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밀수꾼 → 월1000만 원 버는 사장님…김상진 씨의 ‘우여곡절’ 인생 이야기 [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9월 8일 08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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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7월에 진행된 북한이탈주민정착사례발표대회에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김상진 씨.
올해 7월에 진행된 북한이탈주민정착사례발표대회에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김상진 씨.
올해 43세인 김상진 씨의 삶은 ‘산전수전’이나 ‘우여곡절’이란 몇 글자로 다 담기엔 많이 모자란다. 그만큼 굴곡진 삶을 살았다.

소년 밀수꾼으로 시작해 밀수꾼을 잡는 보안원(경찰)이 됐다가 아동유괴범으로 몰려 처형장에 끌려갈 위기까지 경험했다. 이를 모면하고자 목숨을 건 탈북을 선택했고, 현재는 한국에서 월 수입 1000만 원을 올리는 어엿한 사장님이 됐다.

그가 북한에서 소년 밀수꾼이 된 것은 15살로, 밀수꾼에게 고용된 짐꾼이 시작이었다. 2년 뒤 그는 알아주는 밀수꾼으로서 중앙에서 밀수 단속 검열단이 나올 때면 도망치는 신세가 됐다. 간혹 보안원들에게 잡히면 죽지 않을만큼 매를 맞았다. 크면 꼭 보안원이 되야겠다는 다짐을 그 때마다 했다.

결국 28살이 되던 해 보안서 소위가 돼 밀수꾼 단속을 할 수 있는 지위를 얻었고 33살에 대위로 승진할 정도로 잘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외사촌 누나의 딸을 탈북시키는데 관여한 사실이 발각되면서 하루아침에 ‘아동유괴범’으로 몰렸다.

당시 아동유괴범은 체포 즉시 무조건 총살형에 처해지는 중범죄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무조건 탈북을 감행했다. 그 과정에서 허리를 크게 다쳤다. 그래서 지금도 무릎 보호대를 차고 꿇어앉아 일을 해야 한다.

그렇게 시작한 한국 생활.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다. 정식 출근시간이 오전 8시인데도 2시간 먼저 나갔다. 쓰레기통을 비우고, 사무실 청소를 도맡다시피 했다. 그런 성실함은 통했고, 한국 정착 10년째인 2024년 월수입만 1000만 원이 넘는 사장님으로 변신했다.

북한에서 천당과 지옥을 오갔고, 탈북한 이후에도 끝모를 고통에 시달리면서 결코 포기하지 않았기에 지금의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는 김 씨. 그의 드라마와 같던 탈북과정과 남한 정착 기를 정리해본다.

울산의 한 공장 구내에서 지계차를 운전하고 있는 김상진 씨


● 15세 소년 밀수꾼
김 씨는 1981년 함경북도 회령의 유선노동자구에서 태어났다. 두만강 바로 옆에 있는 유선은 탈북민이 가장 많은 지역으로 통한다. 한국에서 동창회를 하면 유선중학교 졸업생과 선생의 절반은 볼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김 씨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현지 주둔 교도여단 참모(대위)였다. 아버지는 그가 6살 때 제대했고, 가족은 양강도 보천군으로 이주했다. 군관 제대군인이라며 당국은 아버지를 보천군 농촌경영위원회 지도원으로 임명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김 씨의 가족은 평범하지만 부족하지 않은 생활을 누렸다.

그런데 아버지가 1994년 6월 세상을 떠났다. 이후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김 씨와 한 살 많은 형을 먹여 살릴 책임이 심장병을 앓던 어머니 어깨에 지워졌다. 설상가상으로 그때부터 고난의 행군이 시작돼 배급도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보안서에서 근무하던 오빠들의 도움으로 도 소재지인 혜산에서 도 보안국 정치학교 이발사로 취직했다. 도 보안국 소속이라 이발사에게도 배급이 나왔다. 하지만 어머니의 병이 발목을 잡았다. 어렵게 얻은 일자리에서 6개월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김 씨는 잘 때마다 어머니 손을 꼭 잡고 잤다. 어머니가 그의 손을 꽉 잡을 때마다 잠에서 깨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 때마다 어머니는 거의 정신을 잃고 숨을 쉬지 못했다.

체육을 잘하던 형이 도 체육단 축구 양성조에 뽑히면서 하루 800g의 배급을 받아왔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세 식구가 살기 어려웠다. 먹성이 한창이었을 형은 죽만 먹고 축구를 했다.

어린 김 씨는 학교도 가지 않고 산에 올랐다. 나무뿌리를 캐 장마당에 팔았다. 그렇게 해도 세식구가 먹고 살기는 빠듯했다.

