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던 어선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황급히 뱃머리가 회전하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추위를 막기 위해 소금포대를 덮고 있다 엔진소리에 벌떡 얼어난 김성주 씨는 어안이 벙벙했다. 말을 건네볼 틈조차 없었다.
얼마가 지나자 작은 순찰선 두 척이 나타났다. 경찰들이 그들을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책임자인 듯 한 경찰이 총을 겨눈 채 연신 “진정하세요”라고 고함쳤다.
당황한 김 씨 일행도 다급하게 소리쳤다.
“거기서 진정하세요. 우린 귀순하려 왔습니다. 진정하세요.”
“그럼 이 배로 한 명씩 넘어오세요.”
순찰선을 타고 주문진항으로 들어갔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었다.
파출소에 들어가니 소장이 “오느라 고생 많았다”며 믹스커피를 타주었다. 김 씨는 그때까지 커피를 마셔본 일이 없었다. 처음 마셔본 믹스커피는 무척 달고 맛있었다.
얼마쯤 지났을 때 소장이 다시 말을 건넸다.
“사실 여기에 먼저 들어와 있으면 안 되는데, 안전을 위해 다시 바다로 나가야 합니다.”
한국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사실에 안도한 김 씨 일행은 선선히 그말을 따랐다. 다시 타고 온 목선에 올라 바다로 나갔다. 한참 후 도착한 곳엔 해경 소속 경비정 3척이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특공대가 총을 겨누고 이들을 체포하는 사진과 영상이 만들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김 씨는 동해에서 목선을 타고 한국으로 탈북한 최초의 사례였다. 이들이 도착한 날은 2003년 4월 6일이었다.
경찰은 발표를 통해 “3명의 탈북민이 탄 목선은 어민들이 고기잡이를 위해 쳐 놓은 유자망 그물에 스크류가 걸려 표류하다 어민들에게 발견됐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달랐다. 이들은 목선을 타고 새벽 일찍 주문진항에 들어왔다. 그런데 너무 조용해 다시 바다로 나와 정치망 부표에 배를 묶은 뒤 누군가가 발견해주길 기다리던 참이었다. 이들을 발견해 신고한 선장은 3500만 원의 포상금을 받았다.
이런 사실과 함께 언론들엔 동해 경계가 뚫렸다는 기사가 도배됐다. 놀랍게도 이후에도 동해 경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북한 목선은 우리 군의 경계에 걸리지 않고 한국 해역까지 들어온다.
● 82시간의 사투
당시 20세였던 김 씨가 46세의 아버지와 40세 삼촌과 함께 함남 이원군을 출발한 시간은 2003년 4월 2일 오후 6시였다. 이후 주문진항에 도착해 발견되기까지 길이 5m, 폭 1.7m, 높이 0.5m에 6.5마력 경운기 엔진이 부착된 0.5t짜리 목선 위에서 82시간 동안 사투를 치러야 했다.
이원군 라흥구의 선박초소에 뇌물을 주고 떠난 시간은 좀 더 이른 시각인 2일 오후. 항에서 떠나 얼마쯤 항해하다가 다른 해안에 배를 세우고 돼지고기, 닭고기, 식수, 20L 기름통, 추위를 피할 나무 등을 실었다.
항에서 떠날 때 준비물이 많으면 의심받기 때문에 미리 특정 해안가에 긴 항해에 필요한 것들을 숨겨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떠난 때가 오후 6시였다.
이들이 의지할 것은 몰래 구입했던 군용 나침판 하나뿐이었다. 항에서 떠난 뒤 남동 방향 45도로 나침판을 맞추고 계속 배를 몰았다. 먼 바다로 나갈수록 파도가 거세졌지만, 돌아갈 순 없었다.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떠난 길이었다.
하루가 지난 다음날 저녁, 북한의 대표적 여객선인 ‘만경봉호’로 보이는 큰 배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김 씨는 “아버지, 저렇게 큰 배가 가는 것을 보니 우리가 공해에 온 것 같아요. 이제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려야겠어요”라고 소리쳤다. 그의 외침에 뱃머리가 남쪽으로 돌려졌다.
그런데 4일 새벽 예상치 못한 태풍을 만났다. 비가 세차게 내렸고, 엔진도 꺼졌다. 이전에도 이런 고장은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엔진 전원 플러그를 뽑은 뒤 닦아서 다시 맞추면 시동이 걸렸다. 하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밤새 플러그를 닦았지만 시동은 걸리지 않았다.
