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에서 일하는 300명만 쓰는 고유의 어떤 화법이나 문법이 있다면, ‘여의도 사투리’ 아닌가. 저는 나머지 5000만 명이 쓰는 문법을 쓰겠다.”
지난해 11월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이같이 말하는 걸 들으면서 오랜만에 정치에 대한 기대감이 생길 뻔했습니다. 음흉하고,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여의도 특유의 구태 정치를 대놓고 배격하면서, 평범한 국민도 공감할 수 있는 말을 하겠다는 1973년생 ‘비정치인’의 포부에 “아, 이번엔 국민의힘이 진짜 좀 바뀌려나” 하는 생각이 잠시나마 들었던 거죠.
이런 ‘새 정치’에 대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그도 많이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동료 시민과 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빛나는 승리를 가져다줄 사람과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까? 우리 모두가 바로 그 사람들이고,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그가 한 달 뒤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직을 수락하면서, 굳이 서태지와 아이들의 ‘환상 속의 그대’ 가사(“바로 지금이 그대에게 유일한 순간이며 바로 여기가 단지 그대에게 유일한 장소이다”)를 차용했던 것도 자신의 ‘X세대’ 정체성을 강조하며 민주당의 ‘운동권 세대’와 확실한 차별화를 하겠다는 의도였을 겁니다.
당시 국민의힘 조정훈 의원도 이에 대해 “서태지와 아이들의 메시지는 나는 나다, 나는 나의 길을 간다라는 거거든요. 한동훈 장관의 모습이 여의도 문법, 여의도 사투리를 쓰지 않겠다, 나는 내 갈 길을 가겠다는 것”이라고 해석하더군요. 한 위원장이 그 뒤로 매일 같이 외치던 ‘동료 시민’이란 표현도 여의도에선 들어본 적이 없는 용어입니다.
어느 때보다 ‘정치 혐오’가 심각한 시기인 만큼, 기존 정치와 다른 길을 가겠다는 선언 자체에 많은 사람이 기대를 걸었던 것 같습니다. 한 전 위원장은 정치판 데뷔 한 달 만에 여론조사(중앙일보가 한국갤럽에 의뢰해 2023년 12월 28~29일 전국의 만 18세 이상 남녀 101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차기 정치 지도자 선호도’ 1위(24%)에 오르기도 했으니까요. 오차범위 이내이지만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22%)보다 2%포인트 높았습니다. 당시 민주당에선 “원래 정권 2년 차 총선은 당연히 정권심판론으로 흘러가는 건데 갑자기 한동훈이 등판하면서 미래지향적 선거가 됐다”라는 긴장감이 역력했죠.
그런데 정치가 그렇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었나 봅니다. 총선 기간 한 전 위원장을 지켜보면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내가 뭔가를 새롭게 하겠다’라는 게 전혀 없다는 거였습니다. 원래 대안없이 남 욕만 하는 게 가장 쉽죠. 자기 콘텐츠는 없이 오로지 기존 여의도 정치와 반대 길을 가려고만 하니 스스로 네거티브의 함정에 빠져든 것 같더군요.
그가 ‘한동훈식 정치개혁’이라고 꺼내든 ‘국회의원 불체포특권 포기’, ‘국회의원 금고형 이상 확정시 세비 반납’, ‘출판기념회 정치자금 수수 금지’ 등은 모두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을 저격하기 위한 용도입니다. 물론 처음에 들었을 땐 통쾌합니다. 하지만 사실 일반 평범한 국민의 삶과는 큰 상관이 없는, 그야말로 국회의원 300명에게만 해당하는 전형적인 여의도 정치입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거죠.
선거운동이 시작되면서 여의도 사투리를 거부하려는 그의 강박은 더욱 여실히 한계로 드러났습니다. ‘이재명 없었으면 어찌 선거를 치렀을까’ 싶은 정도로 총선 내내 이재명만 쥐어패더군요. 이재명을 싫어하는 국민의힘 강성 지지층이야 대리 희열을 느꼈겠지만, 정치 고관여층이 아닌 평범한 유권자들이 젊은 여당 리더에게 기대했던 건 남 욕보다는 좀 더 내 삶과 연관된 민생 정책이었을 겁니다. 당장 내가 먹고살기 어려워 죽겠는데, “국회를 세종시로 완전히 옮겨 ‘여의도 정치’를 종식하겠다”라는 공약이나 “이재명과 조국을 심판하자”라는 ‘이조심판론’은 공허하게 들리죠.