이때 등짐에 나무뿌리를 메고 다니던 그에게 솔깃한 제안이 들어왔다. 밀수꾼의 짐을 중국에 날라다만 주면 돈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나이 15살 때였다.

보안서 소속 경비분대장 시절이던 2003년 어머니와 함께 사진을 찍은 김상진 씨. 22세때 모습이다.
보안서 소속 경비분대장 시절이던 2003년 어머니와 함께 사진을 찍은 김상진 씨. 22세때 모습이다.


● “보안원이 되리라”
그는 닥치는 대로 짐을 날랐다. 구리나 니켈 같은 금속부터 약초, 잣 등과 같은 식물까지 종류를 가리지 않고 메고, 산을 몇 개씩 넘었다. 등에 멘 무게만큼 보상이 따랐기 때문이다.

밀수꾼은 국경경비대와 짜고 새벽을 이용해 압록강의 특정지역으로 짐을 넘겼다. 구리 1㎏을 넘기면 담배 2보루를 받았다. 수익으로 치면 본전의 두 배 정도였다.

밀수는 단속하는 자와 단속을 피하려는 자 간에 펼쳐지는 치열한 전쟁터다. 보안원들은 밀수꾼이 다닐만한 산길에 잠복하고 있다가 닥치는 대로 물건을 빼앗었다. 밀수꾼들은 산을 넘나들 때마다 항상 보안원이 숨어있는지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보안원들이 밀수꾼 잡기에 적극적으로 나선 배경에도 돈벌이가 깔려 있다. 그들이 밀수꾼을 잡으면 물건을 반반으로 나누었다. 모두 뺐으면 체포해 조서로 증거를 남겨야 한다. 반면 절반만 빼앗으면 절반은 자기가 갖고, 나머지 절반은 선심 쓰듯 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처음부터 물건을 뺏기보다는 겁주기 차원의 처벌을 먼저 했다. 특히 김 씨처럼 어린 학생을 만나면 무자비한 구타로 반쯤 죽여 놓고, 이후 선심을 쓰듯 물건을 챙겼다. 그런 일을 당할 때마다 김 씨는 “크면 꼭 보안원이 돼 이 수모에서 벗어나겠다”고 이를 갈았다.

김 씨는 악착같이 일했다. 먹고 살 길이 그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2년 간 열심히 밀수꾼을 따라다닌 결과 독립을 할 수 있게 됐다. 경비대 분대장을 포섭하고, 짐꾼들을 고용한 뒤 독자적인 밀수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한창 때에는 하루 밤에 TV 20대를 압록강을 통해 들여왔다. 당시 그는 ‘무사통행증’으로 불렸다. 단속 위험이 있는 곳마다 뇌물을 뿌려 매수한 덕에 체포될 일이 없다는 뜻에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다만 예외도 있었다. 중앙에서 ‘비사회주의 단속 그루빠(중앙검열단)’가 나올 때다. 국경도시 혜산에는 1년에 두 번 정도 그루빠가 나왔다. 한 번 나오면 3개월에서 6개월 동안 현지에 머문다. 인민반을 훑으며 탐문하다 보면 “저 집이 밀수로 돈을 번다”고 고발하는 ‘배가 아팠던’ 사람들이 반드시 나오기 때문이다.

체포되면 처벌을 피할 수 없다. 검열대가 뜰 때마다 김 씨는 멀리 외진 곳으로 도망쳤다. 행정력이 마비된 때라 멀리 숨으면 몇 시간씩 차를 타고 잡으려 다녀야 하는데, 당시로선 그럴 여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혜산에선 매년 본보기로 공개 총살하는 총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밀수꾼과 도망자의 삶을 이어가느라 김 씨는 학교 다닐 새가 없었다. 당시 중학교 6학년까지 다녀야만 졸업이 가능했다. 그런데 그의 학력은 중학교 1학년에 머물렀다. 그래도 걱정은 하지 않았다. 뇌물을 주면 졸업증은 얼마든지 받을 수 있었다.

김 씨는 밀수를 좀 더 하기 위해 졸업시기를 늦춰보기로 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바람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유급을 2년 이상 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게다가 미성년자일 때와는 달리 성인이 돼 밀수하다 잡히면 처벌 수위는 훨씬 높아진다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군에 가야 하는 시기가 닥치기도 했다.

다행스러운 점은 4년 여의 동안 했던 그의 사업으로 집안 형편이 나아진 것이다. 우선 단칸방 짜리 아파트를 구입해 내 집을 마련했다. 어머니 병을 고칠 수 있었다.

