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국가통합인증마크(KC) 인증이 없는 해외 제품의 직접구매(직구)를 금지하는 정책을 내놨다가 사흘 만에 철회한 가운데 이 대책이 국민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검증하는 당정협의가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또 3월 7일 국무조정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해외직구 종합 대책 태스크포스(TF)에서 “소비자의 반발이 예상된다”는 지적이 나왔음에도 정부는 관련 회의를 20여 차례 열고도 ‘소비자 의견 수렴’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4·10총선 참패 뒤 정부여당은 “민생과 정책으로 국민의 공감을 얻겠다”고 약속했지만 “당정 소통 부재, 관료식 탁상행정 등이 맞물린 총체적 난맥상이 윤석열 정부 출범 3년 차에도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은 20일 “정책의 사전 검토 강화, 당정협의를 포함한 국민 의견수렴 강화, 브리핑 등 정책설명 강화, 정부의 정책 리스크 관리 시스템 재점검 등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고 성태윤 대통령정책실장이 전했다. 성 실장은 “국민들께 혼란과 불편을 드린 점에 대해 사과드린다”고 했다.
정진석 대통령비서실장은 회의에서 “정책 발표 전 정책이 미칠 영향 등에 대한 검토가 선행돼야 된다”며 “정무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당정협의 등을 시스템화해야 한다”고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 대통령은 질책의 의미로 한덕수 국무총리와 주례회동을 취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총리는 국무조정실 보고 자리에서 “정책 의도가 왜 제대로 전달이 안 됐느냐”며 강하게 질타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민의힘 추경호 원내대표는 이날 오전 비상대책회의에서 “당정 협의 없이 설익은 정책이 발표돼 국민들의 우려와 혼선이 커질 경우 당도 정부에 대해 강한 비판의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밝혔다. 추 원내대표는 회의 뒤 ‘당정 사전 협의’ 질문에 “나는 처음 들었다”고 했다. 당정 협의가 없었음을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정책 혼란이 벌어진 뒤 뒤늦게 대통령실과 여당이 목소리를 내는 데 대해 “뒷북 대응”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인 2022년 7월 ‘만 5세 초등학교 입학’ 논란이 불거졌을 당시 여당에선 “철저히 당정 협의를 거친 정책들만 발표되도록 시스템을 구축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지난해 ‘주69시간 근로제’, ‘연구개발(R&D) 예산 축소’ 등 설익은 정책 강행에 따른 현장 혼란이 되풀이되고 있다. 여권 관계자는 “구조적 원인인 수직적 당정관계부터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더불어민주당 이해식 수석대변인은 서면브리핑에서 “아마추어 국정이 윤석열 정부의 특질”이라고 비판했다.
국가통합인증마크(KC) 인증을 받지 않은 80개 품목의 해외 직접구매(직구) 금지 정책을 둘러싼 ‘오락가락 탁상행정’ 난맥상을 두고 20일 여당 관계자는이 같이 말했다. 정부가 당정 협의 없이 정책을 밀어붙이고 여당 지도부가 뒤늦게 문제제기 방식으로 수습에 나서는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권에선 “수직적 당정관계 속 여당이 정부로부터 정책을 보고 받고 정책 도입에 따른 파장을 대통령실에 전달하는 정무적 기능이 상실됐다”는 말이 나온다.
● “고질병처럼 반복되는 당정 소통 부재”
국민의힘 추경호 원내대표는 이날 오전 비상대책회의에서 “정부는 국민 민생에 영향을 끼치는 주요 정책 입안 과정에서 당과 충분히 협의할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추 원내대표는 ‘당정 사전 협의’를 묻는 질문에 “당에 종이 쪼가리가 왔을 수 있지만 그것은 제대로 된 협의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해외 직구에 익숙한 국민들이 “소비자 선택권 침해”라고 반발하자 뒤늦게 비판 목소리를 낸 것이다.
정부 소식통은 “당연히 당정협의를 거쳤어야 했는데 보고 대상인 원내대표, 사무총장 등이 교체 시기여서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고 했다. 정책 수립 기간과 22대 총선 일정이 맞물리면서 당정협의가 이뤄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요 정책 도입 과정에서 “당정 소통 부재가 고질병처럼 반복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석열 정부 출범 3개월 뒤인 2022년 7월 정부는 ‘만 5세 초등학교 입학 추진’ 방침을 내놨다가 “유아 발달을 고려 안했다”는 역풍에 정책을 철회했다. 이후 국민의힘 주호영 비상대책위원장은 “철저히 당정 협의를 거친 정책들만 발표되도록 시스템 구축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반년 뒤인 지난해 3월 고용노동부의 근로 시간 개편안 등 설익은 정책 발표로 ‘69시간 근무’ 논란이 일었다. 당시 윤 대통령은 “당정 간에 긴밀하게 협의하라”고 지시했다. 여당도 주2회 고위 당정 정례화를 대안으로 냈지만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지난해 10월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 이후 당정은 또 ‘주 1회 고위 당정 정례화’를 들고 나왔지만 총선 국면이 다가오면서 없던 일이 됐다. 고위 당정협의회도 1월 14일 이후 4개월 가까이 열리지 않다가 총선 이후인 이달 12일에 재개됐다.
● 소비자 반발 우려에도 의견수렴 과정 無
정부가 올해 3월 7일 출범한 해외직구 종합 대책 태스크포스(TF) 내부에선 직구 금지 정책에 “소비자들의 반발이 예상된다”는 우려가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일부 관계자들은 TF에서 2017년 전기용품 및 생활용품안전관리법(전안법) 개정 당시 소상공인이나 소비자의 반발이 거셌던 사례를 거론하며 우려를 나타냈다. 당시 의류나 장신구 등에 KC 인증을 의무화한 ‘전안법 개정’이 예고되자 소상공인이나 소비자들은 “KC인증 비용 부담이 늘어 가격 인상 우려가 있다”며 거세게 반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 TF가 출범 뒤 정책 발표까지 2개월 동안 20차례 회의하는 과정에서 ‘소비자 의견 수렴’ 과정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 관계자는 “정책 구상 단계에서 소비자와 소상공인 등 상대로 여론 수렴 공청회를 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고 했다. 이 때문에 정부가 현장 여론을 제대로 듣지 않은 채 민심과 괴리된 정책을 밀어붙인 것도 이번 사태의 원인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정부는 16일 정책 발표 당시 뒤늦게 “법 개정 전에 공청회를 열어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책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위해성이 큰 제품은 안전 인증이 없으면 해외직구 금지”, “6월 중 반입 차단 시행” 등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해 반감이 커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 여권 관계자는 “정부가 구상한 정책 의도와는 별개로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며 “주요 정책 결정 및 발표 과정에 대해서 되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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