심지어 컨벤션 효과가 저물고 지지율이 떨어지니 “개 같은정치” 등 독한 막말까지 쏟아내던 그의 모습은 여느 구태 정치인들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습니다.
한 전 위원장은 총선에서 참패한 뒤엔 더 완벽한 ‘네이티브 여의도 정치인’이 된 듯합니다. 이 사람, 저 사람과 만찬 회동을 했다는 사실이 슬슬 흘러나오더니, 갑자기 공공도서관에서 분홍색 골전도 이어폰을 착용한 채 혼자 책을 읽고 있는 사진이 온라인 팬클럽 등에 올라오더군요.
이른바 ‘식사 정치’, ‘목격담 정치’죠. 모두 전형적인 여의도식 ‘간 보기 정치’입니다. 자신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대신, 근황과 생각을 남의 입과 눈을 빌어 간접적으로 퍼뜨리고 일단 여론을 찔러보는 겁니다. 물론 적당한 저울질이야 필요하겠지만 한 달 가까이 변죽만 울려대면 조급해 보이고, 결단력이 없어 보이겠죠.
2007년과 2017년 대선 출마를 저울질만 하다 접은 고건 전 총리와 반기문 전 총리, 간 보기의 달인이라 ‘간철수’로 불리는 안철수 의원 등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민주당 박지원 당선인이 “안철수 의원 하면 ‘간철수’, 간을 잘 본다는 말이다.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도 당 대표 나올 것인지, 안 나올 것인지 도서관 사진 같은 것으로 간 보기를 한다”(17일 유튜브 방송)고 꼬집은 배경입니다.
자기는 뒤로 빠진 채 대리인을 앞세워 조금씩 흘리는 ‘최측근 정치’도 하더군요. 한 전 위원장의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국민의힘 장동혁 의원은 요즘 한 전 위원장 ‘쉴드’를 치느라 바빠 보입니다. “한 전 위원장이 당원과 동료 시민에게 많은 약속을 했다”, “민심이 부를 때 거부할 수 없는 게 정치”, “이조심판론을 갖고 선거운동을 할 때 많은 분이 한 전 위원장에게 ‘제발 한 번만 더 지원 유세를 와 달라’고 했다. (그래 놓고는) 지금 와서는 ‘그것 때문에 졌다’고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등 한 전 위원장의 마음속 억울함을 연일 대신 호소해주고 있죠.
전형적인 여의도 문법인 ‘SNS 정치’도 시작하려나 봅니다. 한 전 위원장은 18일 밤 페이스북에 정부의 ‘KC 인증 의무화 규제’에 대한 비판 글을 올렸습니다. 지난 4월 20일 이후 딱 한 달 만의 업로드입니다. 비대위원장직 사퇴 후 첫 현안 관련 입장으로 정부 정책을 비판한 겁니다. 당연히 당 안팎에선 ‘비윤’(비윤석열)으로 스탠스를 잡고 정부에 할 말을 하는 여당 대표 콘셉트를 잡아가고 있다는 해석이 나옵니다.
지난 총선 과정을 거치면서 한 전 위원장에게서 조금씩 이재명 대표의 향기가 나기 시작했다면, 요즘은 그에게서 조국 대표도 얼핏 보이는 듯합니다. 굳이 도서관에서 핑크색 골전도 이어폰을 낀 채 제목이 잘 보이게끔 책들을 가지런히 올려둔 그의 모습에서 4년 전 ‘대선’ ‘진로’ ‘좋은 데이’ 소주병을 나열한 사진을 올려 너무도 정치하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던 조 대표가 연상됩니다. (조 대표는 정치의 꿈을 이룬 최근에도 ‘새로’와 ‘처음처럼’ 소주병 사진을 올리며 ‘페북 정치’를 즐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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