작은 목선으로 공해에서 표류하는 일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들은 소금포대를 뒤집어쓴 채 밤새 파도와 추위와 싸워야만 했다.
배에 차는 물을 퍼내며 사투를 벌였지만 점점 힘이 빠졌다. 피곤에 지쳐 잠에 떨어졌던 김 씨가 눈을 뜨고, 포대를 벗어던졌을 땐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다행히 비는 멎었다.
아버지가 배 머리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식량으로 준비했던 죽은 닭의 목을 칼로 쳐서 바다에 던지며 용왕님을 찾고 있었다. 살려달라는 뜻을 담은 일종의 굿이었다.
그걸 본 김 씨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하늘에 기도한 뒤 다시 플러그를 닦았다. 정성이 하늘에 닿았을까. 밤새 꺼졌던 엔진에 다시 시동이 걸렸다.
일행은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이들은 엔진이 꺼진 목선이 해류를 타고 남쪽까지 빠르게 흘러 내려왔다는 사실을 몰랐다.
5일 오후 2시, 북한에선 본 적이 없는 큰 군함이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나중에 천안함 폭침사건이 벌어졌을 때 김 씨는 탈북할 때 봤던 군함이 천안함과 같은 1200t급 초계함일 거라고 생각했다.
군함은 목선에서 2, 3㎞ 지점까지 와서 멈춰 섰다.
아버지는 다급한 목소리로 “저게 조선 군함인지 남조선 군함인지 모르니 일단 엔진을 끄자. 엔진 소리도 음향탐지기에 적발될 수가 있다”고 소리쳤다.
시동을 끈 이들은 군함을 향해 열심히 노를 저어갔다. 그런데 군함은 잠시 정박했다가 이들을 보지 못하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갔다.
다시 아버지가 “남쪽으로 가는 것을 보니 저건 남조선 군함이 틀림없다. 저 배를 따라 가자”고 외쳤다.
이들이 다시 시동을 걸고 군함이 이동한 방향으로 따라갔을 때 군함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고개를 들어 오른쪽을 보니 멀리 육지 비슷한 것이 보였지만, 구름인지 산인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일행은 그쪽으로 갈지 여부를 놓고 옥신각신해야만 했다. 그러나 선뜻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결국 남쪽으로 더 내려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잘못해 원산항에 들어갔다가 체포된다면 총살을 피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시 한참을 남쪽으로 내려가던 중 바다에 떠있는 부표와 마주쳤다. 살펴보던 아버지는 “이것 봐, 부표 글씨체가 각진 것이 북조선 부표는 아니야. 여긴 이제 남조선이야”라고 소리질렀다.
그제서야 이들은 뱃머리를 육지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잠시 후 구름인지 산인지 헷갈렸던 게 육지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낮부터 쉬지 않고 달렸다. 하지만 배의 속도가 느려 새벽녘이 돼서야 해안가 인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더 다가가지 않고 조용히 주시하니 해변에서 폭죽을 터뜨리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북한에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남조선임이 더욱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열심히 배를 몰아 당도한 항구는 주문진. 하지만 그때까지도 이들은 그곳의 지명을 알지 못했다.
● 주문진항에 도착
방파제에 도착한 뒤 일동은 배에서 내릴 생각이었다. 그 때 아버지가 일행을 막아섰다.
“여기도 해안경비대가 있을 건데, 밤에 움직이다가 잘못하면 총에 맞을 수 있어. 여기 경찰이 우릴 발견하게 해야지, 우리가 먼저 육지에 올라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일단 배를 바다에 세우고 신호를 보내자.”
다시 뱃머리를 돌려 바다로 향한 뒤 정치망 부표에 배를 묶었다. 그리고 화로에 불을 피운 뒤 해안을 향해 열심히 흔들며 소리쳤다. 하지만 반응이 전혀 없었다. 이들을 신경쓰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반응이 없자 지쳤지만 남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일행들은 “에라 모르겠다. 아침까지 좀 자자”며 하나둘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를 지났을까 고기배의 엔진소리가 귀를 때렸다. 그 소리에 놀란 김 씨는 벌떡 일어났다. 어선 선장은 국방색 북한 옷차림의 김 씨가 눈에 띄자 놀라서 “인민군이 나타났다”고 소리친 뒤 황급하게 사라졌다.