그는 중국에 갈 때마다 거래 상대방에게 심장병 약을 구해달라고 부탁하는 일을 빼먹지 않았다. 그렇게 구해온 약을 1년 반쯤 복용한 어머니는 눈에 띄게 병세가 좋아졌고, 졸도하는 일도 없어졌다.

병을 털고 일어난 어머니는 번듯한 일자리도 얻었다. 아들이 마련해준 돈으로 뇌물을 써서 도 보안국 정치학교 식당책임자로 취직한 것이다. 먹을 것을 주무르게 되자 더 이상 밥을 굶을 걱정은 하지 않게 됐다.

2016년 4월 울산에서 결혼식을 올리기 전 김 씨 모습.
2016년 4월 울산에서 결혼식을 올리기 전 김 씨 모습.


● 보안서 대위로 승진하다
북한 군사동원부(병무청)에는 ‘안전부 초모’라는 병과가 있다. 보안서에서 군에 갈 학교 졸업생을 뽑아 일반 병사로 근무하게 하는 것이다. 한국의 의무경찰과 비슷한 제도이다. 다만 북한의 안전부 초모는 권력이나 돈이 있는 집 자식 정도만이 갈 수 있는 자리라는 게 다르다.

김 씨는 안전부 초모가 되고 싶었다. 어렵사리 군사동원부 간부를 만나니 휘발유 200리터를 요구했다. 중국돈으로 600위안, 쌀로 환산하면 300㎏에 해당하는 큰 돈이었다.

이런 정도로 많은 뇌물을 준다고 해도 출신성분 심사에서 통과하지 못하면 안전부 초모에 응모할 수도 없다. 다행히 군관의 아들이었던 김 씨는 북한에서 ‘기본군중’에 속했다.

김 씨는 군복을 입기 닷새 전까지 밀수를 위해 중국 국경을 넘었다. 마지막 밀수로 녹음기 5대와 쌀 50㎏을 마련해 집에 숨겨둔 뒤 함경북도 보안국 정치학교로 갔다. 사실 그는 양강도에서 근무하고 싶었다. 밀수를 계속하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거주하던 지역에서 군 복무를 하지 못하게 하는 북한군 규정이었다. 하지만 이 마저도 뇌물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정치학교에서 3개월 간의 교육을 받는 동안 어머니가 뇌물을 썼고, 그는 혜산에서 승용차로 2시간반 정도 떨어진 양강도 풍서군 보안서로 발령을 받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2년 넘게 계호원(수감자 경비원)으로 근무했다. 형기를 받은 사람을 함흥교화소로 이송할 때 김 씨는 구리와 같은 단속 물품을 날라 돈을 벌었다. 범인 호송칸은 검열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호원을 하면서 벌어들인 돈으로 그는 군대 내에서 승진을 거듭했다. 뇌물로 상납하니 보안서 경비분대장으로 승진했다. 노동당에 입당하기 위해 삼지연건설장 굴 뚫기 돌격대에 자원한 뒤 6개월 정도 지나니 당원증이 나왔다.

이어 입대 6년 만에 양강도 보안서 정치학교에 입학해 집에서 통학도 할 수 있게 됐다. 당시 학교 식당책임자는 그의 어머니였다. 이때 정치학교에선 ‘호남쌀’이라고 부르는 한국 지원 쌀을 먹었다.

2년의 군관 교육 과정을 거친 그는 2008년 졸업하고, 2009년 소위로 양강도 보안서 주민등록부 부원으로 배치를 받았다. 형님도 쌀 200㎏을 뇌물로 쓰고 같은 학교에 입학했고, 먼저 보안원이 됐다.

주민등록과는 뇌물을 받을 일이 없어 보안서 내에서 제일 힘이 없는 사람이 가는 곳으로 통한다. 과장 정도가 되면 주민등록문건을 조작해 중국에 친척이 있다고 만들어주고, 건당 3000위안 정도의 뇌물을 받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일반 부원이라면 문건 수정은 엄두도 낼 수 없다. 이곳에서 김 씨는 대위로 승진한 2014년까지 6년 동안 ‘주민등록대장(주민문건)’을 관리했다.

결혼 직후  아내와 함께 신혼여행을 떠난 김 씨.
결혼 직후 아내와 함께 신혼여행을 떠난 김 씨.


● 북한 주민등록제도의 비밀
북한의 악명 높은 출신성분 제도는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북한주민들은 자기와 관련된 서류를 볼 수 없다. 이 문건들이 극비 서류로 분류돼 관리되고 있어서다. 이런 이유로 북한주민등록 서류를 관리해온 김 씨의 증언은 여러 모로 귀중한 정보다.

