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3일 오전 윤석열 대통령이 “포항 앞바다 영일만 심해탐사 시추계획을 승인했다”고 밝힌 직후 지인들과의 단체 카톡방에 올라온 대화입니다. 대통령이 직접 브리핑에 나서 “영일만 지역에 최대 140억 배럴에 달하는 석유와 가스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데도 온통 불신과 의심뿐이었습니다.
혹시 ‘개딸’들 아니냐고요? 평소 여권을 강력히 지지하는, 보수 성향이 짙은 분들입니다.
저 카톡방만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이날 온라인에선 온종일 역술인 ‘천공’의 강의 영상이 ‘지라시’마냥 돌았습니다. 천공이 8년 전 ‘지하자원’의 중요성을 강조한 데, 마침 2주 전인 지난달 16일에도 “우리는 산유국이 안 될 것 같냐. 앞으로 (산유국이) 된다”, “이 나라 밑에 가스고 석유고 많다”, “예전에는 손댈 수 있는 기술이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게 다 있다”고 말했다는 거죠.
대통령의 예고 없던 발표에 당황해하던 야권도 여론 눈치를 살피며 슬슬 움직이더군요.
개혁신당이 이날 오후 3시 39분 가장 먼저 논평을 냈습니다. 정국진 부대변인은 “성공률은 20% 정도라 장담할 수 없는 데다 설령 성공하더라도 2035년이 돼서야 생산이 가능하다 한다”며 “이제 갓 시추 계획을 승인했을 뿐인 일에 대통령이 직접 호들갑을 떨며 직접 브리핑을 할 일인가 싶다”고 했습니다.
이어 조국혁신당이 오후 4시 “바닥 수준인 지지율을 끌어올릴 수 있는 호재로 보였냐”는 논평을 냈습니다. 김보협 수석대변인은 “약 50년 전 박정희 정부 당시 유사한 소동이 있었다”며 “대통령실 참모들에게 지시해 1976년 1월 15일 경향신문을 찾아오라 하라. 당시 관련 기사의 큰 제목은 ‘석유가 나왔다’이고, 작은 제목은 ‘박 대통령 연두회견이 던진 충격파’였다”고도 했습니다. 이날 하루 종일 ‘천공 짤’과 함께 온라인을 달군 기사였죠.
‘거야’ 민주당은 이들 신생 야당보다는 좀 조심스러웠는지, 윤 대통령 브리핑 직후엔 “일단 내용 파악부터 해봐야겠다”(지도부 핵심 관계자)며 말을 아끼더니 결국 이날 오후 4시 15분 “정부가 전망대로 충분한 매장량을 확인한다면, 고통에 신음하는 민생과 경제에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보인다”며 “민주당 역시 국회 차원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논평을 냈습니다. 그러면서도 “윤석열 대통령의 이번 발표가 하락세의 지지율을 전환하기 위한 국면 전환용 발표는 아닌지 매우 의심스럽다”(이해식 수석대변인)고 덧붙였더군요.
다만 이렇게 긴가민가하는 분위기는 만 하루를 못 갔습니다. 한 네티즌이 영일만 석유 매장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미국 회사 ‘액트지오’(Act-Geo)의 텍사스 휴스턴 본사를 직접 찾아가 찍어 올린 사진 한 장이 파장을 불러일으켰죠. 아무리 봐도 일반 가정집 같은 ‘소박한’ 본사 외관에 놀란 네티즌들은 액트지오가 설립된 지 5년도 안 된 신생 회사인데다 직원도 10명 이내 작은 회사라는 점을 추가로 찾아내며 의심에 의심을 더했습니다. (최근 방한한 액트지오의 비토르 아부레우 고문은 7일 기자회견에서 이 본사가 실제 자기 집이 맞다고 했습니다.)
불붙기 시작한 온라인 여론에 자신감을 얻은 민주당은 즉각 ‘국면 전환용 쇼’라며 공세 모드로 전환했습니다. 김용민 의원은 4일 KBS라디오에서 “(대통령이 이번 발표를) 정치적으로 악용한 것 아니냐, 활용한 것 아니냐는 비판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고, 정청래 최고위원도 같은 날 김어준 유튜브에서 “이게 바로 레임덕의 증거”라며 “어떻게든 한번 지지율 올려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은데 하여튼 이상하다”고 했습니다.
