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광산 ‘조선인 노동자’ 전시관, 강제동원-사과 문구 없어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7월 29일 03시 00분


세계유산 등재 日사도광산 르포
‘징용령으로 모집-관 알선’ 등은 인정
韓日정부 “한발씩 양보, 절반의 성공”

일본 니가타현 사도광산 앞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의 외관. 사도=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
일본 니가타현 사도광산 앞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의 외관. 사도=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

28일 오전 일본 니가타현 사도섬. 전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사도광산에서 2km, 자동차로 5분가량 떨어진 ‘아이카와(相川) 향토박물관’ 2층에 가로 5.2m, 세로 4.2m 크기의 작은 방이 처음 공개됐다.

‘조선반도(한반도의 일본식 표현) 출신자를 포함한 광산 노동자의 생활’이라는 제목이 걸린 전시관이다. 일제강점기 중 사도광산에 끌려온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전시 공간으로 일본 정부가 ‘전체 역사를 현장에 반영하겠다’며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내건 약속을 지키려 만들었다. 노동자 출신지를 안내하는 설명판에는 “1938년 4월 공포된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국민징용령으로 모집, 관 알선, 징용이 한반도에 도입됐다”며 조선총독부가 관여했다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모집, 관 알선, 징용은 일본 정부도 강제성을 인정한 동원 방식이다. 하지만 전시관 설명 어디에도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로 동원됐다는 것을 명확히 알게 해주는 ‘강제동원’ ‘강제노역’ 등의 문구는 없었다. 강제동원에 대한 일본 측의 사과 표현도 없었다.

사도광산 등재와 이에 따른 전체 역사 반영으로 한일 양국 정부는 과거사 대립을 피하고 한 발씩 양보하면서 각각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고 자평한다. 하지만 양국 인식의 골을 메우고 역사 화해를 하는 데는 한계를 보였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도광산에 ‘조선인 가혹한 노동’ 기록… 불법성은 인정 안해


韓日, 연초배급대장 실마리로 추적
80년만에 조선 청년들 이름 되찾아
조선인 위험노동 투입, 日의 5배 등
부당한 대우에 ‘강제’ 표현 없어 논란

박물관 내 전시 자료에 사도광산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기록 및 설명을 담은 부분이 있다. 유네스코는 27일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강제노역 현장인 
사도광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사도=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
박물관 내 전시 자료에 사도광산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기록 및 설명을 담은 부분이 있다. 유네스코는 27일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강제노역 현장인 사도광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사도=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
25번 김기순 1919년 2월 16일생. 26번 장재익 1918년 8월 1일생. 28번 최삼동 1916년 10월 12일생….

조선인 노동자 전시 공간 패널에 실린 전시 자료에는 한국인들의 이름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사도광산 기숙사에 살던 조선인 노동자에게 담배를 배급한 기록이 담긴 1944년 판 ‘연초 배급대장’ 명부다.

식민지 백성이라는 이유로 영문도 모른채 외딴섬 광산에 끌려온 20, 30대 꽃다운 조선의 젊은이들은 80년이 지나서야 전시관에 이름 석 자가 새겨졌다. 일본은 감추려 했고, 한국은 챙기지 못했던 일제강점기 아픈 과거사가 21.84㎡ 좁은 공간에 작은 흔적으로나마 전시됐다.

● 힘들고 가혹한 노동은 조선인 몫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일본 정부는 1946년 주요 사업장에 조선인 동원 명부를 제출하라는 통지를 내렸다. 하지만 사도광산을 운영했던 미쓰비시는 조선인 명부를 제출하지 않으며 강제동원을 은폐했다.

잊혀 가던 과거사 기록을 니가타현 향토 사학자들이 찾아 나섰다. 사도섬의 사도박물관에서 발견된 연초 배급대장이 그중 하나다. 한일 역사 연구자들은 이를 근거로 조선인 노동자 실체와 규모를 추정하며 과거사 조각을 맞춰 가기 시작했다.

전시 자료에는 혹독했던 당시 환경이 짐작되는 대목들이 보인다. 1943년 5월 사도광산 노동자는 일본인 709명, 조선인 584명으로 일본인이 더 많았다. 하지만 발파, 운반 등 노동 강도가 세고 위험한 작업에는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최대 5배가량 많이 투입됐다. 조선인은 월평균 28일 일했다. 계약 기간이 끝나도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계속 일을 시켰다. 출신지는 논산, 공주, 부여, 청양, 연기 등 충남에 집중됐다.

● ‘강제’ 표현 끝내 언급 안 해

역사 사실을 전하는 사도광산 현장의 사료 전시를 보면 누구라도 당시 조선인은 강제로 끌려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짐작할 수 있다. 2015년 하시마섬(군함도) 세계유산 등재 조건이었던 산업유산정보센터 설치가 군함도와 1000km 이상 떨어진 도쿄에 이뤄졌고 ‘차별은 없었다’는 왜곡된 내용으로 채워진 것과 대조적이다.

하지만 전시 공간 어디에도 ‘강제동원’ ‘강제노역’이라는 표현은 없다는 점은 앞으로도 논란이 예상된다. 일본 정부는 2015년 하시마섬 세계유산 등재 당시 강제노역(forced to work)을 시킨 것을 인정했지만 이번에는 끝내 언급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모집, 관 알선, 징용의 강제성은 인정하지만, 국제법이 규정한 ‘강제노동’은 아니었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는다.

전시장에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해 5월 한일 정상회담에서 “혹독한 환경에서 많은 분들이 매우 고통스럽고 슬픈 일을 겪으셨다는 것에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고 말한 발언이 설명판으로 전시됐다. 하지만 사도광산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사과는 물론이고 1990년 아키히토 일왕 유감 표명(“통석의 염을 금할 길이 없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식민지 지배로 한국민에게 고통을 안긴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 사죄를 한다”) 등 과거 사과 표현 전시도 없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일제강점기 한국인에게 가혹했던 역사를 담은 설명판을 현장에 설치하는 성과를 거뒀고, 일본은 강제동원 인정 및 추가 사과를 하지 않으면서 세계유산 등재라는 실속을 챙겼다는 평가가 나온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일본이 추도식을 비롯한 후속 조치 이행에 있어서도 우리 정부와 긴밀히 소통하면서 진정성 있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사도광산#조선인#가혹한 노동#유네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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