은 전술·작전·전략 단계 모든 미사일의 핵탄두화를 완료했으며 유사시 이를 망설임 없이 사용할 것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미국의 기존 북핵 정책이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프로그램을 늦추고 저지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면, 중간 단계는 일종의 핵 군축 협상이다. 미국이 북한에 ‘당근’을 제공하는 대신, 북한은 추가 핵무기 생산이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전력 확대를 중단하는 거래를 말한다.
미국이 북한과 핵 군축 협상을 고려한다는 것은 북한이 대외적으로 사실상 핵보유국 지위를 확보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1994년 제1차 북핵 위기 이후 30여 년간 한미가 매달려온 ‘협상을 통한 비핵화’가 완벽하게 실패했다는 얘기다. 이에 따라 미국은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인정하고 ‘비핵화(denuclearization)’ 대신 ‘위협 감소(threat reduction)’로 대북 전략을 수정하려 하고 있다. 중간 단계라는 표현은 바로 이 같은 미국의 전략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북 전략의 초점을 위협 감소에 맞추는 데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 이견은 없어 보인다. 조 바이든 행정부의 미라 랩후퍼 NSC 선임보좌관은 3월 “중간 단계 및 위협 감소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고 그렇게 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대니얼 크리튼브링크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는 이미 2021년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6가지 우선 정책 추진 과제로 ‘북핵과 미사일 위협 감소’를 꼽은 바 있다.
미국 조야, 북핵 ‘위협 감소’로 전환
공화당 생각도 비슷하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집권 당시 북한과 ‘빅딜’을 여러 차례 거론하며 핵 군축 협상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내놓은 바 있다. 트럼프 대선 캠프의 사실상 대선 공약집으로 평가되는 헤리티지재단의 ‘프로젝트 2025’ 보고서에 국방 분야를 집필한 크리스토퍼 밀러 전 국방장관 대행은 “북핵은 이미 램프 밖으로 빠져나온 지니”라며 위협 감소를 목표로 한 북핵 협상에 찬성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밀러 전 대행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할 경우 국방장관 1순위로 거론되는 인물이다. 트럼프의 재선이 현실화됐을 때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임명이 유력한 엘브리지 콜비 전 국방부 전략·전력개발 담당 부차관보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안보 환경 변화를 지적하며 한국의 자체 핵무장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미국 조야의 이 같은 분위기는 우크라이나와 중동에서 연이어 전쟁이 터지면서 확산되고 있는 각자도생 원칙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 핵무장을 지지하며 공조체제를 갖추고 있다. 이제 미국도 북핵을 인정해 비핵화가 아닌 군축으로 전략을 수정하고 있다. 북한은 미국과 군축 협상이 이뤄질 경우 제재 완화나 주한미군 철수 같은 반대급부를 요구할 것이다. 애초에 북한의 핵개발 목적은 미국 견제와 한국 고립이었다. 북핵 완성은 한반도 문제에서 주도권이 완전히 북한으로 넘어갔음을 의미한다. 한국이 국제적으로 고립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한국 정부는 북핵 대응 수단으로 이른바 3축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각각 북한이 핵미사일을 쏘기 전 탐지해 선제 타격하는 ‘킬체인’과 북한 핵미사일을 공중 요격하는 ‘한국형 미사일방어’, 북한이 핵을 쏘면 대량의 미사일을 쏴 응징·보복하는 ‘대량응징보복’이다. 그러나 킬체인은 북한이 고체연료 미사일을 도입하면서 구현 불가능한 개념이 됐다. 한국형 미사일방어도 북한의 핵 투발 수단이 탄도미사일·방사포 등으로 다양해지면서 현실성이 낮아졌다. 대량응징보복은 재래식 무기로 핵무기에 대응한다는 점에서 발상 자체가 난센스였다. 무엇보다 3축 체계가 최소 기능이라도 수행하려면 미국의 감시정보자산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 미국이 북한과 군축 협상을 진행하면서 주한미군 역할을 축소하거나 아예 철수시킬 경우 3축 체계는 말 그대로 무용지물이 된다.