이틀 만에 ‘천공’의 이름도 본격 거론되기 시작했습니다. 민주당 김병주 의원은 “천공의 강의 내용이 유튜브에 떴는데 ‘석유가 있다’, ‘엄청난 매장량이 있다’ 이런 내용들이 나온다. 그러니 ‘천공과 연계된 것이 아니냐’, ‘대통령실과 뭔가 천공이 정보를 받았든가 아니면 천공의 이런 얘기를 믿고 했든가’, 이런 의혹을 당연히 국민들은 갖게 되는 것이죠”(5일 BBS 라디오)라고 했습니다. 같은 날 조국 대표도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워낙 황당하게 국정을 운영하니 국민 신뢰가 바닥을 친다. (그러니) 대통령이 중요 발표를 할 때마다 네티즌들이 천공이란 해괴한 자가 비슷한 말을 했는지 찾아보는 것 아니냐”라고 목소리를 높였죠.
야권의 의혹 제기는 날이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중입니다. 잠잠하던 이재명 대표도 6일 페이스북에 “뜬금없는 산유국론”이라며 “막판 대역전을 외치며 수천억 원을 쏟아붓고 결국 국민 절망시킨 부산 엑스포가 자꾸 떠오른다”고 썼죠. 그는 “십중팔구(성공 확률 최대 20%) 실패할 사안이라면서 전액 국민 혈세를 투입하는 것도 걱정이고, 주가 폭등에 따른 추후 주식투자자 대량 손실도 걱정”이라고 했습니다.
이 대표의 가세에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선 어느덧 “불기둥처럼 치솟아 오른 주가조작 (가능성)과 관련해서 과연 이 발표로 이득을 보는 자가 누구인지 추적할 것”이라며 주가 조작 의혹까지 제기된 상태입니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에 내정된 민주당 의원들은 단체로 기자회견을 열어 “의혹 해소를 위한 상임위를 열어야 한다”고 했고요. 22대 국회가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 전부터 ‘영일만 의혹’이 쟁점으로 떠오른 겁니다.
예상과 전혀 다르게 흘러가는 전개에 여권은 당혹스러운 표정입니다. 다만 지금 저들도 할 수 있는 건 야권의 공세에 ‘음모론’이라고 맞서는 것 뿐이죠. 국민의힘 추경호 원내대표는 “희소식 앞에 민주당은 유독 재를 뿌리기 바쁜 것 같다. 이 대표부터 앞장서서 경제·과학의 영역을 정치 비방으로 폄훼하고 나섰다”고 했고, 성일종 사무총장도 민주당을 겨냥해 “대한민국 발전을 저주하는 고사를 지내는 듯하다”고 했고요.
하지만 여권도 야당을 비난하기에 앞서 이번 불신의 출발점이 야권이 아니었다는 점부터 잘 돌아봐야 할 겁니다. 세상에, 우리나라가 산유국이 될 수도 있다고 대통령이 직접 얘기하는데 국민들이 좋아하긴 커녕 “벌써 세금 아깝다” “또 무슨 헛소리냐”는 반응이 나오는 게 얼마나 ‘웃픈’ 현실입니까.
논어에서 공자는 정치의 본령을 묻는 제자 자공에게 ‘풍족한 식량’과 ‘충분한 군대’, ‘백성의 믿음’을 3가지 필수 요소로 꼽았습니다. 이 중 굳이 버려야 한다면 그 순서를 묻는 질문엔 첫째로 군대, 그 다음으로 식량을 버리라 했죠. 군과 음식 없이는 어떻게 버텨도, 백성의 신뢰 없이는 정치가 절대 불가능하며, 나라가 존립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한국갤럽의 정기 여론조사 결과 5월 마지막주 윤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율은 21%(5월 28~30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01명을 대상으로 물은 결과)로 정부 출범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이번 영일만에서 드러난 신뢰의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윤 대통령의 지지율도 한 번 더 출렁일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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