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18일 전당대회에서 85.40%의 지지를 얻어 당 대표 연임에 성공했습니다. 2년 전 자신이 세운 기록 77.77%보다도 7.63%포인트 오른 수치입니다. 과거의 자신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셈입니다. 다시 한번 민주당 수장이 된 이 대표는 지난달 먼저 국민의힘 대표가 된 한동훈 대표와 4월 총선에 이어 두 번째 라운드를 치르게 됐습니다.
6개월도 안 돼서 다시 양당의 수장으로 등판한 두 사람을 두고 정치권에선 우려도 적지 않습니다. 총선을 치르면서 “서로를 심판하겠다”며 말 그대로 갈 데까지 갔던 두 사람이 과연 여야 협치를 이끌 수 있겠느냐는 거죠.
“범죄자들은 이 중요한 정치에서 치워버려야 한다.” (3월 28일 서울 유세) “김준혁 후보의 쓰레기 같은 말이 우리 사회에서 용인할 수 있는 말이냐. 그런데 이재명 대표는 이분도 정리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런지 아느냐. 자기는 더하다.” (3월 30일 경기 부천시 지원 유세) “이재명 대표는 본인도 인정하다시피 ‘일베’ 출신이다.” (4월 3일 강원 춘천 유세) -한동훈 대표 주요 유세 발언
“국민의 주권을 위임받겠다고 하는 정상적인 정치 집단이 하는 일이 아니라 사기 집단이 하는 것” (2월 2일 최고위원회의) “썩은 물 공천, 고인 물 공천을 항의조차 제대로 못 하게 하는, 언론의 입을 틀어막는 ‘입틀막 공천’을 하고 있는 자신들을 되돌아보길 바란다.”(3월 4일 최고위원회의) “동네 강아지도 잘하면 칭찬하고 못하면 혼내야 바른 강아지가 된다.” (4월 3일 경남 창원 의창 유세) -이재명 대표 주요 유세 발언
흡사 전쟁 같았던 총선 후유증 속에 22대 국회는 개원 이후 지금까지 민생법안은 아직 단 한 건도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야당은 릴레이 청문회 정국과 입법 폭주를 이어가고 있고 여당과 대통령실은 각각 필리버스터와 재의요구권(거부권)으로 맞서는 무의미한 도돌이표만 반복 중입니다. 게다가 한 대표는 친윤계 견제에도 60% 넘는 지지를 받았고, 이 대표도 85%가 넘는 역대 최고 지지율로 당선됐죠. 각각 자기 진영 지지층에 충성할 수밖에 없는 숫자입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두 사람은 총선 전엔 국회 본회의장에서도 두 차례 맞붙었죠. 지난해 2월과 9월 한 대표는 당시 법무부 장관 자격으로 본회의장 연단에 올라 이재명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을 직접 설명하며 가결시켜 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당시의 앙금이 총선 과정을 거치면서 더 악화됐을 것으로 해석됩니다.
다만 두 사람이 나란히 함께 다시 당 대표가 된 데에 대한 기대감도 분명히 공존합니다. 양 진영을 대표하는 유력 대권주자들인 만큼 차기 대선까지 남은 2년 반 동안 정책 비전과 리더십으로 경쟁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기대감이죠.
한 중진 의원은 “총선 때처럼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으로 대선까지 가면 둘 다 필패”라며 “오히려 당보다도 두 대표가 먼저 출구전략을 찾는 데 필사적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진짜 성과로 말해야 하는 두 사람이 제일 마음이 급할 거라는 겁니다.
실제 이 대표는 18일 대표직 수락 연설에서 한 대표에게 여야 대표 회담을 제안하며 “시급한 현안들을 격의 없이 의논하자”고 했습니다. 바로 다음날 한 대표도 “조속한 시일 내에 만나자”고 화답하면서 두 사람은 25일 오후 3시 국회에서 대표 회담을 하기로 했습니다. 회담 제안이 나온지 하루 만에 날짜까지 확정 지은 ‘속도전’입니다.