김 씨에 따르면 혜산시 보안서에는 관내 10만 여명의 주민에 대한 문건들이 보관돼 있다. 주민등록문건은 가로와 세로가 각각 15㎝, 25㎝ 크기인 100쪽 분량의 책에 할아버지부터 시작해 8촌까지 내용이 수기로 족보처럼 기록돼 있다.

예컨대 조부 OOO은 XX에서 태어나 △△에서 살았고 토지를 얼마나 보유했으며 소는 몇 마리를 키웠는지 등에 대한 기록이 정리돼 있다. 심지어 일제 때 순사에게 밥을 해주었다는 등 별치 않은 과거 행적도 담겨 있다.

북한의 일반 가정에서 손자 대로 내려가면 할아버지가 무엇을 했는지 알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왜 자신이 평생 농민이나 탄광 노동자로 살아야 하고, 승진도 할 수 없는지 알 수가 없다. 오로지 주민등록문건에만 그 이유가 남아 있다.

문건의 첫 페이지엔 사진과 생년월일, 출신성분, 사회성분 등이 기록돼 있다. 출신성분 아래에 다시 종교인, 교화출소자 등과 같은 수십 개 세부 분류가 적혀 있다. 친척 중에 누가 훈장을 받았는지 등의 기록도 자세히 적혀 있다. 각 페이지 맨 아래엔 확인자(특정인의 경력에 대해 진술한 사람) 다섯 명과 검증을 책임진 요해지도원(보안서 주민등록지도원)까지 손도장이 6개가 찍혀 있다.

흥미로운 점은 문건엔 한국 친척의 행적까지 기록됐다는 것이다. 가령 ‘사촌형 아무개는 괴뢰군 연대장을 하다가 몇 년에 전역해 몇 년에 미국 어느 도시에 가족과 함께 이민을 갔다’는 식이다. 어떻게 이런 것까지 파악하고 있는지 김 씨도 놀랄 정도였다.

다만 한국 가족의 행적은 1990년 이전에만 국한돼 있고 1990년 이후의 기록은 수많은 서류에서도 보지 못했다. 1990년 이전까진 북한이 간첩을 통해 남쪽 주민등록 시스템을 자유롭게 봤지만 그 이후엔 정보망을 잃은 것이라 추정된다.

출신성분 중에 ‘미해명’이란 분류도 있다. “가족 친척 중 누가 6.25전쟁 때 폭격에 죽었다는데 시신을 찾지 못했다”는 식이다. 미해명은 월남자 가족보다 더 출신성분이 안 좋은 것으로 평가한다. 월남했다면 행적이라도 밝혀졌지만, 미해명은 살아서 뭘 하고 있을지 알지 못해 더 두렵다는 의미다.

6.25전쟁 때 이런 ‘미해명자’가 엄청 많이 생겼는데, 이들은 북한 체제에선 승진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북한 체제를 위해 아무리 목숨 걸고 싸워도 시체는 남겨야 3대가 안전한 것이다.

북한에는 출신성분 외에 또 사회성분이라는 것도 있다. 사회성분은 노동자, 군인, 사무원, 농민의 4가지로 분류가 되는데 각자 노동당, 직업동맹, 농업근로자동맹 등에 가입할 때의 직업이 사회성분으로 규정된다. 사회성분이 농민이면 평생 농민으로 살아야 한다.

출신성분이 가로의 날실이라면 사회성분은 세로의 씨실에 해당한다. 북한에서 태어나면 가로와 세로로 짜여진 출신 분류의 바둑판 위에 떨어지는 것과 같다. 태어날 때 바둑판 위에 정해진 자리, 즉 타고난 운명은 바꾸기 거의 불가능하다.

주민등록문건은 매년 12월에 한번씩 업데이트한다. 가령 6촌 OOO이 승진했다거나 8촌 XXX가 훈장을 받았다는 식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변동이 없으면 놔두지만, 만약 신고가 새로 들어오거나 이상한 점이 발견되면 주민등록지도원이 평북 구성으로 출장을 간다.

구성의 비밀갱도엔 주민등록문건의 원본이 보관돼 있다. 이 원본들은 하도 오래 보관돼 누렇게 변색이 돼 있다. 여기에는 토지문서나 과거 이웃들의 진술 따위도 보관돼 있다.

주민등록문건은 보안서에만 보관돼 있다. 물론 보위부에도 요시찰 인물들에 대한 문건을 따로 관리하지만, 전체 주민에 대한 문건은 없다. 보위부에서 열람이 필요할 때는 열람 의뢰서를 받아 보안서에 와서 볼 수 있다.