해군 경비정에 끌려 다시 주문진항에 들어온 시각은 오전 9시. 항구엔 벌써 사람들이 새까맣게 모여 있었다. 세 명은 주문진항에 대기하고 있던 검정색 아우디 승용차에 한 명씩 실려 알 수 없는 어딘가로 이동했다. 도착한 곳은 군 사령부 같은 곳이었다. 그들을 맞이한 중장은 어떤 경로로 한국까지 오게 됐는지 설명할 것을 요구했다.
거기에서 82시간 동안 벌어졌던 일을 설명했다. 이후 다시 승용차를 이용해 그들은 서울로 향했다. 이동 과정에서 차창 밖으로 자동차 행렬에 막힌 고속도로가 보였다. 북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었기에 무척 신기했다.
서울 모처에서 각방에 수용된 이들은 본격적인 심문을 받았다. 아버지와 삼촌은 2주 만에 심문이 끝났다. 그런데 김 씨는 한 달이나 계속했다. 나중에 되돌이켜보니 나이를 한 살 줄인 것이 화근인 듯 했다.
김 씨는 한국에 오면 군에 입대할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나이를 줄이는 게 유리할 것 같아 태어난 해를 83년이 아닌 84년이라고 바꿔 대답했다. 아버지와 삼촌의 심문과정에서 자신의 정보가 모두 알려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못한 것이다.
그래도 한 달 동안 심문을 받으며 끝까지 84년생이라 우겼다. 결국 조사관들도 그의 고집에 꺾여 84년생으로 된 주민등록증을 발급해주었다.
개별적으로 묶는 방에서 조사받을 때는 방으로 배달해주는 밥만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심문이 끝나고 단체 수용시설로 옮기니 뷔페식으로 차려진 식당에 맘껏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하나원에서 김 씨는 20세 미만이라 청소년반에 배정됐다. 북한에선 17세에 군대를 가지만, 남한에서는 20세 미만이면 청소년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에 그는 놀랐다.
한편으로는 앞으로 군대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 좋았다. 김씨가 군 입대를 원했던 데에는 북에서 당한 세뇌 탓이 컸다. 어렸을 때부터 군대에 가야 출신성분도 고치고, 아버지 죄도 씻을 수 있다고 교육받았던 것이다.
● 오솔길을 따라 6시간 통학
김 씨가 1983년 함남 이원군에서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기관차 부품을 만드는 공장 노동자였다. 군에서 특수부대 교관까지 했던 부친이 노동당에 입당하지 못하고 이원군 노동자로 내려온 이유는 출신성분 때문이었다. 김 씨의 증조할아버지는 해방 전 강원도 고성군의 지주였다. 해방 후 박해를 피해 간 곳이 하필 남쪽이 아닌 북쪽의 평북 지방이었다.
할아버지는 기술자로 인정받아 한때 평양에 살기도 했지만, 나중에 이원으로 추방됐다. 이곳에서 태어난 김 씨는 어렸을 때부터 체육을 좋아했다. 인민학교 때에도 체육 특기생들만 모인 반에 들어가 스케이트, 축구, 마라톤 등 해보지 않은 스포츠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11살 때인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고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노동자로는 먹고 살 수 없었던 부친은 자강도로 떠났다. 그때 공장마다 김정일에게 ‘충성의 선물’을 바친다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부친의 공장은 산삼과 꿀을 바치기로 했다.
부친은 자강도 화평군에 꿀 생산 기지를 만들겠다며 떠났다. 앉아서 굶어죽느니 차라리 심심산골에 들어가 농사를 해야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머니와 김 씨, 두 동생 등 5명을 이끌고 도착한 곳은 화평역에서 차로 한 시간을 간 뒤 다시 걸어서 2시간이 걸리는 첩첩산중이었다. 그곳에서 외딴 동기와 나무집에 살아야만 했다. 가까운 동네에 가려고 해도 2시간을 걸어야 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등잔불을 붙이고 살아야만 했다. 이곳에서 김 씨 가족은 나무를 베고 뿌리를 뽑아 밭을 만들었다.