이 대표는 구체적으로는 채상병 특검법과 25만 원 전국민 지원금, 지구당 부활 등을 의제로 제안했습니다. 협치 가능성이 있는 실마리들이라고 판단한 듯 합니다.
이 대표는 “무엇보다 가장 큰 쟁점인 채 해병 특검법에 대해 허심탄회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한동훈 대표님도 진상규명을 반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민주당이 발의한 특검안이 최선이라 생각하지만, 한 대표님도 제3자 특검 추천안을 제안한 바 있으니, 특검 도입을 전제로 실체 규명을 위한 더 좋은 안이 있는지 열린 논의를 기대합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앞서 국민의힘 전당대회 과정에서 제3자 추천 방식의 특검법을 꺼내든 한 대표의 제안을 받겠다는 거죠. 그동안은 이에 대해 반대 입장이었는데, 다시 가능성을 열어둔 겁니다.
그는 ‘왜 생각을 바꾼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생각을 바꾼 건 아니다”라면서도 “다만 의회구조의 한계도 있기 때문에, 그 부분까지 포함해서 같이 논의하자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정치라는 게 내 뜻대로 다 하면 가장 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게 본질”이라며 “일방적으로 강행해서 관철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합리적 수준의 조정도 할 수 있는 게 정치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한 대표 측도 “내부 논의를 통해서 여러 가지 의견을 수렴해 가장 합리적인 방안을 찾겠다”고 반응하더군요. 이대로만 논의가 이어져도 놀라운 진전이 될 듯합니다.
두 대표는 금융투자소득세에 보완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례적으로 의견 일치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대표는 공제 한도를 현행 연 5000만 원에서 1억 원으로 늘리자는 대안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한 대표도 이 대표 연임 확정 직후 낸 축하 메시지에서 “금투세 폐지 등 시급한 민생 현안에 대해 조만간 뵙고 말씀 나누겠다”고 했고요.
21대 국회에서 마무리 짓지 못한 연금 개혁도 대화 복원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국민의힘은 민주당에 이달 말까지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요구한 상태죠. 민주당은 공식적으로는 “일단 정부 안부터 내라”고 맞서고 있지만, 민주당 원내 관계자는 “새 지도부가 꾸려지면 전향적인 판단이 가능할 것이라 본다”고 귀띔하더군요. ‘미래’와 ‘민생’을 키워드로 한다면 여야 대표가 충분히 대화를 시작해 볼 수 있는 분위기입니다.
마침 두 대표가 18일 비슷한 시각 서로 다른 장소에서 했던 발언들이 이런 기대가 더 들게 합니다.
“당장의 저희가 큰 선거를 목전에 두고 있지 않다는 점이야말로 진짜 민생 정책을 실천하는 기회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야당의) 공세에 대해서 단호하게 맞서야 하지만 이제 국민들께서 우리 정부 여당을 평가하시는 진짜 전장은 민생 정책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부·여당의 강점은 행정력과 정치가 결합됐을 때 나올 수 있는 시너지입니다. 민생에서 그 시너지를 발휘하고 우리 실력을 보여드려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한동훈 대표, 고위당정협의회에서)
“‘긴급한 국가과제는 산적한데, 정치는 대체 뭘 하느냐?’ 국민께서 묻고 계십니다. 정치의 가장 큰 책무는 바로 국민의 삶을 보살피고, 희망과 비전을 만드는 것입니다.” “과학기술발전에 따른 고도의 생산력이 노동소득과 소비 감소로 경기침체를 구조화하고, 극단적 양극화로 사회갈등이 격화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중략) 이 모든 것이 정치가 할 일입니다. 정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재명 대표, 당 대표 수락 연설에서)
최근 만나는 사람마다 “대체 한국 정치에 답이 있는거냐”고 많이들 물어봅니다. 그럴 때마다 “정말 모르겠다”고 답하곤 했습니다. 말 그대로 ‘노답’인 정치에 이제 출구전략이 필요한 때입니다. 한동훈, 이재명 두 대표의 2라운드가 정치판이 변화하는 첫 시작이 되길 기대합니다. 너무 나이브한 생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극과 극끼리는 또 통한다 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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