보위부는 어느 부서나 열람이 가능하지만, 이외 직책은 열람 자격이 제한된다. 도당 간부 인사 관련자, 노동당 5과 지도원, 군사동원부 초모지도원 등만 열람권을 갖는다. 출신성분이 좋아야 김정은 호위병이나 별장 관리사가 될 수 있고, 비행사나 잠수함 승조원도 될 수 있다.

김 씨는 문건을 관리하는 신분이지만, 정작 자기 문건을 볼 수는 없었다. 당사자가 조작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다른데 보관해두고 과장만이 볼 수가 있었다.

김 씨가 탈북할 때까지 주민등록문건은 전국적인 전산화가 되지 않았다. 중앙과 도까지는 전산 확인이 가능하지만, 시군에는 전산 시스템이 도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름을 들고 오면 ‘속견표’라고 불리는 ‘가나다‘ 순으로 이름이 정리된 표를 먼저 보고, 해당 인물의 문건이 어디 있는지 다시 찾아야 했다.

청와대 개방 직후 첫째와 함께 단란한 한 때를 보내고 있는 김 씨.
청와대 개방 직후 첫째와 함께 단란한 한 때를 보내고 있는 김 씨.


● “누나, 남조선에 도망가요.”
혜산 보안서엔 600~700명의 보안원이 있었다. 그중에서 제일 뇌물을 받기 어려운 자리가 주민등록과였다. 북한에서 뇌물을 쓰고 자기 출신성분을 조작하려는 간이 큰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고치기도 어렵지만 발각되면 사형에 해당되는 중죄이다.

그래서 김 씨는 먹고 살기 위해 다른 일을 해야 했다. 정치학교 친구들이 근무하는 단속초소를 많이 활용했다. 밀수통로인 혜산엔 전국에서 많은 밀수품들이 몰려왔다. 김 씨는 차로 물건을 나르는 사람을 소개받아 초소를 통과시키는 대가를 받은 뒤 초소 친구들과 나누었다.

때로는 한국에 간 탈북민 가족을 전화로 연결시켜주고 송금액의 10%를 받기도 했다. 단속해야 할 보안원이 송금브로커 역할도 한 것이다. 보안원 집에는 수색이 들어오지 않아 휴대전화를 보관하기가 용의했다. 다른 보안원들도 먹고 사는 방법은 다들 비슷했다.

그러다 사고가 터졌다. 외삼촌이 삼지연에서 인민보안성 답사관리소 부소장으로 있었는데, 외사촌 누나인 그의 딸이 2011년 인신매매범으로 체포된 것이다. 죄명은 거창하지만 실상은 그닥 큰 일도 아니었다. 국경 인근에서 두부장사 술장사를 하다가 중국으로 넘겨 보내달라고 사정하는 여성 3명을 도강하게 도와주고 돈을 받은 게 적발된 것이다.

북중 국경에선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그럼에도 운이 나빠 체포되면 인신매매범이 돼 교화소로 끌려가야 한다. 외사촌 누나도 넘겨 보낸 여성 한 명이 북송된 뒤 압록강을 어떤 식으로 넘었는지 자백하는 과정에서 관여한 사실이 들통나 체포됐다.

보안서로 끌려가 조사를 받던 그는 밤에 천을 찢어 밧줄을 만든 뒤 3층에서 탈출했고, 그 길로 중국으로 도망을 갔다. 북한에서 시집간 여성은 ‘출가외인’으로 간주해 가족들의 출신성분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외사촌의 탈북은 향후 출세에 적잖은 영향력을 미칠 만한 사안이었다.

중국에 건너간 외사촌은 김 씨에게 전화를 해왔다. 어쩔 수 없이 도망을 치게 돼 영향을 받게 될 가족과 친척들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이었다. 김 씨는 안심하라는 뜻에서 “이왕 그렇게 됐으니 우리 걱정은 말고, 중국에 있다 잡혀 북에 다시 끌려오지 말고 한국에 가서 안전하게 있으라”고 말했다.

외사촌은 그의 말대로 한국에 무사히 도착했다. 돈도 보냈다. 외사촌의 부탁대로 그는 북에 남은 자식들에게 전달해주었다. 2014년 9월 외사촌 누나는 그에게 다른 부탁을 해왔다. 탈북 비용을 준비했으니, 자식들을 중국으로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김 씨는 외사촌 누나의 집으로 갔다. 그새 누나의 남편은 재혼을 했고, 아이들은 할머니 품에서 크고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가 아이들을 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이들을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아이들을 있어야 한국에 간 며느리가 보내준 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나의 부탁을 외면할 수 없었던 김 씨는 오토바이를 이용해 학교를 마치고 나오는 여자 조카를 혜산으로 데려온 뒤 압록강을 넘게 했다. 그런 식으로 16세 된 아들도 보낼 계획이었다.