김 씨가 다녀야 할 학교는 왕복 25㎞ 거리라 통학에만 6시간씩 걸렸다. 그것도 길이 없어 숲 속 오솔길을 따라 다녀야 했다. 학교에서 조금이라도 놀다간 한밤중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날 11세 소년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걸어야 했다. 혹시라도 만나게 될 산짐승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김 씨는 하루도 학교를 빼먹지 않았다. 학교에 가지 않으면 집에 남아 돌밭을 개간하거나 옥수수 농사를 해야 했다. 당시 그는 그런 일들이 정말 싫었다.
처음 도착했을 때만 해도 김 씨 가족은 질경이 풀을 베어 독을 빼기 위해 하루 종일 끓인 뒤 옥수수 한 국자를 풀어 죽을 해먹었다. 나중에 점차 자리를 잡으면서 옥수수밥도 먹었다.
부친은 토종꿀을 생산한 뒤 열심히 공장에 바쳤다. 점점 생산량이 늘어나자 공장에서 차를 내줬고, 꿀을 실어 나를 수 있었다.
김 씨는 중학교 6년 과정 중 처음 2년은 화평, 이후 2년은 이원에서 다녔다. 졸업 전에 다시 화평으로 돌아왔고, 나머지 과정을 마치고 2001년에 졸업했다.
● 15년형을 선고받은 아버지
중학교 졸업 직전에 부친이 감옥에 끌려갔다. 2000년 김정일의 생일선물로 할당받은 꿀을 생산하지 못했다. 그걸 빌미로 검찰이 달라붙었다.
이 과정에 장군님의 선물 마련을 위해 공장에서 내준 차를 제멋대로 유용해 재산을 벌었다는 죄까지 뒤집어썼다. 부친은 꿀을 싣고 간 차에 돌아올 땐 생선을 싣고 와 자강도에서 팔았던 게 화근이었다.
꿀을 생산할 때 당국으로부터 지원받은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먹고 살기 위해 벌인 일에는 칼 같이 죄를 묻는 세상이었다. 부친은 이원의 영화관에서 공개재판을 받고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자강도에 살고 있던 가족은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전화도 없고, 편지를 써봐야 배달도 되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1년 동안 부친에게 연락이 없어도 찾아갈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곳이었다. 당시는 기차를 타고 화평에서 이원까지 가려면 보름씩 걸렸다.
김 씨는 중학교 졸업 후 군 입대를 위해 이원에 갔다가 아버지가 수감됐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 다행히 김 씨가 갔을 땐 아버지는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구타를 심하게 당해 건강이 크게 악화된 상태였는데, 삼촌이 뇌물을 써서 그나마 집에 머물며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장남인 김 씨를 보자 부친은 “네가 이제 군대에 가면 100% 영양실조에 걸릴 것 같으니 전문대학에 2년 정도 다니면서 살을 찌운 뒤 가라”고 당부했다.
병중인 부친의 말에 김 씨는 선선히 따르기로 했다. 그는 2년제 철도공장 기능공 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북한 전문학교는 거의 운영되지 못했다. 학생들이 이름만 학교에 걸어놓고 돈을 벌었다. 선생들에게 뇌물을 주면 출석을 인정해주던 때였다.
부친은 집안 재산을 팔아 목선을 하나 장만해주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탈북을 결심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바다 경험을 쌓게 할 목적이 숨겨져 있었다.
이런 사실을 몰랐던 김 씨는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닥치는 대로 일했다. 가족들의 생계가 달린 일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돈을 벌었다. 여름엔 오징어를 잡았고, 고무호스를 달고 잠수부 일도 했다.
제대로 된 장비는 꿈꾸기도 어려웠다. 북한의 어부는 칠성판에 목숨을 맡겨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19세 때 15m 깊이에 들어가 돌미역을 베다가 산소를 공급하던 엔진이 멈춰서는 바람에 죽을 뻔하기도 했다. 파도가 센 날에 갯바위 옆에서 작업하다가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 닥쳐 배가 박살이 나는 일도 있었다.
그래도 목선을 타고 일하는 것은 그 마을 사람들에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위험하긴 해도 굶어죽진 않을 수단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 씨의 고향인 라흥노동자구에선 고난의 행군 때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김 씨네 마을 앞 배 밭은 3년 만에 거대한 공동묘지로 변했다.
● 탈북을 계획하다
김 씨가 바다에서 일을 하는 동안 아버지는 수시로 감옥을 들락거렸다.
