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초 루마니아 동부 갈라치주(州) 한 훈련장에 현지인들의 이목을 사로잡은 신형 전차가 등장했다. 태극기와 루마니아 국기를 함께 달고 있던 이 전차는 훈련장을 누비며 경쾌한 기동성과 강력하면서도 정확한 화력을 선보여 박수갈채를 받았다. 대한민국 K2 흑표 전차가 그 주인공이다.
K2 전차, 루마니아 현지 성능평가 완료
5월 10일(현지 시간)부터 일주일 동안 진행된 현지 성능평가는 루마니아 측 요청으로 이뤄졌다. 흑해 연안에 위치한 루마니아는 우크라이나, 몰도바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특히나 전쟁 위기감이 높아진 국가다. 몰도바 내 미승인 국가 ‘트란스니스트리아’에 러시아군이 주둔하고 있고, 흑해를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대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루마니아는 오랫동안 미뤄왔던 군사력 현대화를 위해 국방예산을 대거 확충하고 나섰다. 신형 무기체계를 대량 도입하려는 루마니아 레이더망에 포착된 게 바로 K2 전차다.
현재 루마니아군 주력 전차는 TR-85 계열 300여 대와 T-55AM 120대다. 그중 옛 소련 시절 제작된 T-55는 그야말로 퇴물이라서 당장이라도 퇴역이 시급한 수준이다. 비교적 신형이라는 TR-85도 T-55를 기반으로 개발된 전차라는 점에서 러시아군을 제대로 상대하기 어렵다. 사실 루마니아는 1968년 ‘프라하의 봄’ 이후 소련에 대한 무기 의존도를 줄이고자 군수산업에 상당한 투자를 해왔다. 당시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대치하는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으로 소련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었지만, 무기 국산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냉전 시절 루마니아는 소련의 지원이 끊겨도 독자 군수지원이 가능한 수준의 군수산업을 보유했다.
루마니아군의 현용 주력 장비는 대부분 소련제 무기를 토대로 자체 생산한 것이다. TR-85 시리즈 전차와 MLI-84 보병전투장갑차, TABC-79와 TAB-77 장갑차 같은 기동장비, M85와 M1981 곡사포, APR-40 다연장로켓 시스템 등이 대표적이다. 문제는 탈냉전 이후 루마니아의 군수산업 투자가 크게 줄었다는 점이다. 2004년 나토에 가입한 루마니아는 집단방위체제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자국 군 현대화 과제를 방기했다. 무기체계를 옛 소련 규격에서 나토 표준으로 바꾸라는 나토 측 요구에 루마니아는 오랫동안 배짱만 부리며 버텼다. 전쟁이 나면 나토가 지켜줄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이 국가 전체에 팽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대규모 전면전이 발발하자 루마니아에서 안보 불감증은 삽시간에 자취를 감췄다. 개전 초 러시아는 무서운 속도로 우크라이나 영토를 잠식해 들어갔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점령되면 그다음은 이웃 루마니아, 폴란드 차례라는 공포감이 급속도로 확산됐다. 이 같은 공포감이 루마니아의 국방예산 확대와 군사력 현대화에 동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러시아 침공 우려에 국방비 2년 새 4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편성된 루마니아의 2023년도 국방예산은 84억8100만 달러(약 11조5800억 원)로, 전년(51억9500만 달러·약 7조900억 원) 대비 약 63.3% 급등했다. 올해 국방예산은 207억 달러(약 28조2600억 원)로 재차 폭등했다. 2년 전과 비교하면 300% 가까이 증가한 것이다.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공여하면서 발생한 전력 공백을 메우는 한편, 옛 소련 규격 무기체계를 나토 표준으로 대체하려면 그야말로 엄청난 양의 무기를 사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현역 7만1500명, 예비역 5만5000명 규모의 루마니아군은 여러모로 노후 무기 대체 소요가 많다. 루마니아 무기 시장을 놓고 세계 여러 나라 방산업체가 모여든 이유다.
우선 루마니아는 구형 전차를 대체하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M1A2 SEP(V)3 전차를 사들였다. 지난해 미국과 계약에 따라 루마니아는 M1A2 전차 54대, M88A2 구난전차와 M1150 공병전차, M1110 교량전차 각 4대와 전차포탄 1만여 발을 인수할 예정이다. 계약 규모는 25억3000만 달러(약 3조4500억 원)에 달한다. 전차 대당 600억 원이 넘는 가격이다. 대량의 탄약과 전투지원용 차량 12대가 포함된 점을 감안해도 루마니아로선 너무나 높은 금액이다. 루마니아의 전차 대체 수요는 최소 300대에서 최대 500대 규모다. 이 정도 물량을 모두 M1A2로 대체한다는 것은 루마니아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루마니아가 경쟁 입찰 과정 없이 M1A2를 계약한 것은 안보 위기 상황에서 미국의 지원을 끌어오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선물’로 풀이된다. M1A2는 가격이 지나치게 비싸고 납기 일정도 긴 데다, 루마니아 지형에 맞지 않는 모델이기 때문이다. 루마니아는 국토의 3분의 1이 산악 지형이고, 나머지 3분의 1은 수풀이 우거진 산림이다. 거대한 카르파티아산맥과 14개에 달하는 산맥 지류가 국토 전역에 퍼져 있고, 다뉴브·무레슈·프루트 같은 큰 강과 지천이 국토에 거미줄처럼 분포돼 있다. 산과 강이 많다는 것은 교량이 많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무거운 전차를 운용하기 까다로운 지형이라는 것이다.