지난해 둘째와 함께 찍은 사진.
지난해 둘째와 함께 찍은 사진.


● 졸지에 아동유괴범이 되다
그런데 일이 터졌다. 3일쯤 지났을 때 같은 보안서에서 근무하고 있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가 아동유괴범으로 찍혔으니 즉시 도망을 가 숨어라. 잡히면 무조건 총살이다.” 조카를 데리고 올 때 타고 다닌 오토바이를 본 누군가가 신고를 한 것이었다.

당시엔 공교롭게도 “어린이를 외국에 유괴하는 자들을 무조건 처형하라”는 김정은이 방침이 하달된 때였다. 2013년 라오스에서 탈북청소년 9명이 북한으로 강제 북송된 사건이 있었는데, 그 조사 결과를 보고받은 김정은이 고아나 꽃제비들을 중국으로 보내지 못하게 엄명을 내린 것이다.

전화를 받은 김 씨는 그 길로 도망가 산에 숨었다. 조카를 압록강으로 넘겨 보낼 때 도와준 사람들에게도 연락해 즉시 숨으라고 했다.

체포조가 샅샅이 훑을 게 뻔해서 갈 곳도 없었다. 생각해낸 것이 산에서 화전을 일구는 집이었다. 그 집 남편은 먼저 한국으로 갔는데, 산에 남은 아내가 6살, 1살 된 두 딸을 키우며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김 씨는 예전에 그 남편이 보낸 돈을 아내에게 전달해준 인연이 있었다.

그는 그곳 옥수수밭에 숨어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시 형은 보안서 소좌 계급을 달고 혜산에 있는 김일성, 김정일 동상 경비대 부대장을 하고 있었다.

형에게 상황을 설명한 뒤 “형이 가지 말라면 자수하겠다”고 하자, 형은 “자수해도 처형될 것이 뻔하고, 그럼 내가 군복을 벗어야 하는 결말은 똑같다. 살길을 찾아 가라”고 말했다.

김 씨는 한국에 사는 화전민의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당신의 부인과 아이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가면 한국으로 가는 선을 연결해줄 수 있겠냐”고 묻자, 남편은 선뜻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김 씨는 즉시 계획을 짰다. 강을 넘는 날짜를 추석 연휴 기간인 9월 24일로 정했다. 명절엔 다들 술을 마셔 경계가 소홀하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았다. 당일 초저녁 김 씨, 함께 도망친 사람 두 명, 화전민 가족 3명 등 모두 6명이 압록강을 넘었다. 무사히 중국에 도착해 다시 화전민 남편에게 전화를 했고, 장백으로 사람을 보내겠다는 말이 수화기를 타고 날아들었다.

이들은 통화 내용대로 도로에 나뭇가지를 깔아둔 채 인근 산으로 숨었다. 마중 나올 차가 멈출 위치 표시였다. 그런데 안내자가 오기 전에 중국 변방경비대 순찰차가 먼저 나타났다. 변방대도 나뭇가지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나뭇가지 앞에서 차를 세운 중국 군인들이 전짓불을 켜고 주변 수색을 시작했다. 혼비백산한 일행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김 씨는 한 살짜리 화전민 딸을 안고 냅다 달렸다.

캄캄한 암흑 속을 한동안 달리다 갑자기 몸뚱이가 허공을 나는 기분이 들었다. 높이가 7~8m나 되는 낭떠러지를 만난 것이었다. 그는 떨어지는 와중에도 아이를 감싸며 몸을 비틀었다.

그렇게 땅에 떨어졌을 때 온 몸이 부셔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떨어진 곳은 압록강과 붙은 벼랑이었다. 바닥에는 뾰족한 돌들이 깔려 있었다. 아이는 다행히 무사했다. 등이 뜨끈뜨끈했다. 하지만 아픈 걸 느낄 새 없이 다시 내달렸다.

그렇게 일행은 각자 도망을 쳐 숨었다가 중국군의 전짓불이 사라졌을 때 다시 모였다. 안내자가 온 것은 새벽 4시였다. 안가에 도착하고 나서 긴장이 풀어지니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몰려왔다. 옷을 벗으니 등에 4~5㎝ 깊이로 돌에 박힌 18곳의 상처가 벌겋게 부풀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게 평생 그를 괴롭히는 상처가 될 줄은 몰랐다. 한국으로 보내줄 선이 연결될 때까지 장백에 숨어있는 동안 상처난 살이 썩기 시작했다. 병원에 갈 수도 없어 항생제는 처방받지 못하고 진통제만 20알씩 먹었다. 주사기로 고름을 뽑을 땐 썩은 냄새가 방안에 가득 찼다.