2002년 7월 아버지가 뇌물을 주고 다시 7개월 병보석으로 나왔다. 아버지는 종종 아들과 함께 해변에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친이 숨죽이며 조용히 그에게 말을 건넸다.
“여긴 아닌 것 같다. 내가 이제 감옥에 가서 형기를 채우면 60세가 되는데 그럼 인생이 끝나. 남조선에 가면 인권이란 것이 있다는데 최소한 굶어죽진 않을게 아니냐.”
아버지의 말을 경청하던 김 씨는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리해요. 제가 군에 가서 입당도 하고, 열심히 살아서 아버지의 죄도 씻을게요.”
“출신성분이 나쁜데 군대에 가도 네가 바라는 부대에 갈 것 같냐. 여기 주둔하고 있는 호위국 군인들을 봐봐. 너도 총도 못 쏘고 10년 내내 탄광에서 일하든가, 나무를 베든가 그러다가 입당도 못하고 올 거야. 아니, 영양실조 환자가 돼서 1년 안에 오지 않으면 다행이지.”
김 씨는 직전에 군에 나간 친구가 영양실조에 걸려 돌아온 것을 보았다. 체격 조건이 김 씨보다 더 좋았던 친구였는데 1년 만에 기차에서 스스로 내리지도 못해 김 씨가 역에서 집까지 업고 왔다.
이버지의 설득은 계속 됐고, 김 씨는 점차 수긍이 됐다. 무엇보다 북한에서 열심히 살아봐야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아버지 말에 공감이 갔다.
다만 뭍에서 조금만 나가도 파도가 엄청 높은데 높이가 50㎝ 밖에 되지 않는 목선을 타고 남조선에 간다는 것은 무모한 계획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바로 옆 차호해군기지에서 레이더기지를 운영하고 있어서 탈북 시도를 제대로 하기도 전에 잡힐 수 있다는 우려도 영향을 미쳤다.
그런 이유들로 결심을 하지 못한 채 차일피일 미루는 동안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그렇게 아버지의 병보석 기간이 끝나는 이듬해 4월이 다가왔다.
아버지는 다시 그를 불러 정색하고 말을 꺼냈다.
“이제는 더 지체할 수 없다. 내가 찾아보니 옛날 발해랑 신라가 해상 교역하던 시기가 청명 때였다고 하더라. 이때는 파도도 없고, 해류도 남쪽으로 흐른다고 했어. 이젠 떠나야 해.”
마침내 김 씨는 아버지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거기에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고민도 한몫했다. 북에서는 그의 앞날도 별 볼일이 없을 게 분명하다는 판단이 섰던 것. 아버지는 삼촌도 설득해 함께 탈북하기로 했다.
● 어머니와의 이별
세 사람은 떠나는 날짜를 일단 2003년 4월 2일로 정했다. 그런데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생겼다. 떠나기 일주일 전 자강도에 살던 어머니가 무슨 예감이 들어서인지 불쑥 나타난 것이다.
김 씨가 이원에 나온 2년 동안 어머니는 자강도에서 동생들과 함께 지냈다. 그동안 김 씨 부자는 가족들에게 별도로 연락하지 않았다. 편지를 써봐야 어차피 배달도 안 되는 곳이라는 부질없는 일이라 여겼던 것이다.
남편과 아들의 근황이 궁금했던 어머니는 왕복에 거의 한달이 걸리는 먼길을 마다 않고 이원까지 달려온 것이었다.
부자는 아내이자 어머니에게 남조선으로 가기로 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목선에 3명 이상 탈수도 없거니와 가다가 죽을지도 모르는 판에 모두 떠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또 자강도엔 어머니가 돌봐야 하는 동생들도 있었다.
남편과 아들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어머니는 3일 뒤 다시 돌아갔다. 기차역에서 김 씨는 어머니 앞에서 참을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 군대에 가서 잘 해서 호강시켜 드릴게요”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기차역에서 그는 옷 속에 숨겨놓고 바느질로 꿰맨 500원짜리 지폐를 계속 만지작거렸다. 쌀 몇 ㎏을 살 수 있는 그 돈은 탈출을 위한 최후의 비상금이었다. 혹시 일이 틀어져도 500원이면 몇 끼는 사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숨겨놓은 것이다.