이제 한국은 생존을 위해 핵무장을 고민해야 할 때다. 북한이 핵무기를 사용하면 막는 게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유일한 생존 대책은 핵으로 무장하는 것뿐이다. 북한이 핵 공격 기미를 조금이라도 보이면 선제 핵 공격으로 북한 지도부를 소멸시킬 수 있다는 능력과 의지를 보여줄 수밖에 없다. 5월 2일(현지 시간) 미 상원 군사위원회에 출석한 애브릴 헤인스 국가정보국(DNI) 국장은 “한국이 미국 핵우산을 지속적으로 신뢰할 수 있을지 고민 중이고, 한국 내에서 자체 핵무장 논의가 상당히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다만 헤인스 국장은 “지금 단계에서는 한국이 핵무장을 추구하지 않고 있다는 게 우리의 판단”이라고 단서를 달았다.
한국 핵무장, 기술적으론 어렵지 않아
그렇다면 한국 핵무장은 가능할까. 기술적으로는 어렵지 않아 보인다. 국내 원전 대부분은 경수로를 사용하지만, 월성에 있는 일부 원자로는 중수로다. 월성에 있는 폐연료봉 건식 저장 시설, 일명 ‘맥스터’는 33만6000다발의 폐연료봉을 저장할 수 있는 규모다. 여기에 보관된 폐연료봉을 꺼내 재처리하면 고순도 플루토늄 26t 정도를 생산할 수 있다. 폐연료봉에서는 증폭핵분열탄 또는 수소폭탄을 만드는 데 필요한 다량의 삼중수소와 중수소도 뽑아낼 수 있다. 이를 전량 핵탄두 제조에 사용할 경우 만들 수 있는 핵탄두 수는 4330개에 달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한국에는 폐연료봉 재처리와 플루토늄 추출에 필요한 시설이 없다. 학계에서는 재처리 시설 건설이 결정되면 설비 개발 및 제작, 시설 건설에 최소 1년이 필요할 것으로 본다. 폐연료봉을 재처리하는 과정에는 6개월 넘게 소요된다. 소량의 핵탄두를 생산하는 데 2년 안팎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이미 t단위 탑재 중량을 가진 탄도미사일을 여러 종류 전력화하고 있다. 일단 핵탄두를 완성하면 이를 미사일에 실어 무기화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정치 분야다. 4월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한국 정계·학계 등 엘리트 그룹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자체 핵무장에 찬성한다는 응답은 34%, 반대는 53%였다. 정부가 핵무장을 결정하더라도 정치적·사회적으로 심각한 국론 분열과 갈등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자신의 정치 성향이 진보라고 답한 응답자의 반대 의견이 많았다. 사회적 의견 대립에서 잘 결집하고 집회 등 물리적 위력 과시에 능한 진보 진영의 특성을 고려하면 핵무장을 결정한 정부는 이른바 시민사회의 극심한 반대에 직면해 실각할 각오도 해야 한다.
신냉전 격화, 이제 결단 필요
국제정치적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국제법을 살펴보면 한국의 현 상황은 핵확산방지조약(NPT) 제10조에 규정된 ‘비상사태’에 해당할 수 있다. 핵무장을 결심하면 NPT 탈퇴 3개월 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와 NPT 모든 회원국에 이를 통보해야 한다. 당연히 대다수 NPT 회원국, 특히 중국과 러시아는 한국의 핵무장을 강력히 반대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 핵무장이 자국의 세계 전략에 조금이라도 부합하지 않을 경우 미국도 반대할 확률이 높다. 한국이 NPT를 탈퇴하는 것은 자유지만, 그럴 경우 미국이 주도하는 핵공급그룹(NSG)은 우라늄 공급을 거부할 것이다. 국내 원전 대부분이 저농축 우라늄을 사용하는 경수로다. 모든 핵연료를 외부에서 조달하는 한국이 우라늄을 들여오지 못한다면 원전 가동이 불가능해진다. 국내 전력 공급의 30%가량을 담당하는 원전이 멈출 경우 경제 활동과 일상생활도 멈추게 된다. 말 그대로 ‘망국’이다.
지금 세계는 전체주의 진영과 자유민주주의 진영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다. 한반도는 신냉전 최전선이다. 우리 의지와 관계없이 진영 대결이 격화되고 있고, 핵무기로 우리를 위협하는 적이 코앞에 있다. 적에게 굴복해 전체주의·공산주의 국가로 전락하지 않고 지금의 풍요와 자유를 가능케 하는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 체제를 영위하려면 이제 결단해야 한다. 글로벌 이익공동체인 한미동맹 바탕 위에서 핵무장을 추진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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