그 몸 상태로 다시 태국을 경유해 마침내 10월 30일 한국에 도착했다. 압록강을 넘은지 한 달 하고도 일주일이 더 걸렸다. 비행기에 탈 때도 온 몸에 붕대를 감고 남의 부축을 받아야만 했다.

한국에 도착해 치료를 받았지만, 적정 치료시기를 놓쳤다는 진단을 받았다. 덕분에 지금도 허리를 제대로 쓰지 못한다. 양반다리로 바닥에 앉는 일도 불가능하다.

2007년 인민보안서 정치학교 학생 시절 어머니와 형(왼쪽)과 함께 찍은 사진.
2007년 인민보안서 정치학교 학생 시절 어머니와 형(왼쪽)과 함께 찍은 사진.


● 어머니와 형님의 운명
한국에 도착했을 때 어디에서 살지를 정하는 문제는 모든 탈북민의 큰 고민거리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김 씨는 이를 쉽게 해결했다. 조사관에게 “남자 일자리가 제일 많은 곳이 어딘가”라고 물었던 것. 답은 “울산”이었다.

대답대로 그는 2015년 3월 하나원을 나와 곧바로 울산에 자리를 잡았다. 빨리 돈을 벌어 자신 때문에 위험에 처한 형님과 어머니를 탈북시키는 일을 목표로 정했다.

울산에 도착한 날 바로 형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님, 한국에 무사히 도착했어요. 제가 여기에 온 것을 머잖아 북한도 알 수 있으니 빨리 탈북해 오세요.”

“다행이다. 그런데 네가 한국에 간 줄은 아직 여기서 모르는 것 같아. 내가 군복을 벗으면 네가 탈북한 사실이 알려졌다는 것이니 그때 떠나마.”

보안서 중좌까지 빠르게 승진했던 형은 쉽게 용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는 듯 했다. 외사촌 누나의 아들도 형이 뒤늦게 한국으로 보내주었다.

하지만 1년여가 지난 뒤 형은 대낮에 불시에 들이닥친 보위부에 체포됐다. 죄명은 ‘괴뢰들과 통신 연락 및 인신매매’였다.

어머니는 큰 충격을 받았다. 보안서 정복을 입은 두 아들과 함께 거리를 다닐 때는 그렇게 자랑스러웠지만, 불과 1년 사이에 둘째 아들은 아동유괴범이 돼 한국으로 갔고, 첫째 아들은 간첩으로 체포된 것이다.

형이 체포된 다음날 어머니는 하얀 소복으로 갈아입고 유언을 남긴 뒤 독약을 먹고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어머니의 나이는 불과 61세였다.

어려서부터 축구선수였던 형님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매우 강했다. 하지만 나흘 만에 땅에 묻은 돈의 위치까지 진술했다. 그 정도로 보위부의 고문은 혹독했다. 형님은 ‘보위부 교화형 12년’을 선고받았다.

보위부 교화형은 일반 민간의 노동교화형과는 다른 형벌이다. 노동교화형은 형기를 채우면 석방이 될 수 있다. 반면 보위부 교화형은 형기가 몇 년이든 간에 살아서 돌아올 수 없다. 형기는 끌고 갈 때 필요한 명분일 뿐 죽을 때까지 혹독한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시신도 찾을 수가 없다.

죽어도 집에 통지조차 가지 않는다. 보위부 교화형을 받은 사람들이 가는 대표적 수용소가 함북 청진에 있는 수성교화소이다.

형은 신포 어느 섬에 있는 보위부 교화소에 끌려갔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잠수함기지로 추정되지만 확실치는 않다. 이곳엔 약 100여명이 수감돼 있다고 들었다.

김 씨는 형을 구하기 위해 많은 돈을 써가며 백방으로 수소문을 했다. 하지만 보위부 교화형을 선고받고 섬에 끌려간 사람을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8년이 지난 지금 김 씨는 형을 찾는 것을 포기했다. “거기 가면 몇 년을 견디지 못합니다. 형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겁니다.”

김 씨는 2024년 남북하나재단 주최 정착사례 발표대회에서 조민호 남북하나재단 이사장으로부터 최고상인 대상을 수여받았다.
김 씨는 2024년 남북하나재단 주최 정착사례 발표대회에서 조민호 남북하나재단 이사장으로부터 최고상인 대상을 수여받았다.


● 지게차로 이룬 인생 역전
산 사람은 살아야 했다. 북한 가족을 구출해내기 위해서라도 김 씨는 빨리 취직해 돈을 벌어야 했다. 처음 취직한 곳은 자동차 콘솔박스를 만드는 곳이었다. 모두가 여성이고 남성은 그가 유일했다.