그때까지도 김 씨는 남조선에서도 북한돈이 통용될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만큼 세상에 대해 무지했다. 그래서 끝내 어머니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 한국에 도착해 그 500원은 압류됐고, 무용지물이 됐다.
김 씨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목이 메고, 가슴 한켠이 먹먹하다. 나중에 자신이 창업한 기업에 ‘오백환경산업’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그 때문이다.
김 씨는 한국에 도착한 이후 북에 있는 가족을 찾으려 무진장 애를 썼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다. 주소도 없는 심심산골이라 아무리 돈을 많이 주겠다고 해도 가겠다는 사람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 택견 사범이 되다
김 씨가 하나원을 나온 때는 2003년 9월이었다. 서울에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에 따라 부자는 노원구 중계동에 위치한 임대주택을 받았다.
노원에 도착한 당일 김 씨는 집에서 나와 동네를 돌아다녔다. 사회에 나온다면 하고 싶었던 게 한 가지가 있었다. 그건 태권도 배우기였다. 북에선 집안 형편이 어느 정도 돼야 태권도를 배울 수 있었다. 새로운 세상에 왔으니 그것부터 경험하고 싶었다.
이곳저곳 태권도 간판이 붙은 곳들을 찾았다. 하지만 모두 아이들만 가르친다며 어른은 받지 않는다는 말만 들었다.
저녁이 돼서 택견이라는 간판이 붙은 곳을 발견했다. 그곳에 들어가 보니 성인들도 훈련을 하고 있었다. 관장은 중년의 여성이었다. 그는 한국택견협회에서 여성 최초의 택견 공인지도자 자격을 받은 이현기 관장이었다.
탈북민인데 태권도를 배우고 싶다는 김 씨에게 이 관장은 더 이상 묻지 않고 회비도 받지 않을 테니 대신 청소를 하면서 틈나는 대로 배워보라고 했다. 이때 맺어진 인연으로 이 관장은 김 씨의 양어머니가 됐고, 그의 결혼식에서는 모친석에 앉았다.
그는 이때부터 4년 동안 열심히 택견을 익혔다. 아침 9시에 출근해 청소를 하고, 오후에 버스를 몰아 초등 중등 과정에 다니는 애들을 태워오고, 저녁엔 성인부와 함께 택견을 익혔다. 모든 일과가 끝나고 마무리 청소를 한 뒤 집에 가면 새벽 1시반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2년 동안 그런 생활을 해낸 결과 지도사범 자격증도 따냈다. 지도사범이 되니 월급도 나오고 시범단 운영도 가능해졌다. 어느 정도 한국 생활에 적응했다싶으니까 안정적인 생활에 대한 갈증이 생겼다.
그래서 정수기능대학에 입학해 용접기능사 자격증을 땄다. 용접을 하면 조선소에서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 직장은 엘리베이터 회사였다. 용접 자격은 쓸모가 없었다.
월급 160만 원을 받으며 2년쯤 다녔다. 하는 일은 엘리베이터 점검표를 작성이었다. 미래가 보이질 않았다. 그와 함께 다니는 직장생활 13년 차 대리도 200만 원을 받았다. 이렇게 계속 살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회사에 다니면서 밤이면 택견 체육관을 찾아 운동을 계속했던 이유다.
● 탈락한 특전사 시험
무술사범이 되겠다는 꿈을 이룬 김 씨는 다음 행보를 고민했다. 그가 한국에 올 때 결심했던 일은 군 입대였다. 이왕이면 특전사에 가고 싶었다. 특전사 부사관으로 근무하다 제대하면 수천 만 원의 목돈이 생기고, 이를 씨앗자금으로 삼아 제대 후 택견 도장도 차릴 수 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병무청에 문의했더니 북에서 온 탈북민은 군 입대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포기할 수 없었다. 다시 국방부 홈페이지에 “군에 가고 싶은데, 탈북민이라고 뽑아주지 않는 것은 차별이 아닌가”라는 글을 남겼다. 며칠 뒤 “지원하세요”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마침내 원하던 특전사 시험에 응할 수 있게 됐다. 과정은 까다로웠다. 실기 시험만 무려 일주일 동안 치러졌다. 그런데도 즐거웠다. 무엇보다 식사가 좋았다. 첫날 특전사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밥이 너무 맛있고 잘 나와서 눈이 뒤집혀졌다. 북한에서 군에 입대했다가 영양실조로 돌아온 친구들이 떠올랐다.
