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 핵시설로 본 북한 핵능력은
6차례 핵실험으로 핵무기 고도화
2006년 1차 시험, 파괴력 1kt 이하… 3차부터 우라늄으로 위력 높여
2016년엔 첫 ‘핵탄두’ 실험 언급… 이듬해 6차에서 최대 100kt 측정
북한은 2006∼2017년 6차례 핵실험을 거쳐 핵무기를 고도화시켰다. 초기 핵실험은 초보적인 ‘핵장치 시험’ 수준이었지만 마지막이었던 6차 핵실험에선 수소폭탄급 무기를 시험했을 만큼 핵능력을 향상시켰다는 평가가 나왔다. 우리 정보당국은 북한이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을 언제든 핵실험이 가능한 상태로 관리 중이라고 보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판단에 따라 언제든 7차 핵실험이 이뤄질 수 있다는 의미다.
북한은 2006년 10월 9일 풍계리 핵실험장에서 첫 핵실험을 했다. 당시 파괴력은 1kt(킬로톤·1킬로톤은 TNT 폭약 1000t의 위력) 이하로 추정됐다.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됐던 핵폭탄 위력의 16분의 1에 불과해 당시엔 본격적인 핵실험이 아닌 ‘핵장치 시험’이란 평가가 나왔다.
당시 1차 핵실험은 미국의 조치에 따라 동결된 김정일(현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아버지)의 비자금을 돌려받기 위해 북한이 던진 ‘협상 카드’ 성격이 강했다. 미 재무부는 2005년 9월 북한의 자금 세탁을 도운 혐의로 본점이 마카오에 있는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을 우려 대상 기관으로 지목했는데, 이 은행은 뱅크런 사태를 막기 위해 보유 계좌들을 동결했다. 그러자 북한은 은행에 동결된 자금을 돌려받을 때까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 회담에 복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어 이듬해인 2006년 7월 ‘대포동 2호’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한 뒤 10월에 1차 핵실험까지 강행한 것. 미국이 2007년 6월 BDA에 묶여 있던 북한 자금을 러시아 극동상업은행 등을 거치는 방식으로 돌려주면서 일단 이 문제는 일단락됐다.
북한은 2009년 5월 25일 풍계리에서 2차 핵실험을 했다.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 취임 직후였다. 위력은 2∼6kt 수준으로 1차 때에 비해 커졌다. 당시 북한 핵실험 배경과 관련해 “평양의 내부 권력 다툼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이란 해석도 나왔다. 김정일이 2008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후계자였던 김정은에게 권력이 이양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김정은 집권 이후 핵실험이 이어졌다. 북한은 2013년 2월 12일 풍계리 핵실험장에서 3차 핵실험을 했는데 이때 위력은 6∼7kt 수준으로 커졌다. 북한은 플루토늄(Pu)을 주재료로 삼았던 1, 2차 때와 달리 3차 때부터는 고농축우라늄(HEU)을 핵물질 재료로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당시는 오바마 2기 행정부 출범 직후이자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의 집권을 앞둔 시점이었다. 미중의 정권교체 시기였던 것.
2016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선 북한이 한 해에 두 차례나 핵실험을 했다. 2016년 1월 6일 4차 핵실험을 한 뒤 “수소탄 시험에 완전히 성공했다”고 했고, 2016년 9월 9일 5차 핵실험을 한 이후에는 “표준화, 규격화한 핵탄두의 성능과 위력을 최종 검토 확인했다”고 했다. 북한이 ‘핵탄두’ 실험이라고 언급한 건 처음이었다.
이듬해인 2017년에도 핵실험을 했다. 9월 3일 6차 핵실험을 감행한 것. 이때 위력은 우리 당국의 측정치 기준 50∼100kt 수준으로 커졌다.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원자폭탄의 6배 가까운 위력으로, 서울 전체를 한 발로 초토화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북한의 핵실험은 한미의 정권 교체기나, 미국 대선을 앞둔 시기 등에 집중됐다. 김정은이 한미를 겨냥해 그 의미를 최대한 부각시킬 수 있을 만한 타이밍에 핵실험을 진행해 핵능력을 과시하고 결과적으로 파키스탄 같은 ‘핵보유국’ 지위를 얻기 위한 의도란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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