M1A2 전차의 전투중량은 67t이 넘는다. 루마니아 육군의 현용 주력 부교인 PR-71(최대 하중 60t)이나 나토 회원국에서 널리 쓰이는 독일제 M3 자주도하차량(최대 하중 63t)이 견딜 수 있는 최대 하중을 초과하는 무게다. 무거운 중량 탓에 루마니아 전장 환경에서 운용되기 어려운 것은 독일 레오파르트 2A8 전차도 마찬가지다. 레오파르트 2A8의 전투중량은 사양에 따라 65~67t에 달해 산악·산림·하천이 많은 루마니아에서 운용하기엔 부적합하다. 서방 세계를 대표하는 두 전차가 작전 환경 부적합으로 도입 고려 대상에서 제외될 경우 루마니아에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다. K2가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는 이유다.
K2는 루마니아처럼 산과 하천이 많은 한반도 지형에 특화된 모델이다. K2에는 세계 최초로 유기압 현수장치(ISU)가 적용됐다. 센서가 지형을 스캐닝한 뒤 서스펜션을 전자 제어해주는 장치다. 그 덕에 울퉁불퉁한 산악과 하천 지형에서 주행 안정성, 기동 간 사격 정밀도가 세계 최정상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전투중량도 56t에 불과해 M1A2나 레오파르트 2A8보다 운신의 폭이 넓다.
산·하천 많은 루마니아 지형에 제격
K2 전차는 화력도 동급 모델을 압도한다. K2는 55구경장(口徑長: 총포 구경 단위로 나타낸 총포신 길이) 120㎜ 활강포와 최신형 날개안정분리철갑탄 K279를 사용한다. 동급 3.5세대 전차 중 최강 공격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K279는 열화우라늄 탄자를 사용하는 미군 M829 계열을 제외하면 텅스텐 탄자 철갑탄 가운데 가장 강력한 관통력을 지녔다. 표준 전차 교전 거리인 2000m에서 700~800㎜의 장갑판을 관통할 수 있다. 이는 미국의 수출용 KEW-A3나 독일 DM63을 능가하는 것으로, 러시아 최신형 주력 전차의 전면장갑을 일격에 뚫을 수 있는 수준이다. K2는 방어력도 탄탄하다. 개발 단계에서 K2 전차는 동종 모델 120㎜ 활강포에서 발사한 K279 철갑탄을 방어해냈다. 현존 전차 가운데 최고 수준의 방어력을 입증한 것이다. 고성능 복합장갑, 반응장갑과 함께 적 대전차 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는 능동방어장치도 갖췄다. 현재 폴란드와 함께 준비 중인 성능 개량형에는 자폭 드론을 교란할 수 있는 대응 장치도 추가될 예정이다.
루마니아가 특히 눈여겨보는 K2의 강점은 가격과 납기 경쟁력인 것으로 보인다. K2 전차 대당 가격은 현재 생산되는 기본 사양의 폴란드 도입 가격 기준으로 250억 원이다. 미국이나 독일 전차의 반값 수준이다. 폴란드는 한국군 현용 사양을 ‘K2GF’라는 명칭으로 180대 구매했는데, 계약 체결일로부터 3개월 만에 초도분을 인수했다. 폴란드는 ‘K2PL’로 명명된 개량형 820대를 추가 도입할 예정이다. 이 가운데 500대는 2027년까지 현지에 건설되는 공장에서 생산하고, 나머지 320대는 한국에서 만들어 납품할 전망이다. 10년 안에 전차 1000대를 전량 납품하는 일정이다. 발주 후 초도 물량 인수까지 3~4년 이상 걸리는 미국·독일제 전차가 따라올 수 없는 속도다.
국내 업체들의 적극적인 기술이전 의지도 루마니아가 K2를 우선순위로 고려하는 이유다. 앞서 지적했듯이 루마니아는 냉전 시절 독자 군수산업 구축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나라다. 현재 루마니아 정부도 전차, 장갑차, 곡사포 등 무기의 현지 생산과 국산화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 특히 올해 말 퇴임하는 클라우스 요하니스 대통령은 차기 나토 사무총장직에 출사표를 던지며 “루마니아 방위산업을 전면 재정비해 나토 회원국 재무장에 적극 참여하겠다”고 여러 차례 천명했다. 요하니스 대통령 뜻대로 나토 회원국의 재무장 사업에 참여하려면 루마니아는 단기간에 방위산업을 재정비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루마니아가 수년 안에 방산 제품을 내놓으려면 한국과 협력이 주효한 방법일 것이다.
나토 재무장 적극 참여 의사 밝힌 루마니아
K2 전차가 폴란드에 이어 루마니아 시장까지 장악하면 나토 최전선에 K2 전차 1300여 대가 깔리게 된다. 동유럽에 생산·정비 거점을 확보하고 규모 경제까지 갖춘 K2 전차는 상품성 측면에서 미국 에이브럼스나 독일 레오파르트 2보다 훨씬 매력적일 것이다. 성능·가격·납기 조건만 놓고 보면 이미 경쟁 모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기체계 구매 의사결정에서 성능이나 가격만큼 중요한 ‘정치력’이다. K2 전차를 비롯한 K-방산 제품이 유럽에서 입지를 더 확대하려면 한국이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핵심 구성원임을 적극 어필해야 한다. 방위산업을 미래 대한민국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키우기 위한 ‘업계’의 준비는 끝났다. 이제 ‘정치’가 바뀔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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