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이대로 집에 가서는 안 된다. 밤샘 토론하는 모습을 보이고 20명씩 조를 짜서 로텐더를 지키든지 다 같이 모여 행동으로 표시해야 되지 않겠나.”
더불어민주당이 18개 상임위원회 중 11개 위원장을 단독 선출한 10일 밤, 5선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이 밤샘 농성을 이어가야 한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국민의힘 의원총회에서 추경호 원내대표가 “굳이 표결을 마칠 때까지 있는 게 실익이 있는지 모르겠다”며 다음날 의총을 기약한 것에 반대 의견을 낸 것이다. 나 의원의 발언에 일부 의원들은 ‘무슨 밤샘이냐’며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역대 ‘최약체 여당’이라는 평가를 받는 국민의힘이 22대 국회 개원 후 무능과 무기력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여권에서도 커지고 있다. “거야(巨野)에 맞서 정치력을 발휘해 난국을 타개할 전략도, 투지도 없는 ‘웰빙 귀족당 DNA가 더 심해졌다”는 것이다.
● “민주당이었으면 밤샘 투쟁”
국민의힘은 11일부터 사흘 연속 의총을 열고 있지만 매번 오전 10시에 시작해 점심식사를 앞두고 정오 전 칼같이 끝냈다. 13일 의총 말미엔 108명 의원 중 57명만이 의총장을 지켰다. 이를 지켜본 당 관계자는 “민주당이었다면 진작 국회 광장에 나가 밤샘 투쟁을 벌였을 텐데 절박함이 없는 ‘귀족당’의 한계”라고 말했다. 결국 의총에서 마땅한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여당은 국회 일정 보이콧과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로만 스스로 운신의 폭을 좁히고 있다.
국회 상임위원회 일정을 보이콧하는 대신 가동 중인 당 특위도 좌충우돌을 겪고 있다. 11일 에너지특위에선 회의가 시작된 뒤 지각 도착하는 의원도 있었다. 해당 특위 위원장의 첫 마디가 “지금 이제 오찬을 마치고 오시는 분들이 계셔서”였다.
당직자가 특위 활동과 관련해 전화하자 이를 받지 않고 “앞으론 의원에게 직접 전화하지 말고 보좌관을 통하라”며 보좌진을 통해 회신한 초선 의원도 도마 위에 올랐다. “왜 내가 말석이냐”며 의전에 훈수를 둔 초선 의원도 있었다고 한다.
좀처럼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국민의힘을 두고 여권 인사는 “잦은 지도부 교체로 인해 구심점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원내 지도부 출신 한 인사는 “비판만 하면 찍어 누르는 일들이 반복되니 의원들도 각자도생에 익숙해졌다”며 “이를 하나로 묶을 리더십을 찾기가 어렵다”고 짚었다.
● ‘관료-영남당’ 한계 드러나
“관료 및 공천만 받으면 당선되는 영남 텃밭 출신들로 구성된 원내지도부가 야당을 상대로 전투력이나 갈등 해결의 정치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무력감을 더한다”는 분석도 있다. 12일 의총에서 ‘대통령 거부권을 일상화하자’는 제안이 분출한 것도 원내 지도부의 전략 부족을 여실히 드러낸다는 지적이다. 한 중진 의원은 이날 의총에서 결국 “우리 내부에서 더 치열하게, 처절하게 싸우지 않고 대통령에게만 부담 넘기고 편하게 있는 것이 문제”라며 쓴소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원 구성 협상 결렬 후 여야 원내대표 회동은 13일까지 열리지 않고 있다.
과거 보수정당에 몸담았던 원로 및 정치인들은 원내 지도부의 상황 인식이 바로 설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한나라당 원내대표를 지낸 이재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통화에서 “여야 간 물밑 대화를 계속하면서 투쟁 수위를 조절해야 하는데 지금은 대화조차 없는 상황”이라며 “여당이 야당과의 협상에서 일부 양보할 생각을 해야 하는데 피해의식에만 갇혀 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여권 인사는 “과거 노무현 정부 탄핵 국면 이후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에 대해 여야가 어렵게 협상에 성공한 사례가 있다”면서 “계속 보이콧 해봤자 국민들은 관심 없으니 생산적인 투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병국 한국문화예술위원장은 “여당이 소수당이 됐지만, 총선으로 나타난 국민적 평가에 순응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은 야당이 다수당이 됐다고 탓하거나 국회 바깥으로 뛰쳐나갈 때가 아니다”라며 “교섭력을 끌어올려 최대 타협책을 찾는 게 원내지도부 몫”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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