“여기 군대는 이렇게 맛있는 밥을 먹고 살다니. 내 꼭 입대해 조국을 위해 한 몸을 바치는 인간병기가 되리라.”
택견 지도사범인 그에게 실기 시험 통과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15㎏ 군장을 메고 2㎞ 뛰는 시험엔 지원자 57명 중 2등으로 들어왔다. 윗몸 일으키기, 턱걸이 등도 최고 성적으로 통과했다. 필기시험도 잘 보았다.
마지막 관문은 신체검사였다. 신청자 57명 가운데 그 때까지 살아남은 인원은 40명.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신체검사장에 들어섰다. 그런데 그에게만 옷을 벗고 신체검사를 받으란 이야기가 없었다. 어쩔 줄 몰라하던 그에게 담당관이 다가와선 “김성주 씨는 이번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라며 불합격 통보를 전했다.
어처구니가 없고 화도 났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허탈한 마음을 달래며 특전사 정문을 나서던 그 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김성주 씨, 합격하셨어요.”
전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한국 체대 관계자였다. 특전사 시험이 우선이었지만, 혹시 몰라 지원서를 넣은 체대에 합격한 것이었다.
그렇게 돼 그는 한국체육대학 태권도과 07학번으로 입학했다. 그는 특전사에 입대하지 못한 일이 지금도 아쉽다. 탈북민 출신의 첫 특전사 부사관은 그로부터 10년 뒤인 2017년에 나왔다.
● 뜻밖의 놀이공원 사장
체육대학 생활은 힘들었지만 보람도 컸다. 그는 노원구의 집에서 송파구에 있는 대학까지 오토바이로 등하교를 했다. 그러다 2학년 때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현장에서 기절했다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다. 왼쪽 다리가 탈고되고 신경도 손상됐다. 이로 인해 그는 선수부는 포기하고 지도자 과정을 이수하고, 졸업해야만 했다.
재활치료에만 6개월이 걸리고, 완치된다 해도 태권도를 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문제는 재활치료비였다. 돈을 구할 길이 막막했다. 그 때 강원도 원주에 있는 오크밸리 리조트 놀이동산에서 아르바이트를 찾는다는 고마운 소식이 전해졌다.
이후 그는 주말과 방학 때마다 원주에 내려가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가 맡은 놀이기구는 ‘유로번지’였다. 트램펄린과 번지점프를 접목해 두 가지 기구의 매력을 동시에 즐기고 느낄 수 있도록 만든 놀이기구였다.
그는 이 놀이기구에 푹 빠졌다. 트램펄린 위에서 택견 시범 하듯이 텀블링을 하니 아이들이 신기하다고 모여들었다. 그런 동작은 그의 재활운동에도 도움이 돼 일석이조였다.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눈여겨봤던 놀이동산 사장이 그에게 7500만 원에 유로번지를 인수할 것을 제안했다. 대금은 운영 수익과 월급에서 정산하기로 했다.
주말과 방학 성수기면 어김없이 원주를 찾아가 눈에 불을 켜고 열심히 일했다. 그 결과 돈이 모였고, 대학 졸업 전에 그는 바이킹과 에어바운스라는 놀이기구까지 인수했다.
그런 식으로 지내다보니 놀이동산 전체를 다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장은 권리금 5000만 원만 주면 운영권을 넘기겠다고 했다.
돈을 구할 데가 마땅치 않았던 그는 미래의 장모를 찾아가 넉살 좋게 돈을 빌렸다. 한 달 안에 갚겠다는 약속도 했다.
그 소식을 접한 장인은 “결혼도 안한 예비사위에게 돈을 빌려주는 법도 있냐”며 혀를 찼지만 결국 돈을 만들어주었다. 그는 약속대로 한 달 안에 빌린 돈을 모두 갚았다.
아내는 대학 1학년 때 소개팅에서 만났다. 학교 형을 따라간 2대2 미팅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은행에 다닌다는 여성이 마음에 들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4살이었고, 아내는 26살이었다.
연상연하라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던 아내는 처음에 그의 구애를 거절했다. 하지만 그의 계속된 구애에 결국은 그를 받아들였다. 이후 아내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의 곁을 지켜줬다. 연애를 시작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그가 교통사고로 입원했을 때 아내는 매일 퇴근할 때마다 병실을 찾아왔다. 그렇게 사랑을 키운 두 사람은 그가 대학을 졸업하던 2011년 결혼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크밸리 놀이공원 사장 자리에도 올랐다. 사업장 이름은 그와 아내의 이름에서 한자 씩 따서 ‘EJ레포츠’라고 정했다.