경상도 여인들의 잔소리는 적응하기 어려웠다. 일을 빨리 하지 않는다고, 몸에 담배 냄새가 난다고, 심지어 북한말을 쓴다고 구박하는 일도 있었다.

결국 끝내 견디지 못해 3개월 만에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이번에 간 곳은 아파트 건설장. 먼저 직장과는 달리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남자였다.

그가 처음 맡은 일은 소방 설비 배관 조공이었는데, 공구 이름부터 작업장 용어까지 전부 외래어였다. 그래서 공구 이름들을 수첩이나 핸드폰에 메모하고 틈날 때마다 외워야 했다. 일이 서툴러 구박을 받을 때마다 “북한에서 온지 얼마 안돼 그러는데 잘 부탁한다”고 머리를 숙여야 했다.

용접사들이 점심식사를 할 때 그는 점심을 거르면서 용접기를 들고 연습을 했다. 일이 끝나고 집에 들어오면 눈에 모래가 굴러다니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버텼다. 그렇게 1년을 버티니 조공에서 기공으로 입지가 바뀌었고 월급도 많이 올랐다. 사람들도 성실한 그의 태도에 마음을 열고 친근하게 대해주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평생의 반려도 만나게 된다. 아내도 북에서 온 탈북민이었다. 잠깐의 신혼생활이 지나고 아내가 아이를 가졌다. 그러다보니 평생 가족을 책임질 안정적인 직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이후 여러 곳을 수소문하다 남북하나재단에서 학원비를 지원해준다는 사실을 접했다. 그는 중장비 학원에 등록했다. 북한에서 지게차를 구경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열심히 노력해 지게차와 포크레인 기사 자격증을 따냈다.

이후 영업용 지게차 회사에 취직은 했다. 하지만 정착은 역시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자격증은 자격증일 뿐, 초보 실력으로는 정신없이 돌아가는 현장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배차를 받아 갔지만, 일을 제대로 못한다고 쫓겨나는 일도 여러 차례였다.

회사에 눈치가 보였다. 잘리지 않기 위해선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남보다 두배 이상 노력하기로 다짐했다. 이후 그는 매일 6시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정상 출근시간보다 2시간 먼저 나가 쓰레기통을 비우고 사무실을 청소했다.

노력은 인정받기 마련이었다. 어느 날 회사 사장이 “왜 상진이만 매일 청소하냐. 너희들도 좀 따라 배우라”며 그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사장은 공사현장에도 “탈북자인데 실수하더라도 예쁘게 봐 달라. 많이 가르쳐주라”는 말을 틈나는대로 전파했다.

이런 시간이 쌓이자 현장 반장들과 사장들도 그를 먼저 알아봐주기 시작했다. “북한에서 온 장비기사 오늘도 왔네”라며 인사도 건넸다. 지게차로 물건을 올리다 실수로 떨어지게 되면 다른 기사들은 지게차에서 내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지게차에서 내려 물건을 다시 실었다. 그런 모습에 감동한 현장들에서 “내일은 북한에서 온 장비기사를 꼭 보내달라”는 주문이 쏟아졌다.

이후 점점 삶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10년 동안 모은 돈으로 현재 그는 지게차를 두 대나장만해 한 대는 본인이 몰고, 다른 한 대는 직원을 두고 쓴다. 개인사업자 6명과 함께 동업을 해 수입도 늘렸다. 각종 비용을 빼고 한 달 순수입만 1000만 원을 넘기는 때도 있다.

집에 돌아가면 토끼 같은 아들과 딸이 그를 맞아준다. 요즘 부부의 고민은 내년에 아이를 한 명 더 낳을지 여부다.

2024년 남북하나재단이 주최한 정착사례발표대회에서 김 씨는 최고상인 대상을 받았다. 그는 무대에서 “탈북민 대표라고 항상 생각하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일했다”며 “이 사회에선 열심히 일한만큼 알아보고 인정해주었다”고 10년을 회고했다.

하루하루 단단하게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김 씨지만 북한을 떠올리면 늘 가슴이 아프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먼저 자유의 땅을 밟은 선각자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고 있다.

“우리가 먼저 와서 잘 살고 있지만, 북에 남은 사람들도 잘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통일이 되면 엄청난 건설 수요가 생길 것입니다. 내년에 저는 제 이름을 내건 지게차 회사를 만들 생각입니다. 통일이 될 때까지 최대한 사업을 확장해, 정말로 고향에 갈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지게차들을 잔뜩 몰고 북한으로 올라가겠습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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