●강원지구 JC 회장이 되다
운동만 알았던 그였지만 놀이공원을 운영하면서 자신이 회사 경영에 뛰어난 소질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가 인수할 때까지만 해도 놀이공원의 연매출액은 7000만~8000만 원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가 인수한 이듬해 매출액은 3억 원으로 껑충 뛰었다. 오크밸리에 납입하는 수수료 23%와 직원 인건비 등을 다 제외하고도 1억 5000만 정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는 그렇게 모인 돈을 놀이기구와 부동산 등에 투자했다. 그 결과 현재 놀이기구 기종은 11종에 달한다.집도 원주의 전원주택을 사서 이사했다. 서울서만 살아온 아내도 전원생활이 좋다고 찬성했다.
노력을 아까지 않으며 놀이공원 사업에 공을 들였지만 올해로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게 됐다. 올해 사업자 선정입찰에서 그가 제시한 금액보다 훨씬 많은 돈을 제시한 대기업에 밀린 것.
아쉬웠지만 주저앉지는 않았다. 대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놀이동산보다 더 큰 다른 사업을 시작했다.
2014년 발생한 세월호 사고 이후 전국 각급 학교에는 생존수영을 가르치는 수업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하지만 수영장을 갖춘 학교는 전체의 2%에 불과했다. 김 씨는 이를 기회로 여겼다.
“이동식 수영장을 만들어 교육을 해보면 어떨까.”
그는 조립이 가능한 이동식 수영장 장비를 마련해 공개입찰에 뛰어들었다. 반응이 좋았다. 고무된 그는 겨울에도 수업이 가능한 에어돔 형태의 이동식 수영장 시설까지 마련했다.
위기도 있었다. 코로나19가 발생하면서 비대면 수업이 대세가 됐고, 수영 수업도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힘든 겨울을 버텨내자 다시 봄이 왔다. 2022년부터 생존수영 수업이 재개된 것이다. 그는 현재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실존수영 수업을 늘려가고 있다.
사업이 안정되면서 사회활동도 늘어났다. 그는 2022년에 한국청년회의소(JC) 원주지역 회장으로 선출됐다. 2017년 원주JC에 입회해 사무국장, 외무부회장, 상임부회장을 차례로 역임하면서 회원들의 신뢰를 받은 덕분이다.
지난해엔 강원지구 JC 회장으로 당선됐다. 19명이 후보로 등록해 치열한 경합이 펼쳐졌지만, 특유의 친화력과 활동성을 널리 인정받은 결과였다.
회장 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만난 우연한 인연도 있다. 그의 경력이 알려지자 속초 JC회장이 다가와 “2003년 그 목선을 나포할 때 나도 해경으로 현장에 있었다”고 밝힌 것. 20년 전 해경과 소금물을 뒤집어쓰고 꾀죄죄한 몰골이었던 탈북민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또다시 한 자리에서 만난 일이어서 주변 지인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됐다.
남쪽에서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김 씨와는 달리 함께 온 아버지와 삼촌은 안타깝게도 그다지 행복한 일상을 경험하지 못했다. 삼촌은 8년 뒤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도 남양주에서 소 5마리로 목축업을 시작했다가 삼촌이 운명하자 크게 실망한 뒤 네덜란드로 이민을 떠났다. 현재 그곳에서 시민권을 획득해 살고 있다.
김 씨의 롤모델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다.
“정주영 회장님이 소 한 마리를 갖고 왔다가 나중에 고향으로 1000마리를 끌고 가지 않았습니까. 저는 배 한 척을 몰고 왔으니 배 1000척은 끌고 올라가고 싶습니다. 김정은과 만나 남과 북이 물물교환으로 공동의 부를 창출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통일되면 통일부 장관도 해보고 싶습니다. 저처럼 시장경제체제에서 사업을 해 본 사람이 누구보다 북한 인민들을 시장경제로 잘 인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는 늘 큰 꿈을 꾸고 살았다. 남과 북에서 반반의 삶을 살아온 41세 김성주 대표. 그가 걸어가야 할 미래는 아직도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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