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스’라고 꼽혔던 친구들이 나가면 여러 생각이 들죠. 대기업으로 이직하고 나서 받는 처우도 귀에 들어오고요. 정책은 국회에서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많아서 보람을 찾기도 어렵고…. 예전과 달리 떠난다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많아요.”
중앙 부처 공무원 A 씨는 26일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임기 3년 차에 정권 말과 같은 모습들이 관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데는 공무원들의 ‘퇴직 러시’도 한몫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직을 떠나지 않더라도 민간 기업보다 낮은 급여, 대민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 등으로 무사안일, 보신주의로 업무에 임하는 이들도 상당수다.
또 다른 중앙 부처 과장급 B 씨는 “극단적 여소야대에 대통령 지지율까지 하락하면서 공직 사회의 활력이 많이 떨어진 상황”이라며 “그렇다 보니 공무원들도 일할 때 자연스레 몸을 사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실제로 최근 들어 주요 정책을 이끌어 가던 핵심 인재들이 잇달아 공직을 떠났다. 기획재정부의 한 과장은 올 8월 대기업 연구소로 이직했고, 산업통상자원부의 한 실장도 퇴직하고 1년도 안 돼 대기업 계열사에 입사했다. 두 사람 모두 주요 보직을 두루 거치며 부처 내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던 인물들이었다. 공정거래위원회에선 몇 개월 간격으로 과장 두 명이 연이어 법무법인으로 이직을 하기도 했다. 지난해 말에는 고용노동부에서 주요 보직을 맡았던 한 과장이 사표를 내고 국내 최대 법무법인으로 자리를 옮겼다.
“보상은 적고, 정책은 막혀” 실무 공직자들 줄잇는 탈출
〈중〉 공무원 ‘퇴직 러시’ 행시 출신 MZ사무관, 로스쿨 시험… “회계사 준비” 붙기도 전에 사표 ‘1년도 안 돼 퇴직’ 3년새 2배로 “인센티브 제공 등 동기 부여 필요”
국과장급뿐만 아니라 MZ세대(밀레니얼+Z세대) 저연차 공무원들의 공직 이탈 역시 잇따르고 있다. 행정고시 출신으로 아직 근무 기간이 3년이 되지 않은 중앙 부처 사무관 A 씨는 최근 로스쿨 면접 시험을 봤다. 그는 “업무 강도는 센데 정작 제대로 수립되는 정책들은 없어 큰 보람이 없다”며 “미래가 잘 그려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A 씨는 로스쿨 합격 결과를 보고 계속 공직에 남을지, 로스쿨로 진학해 공부를 할지 결정할 예정이다.
젊은 사무관들 중에서는 전문직 이직을 고민하는 사례가 많다. 근무 기간이 5년이 넘지 않은 사무관 B 씨는 “회계사나 변호사 친구들보다 공부를 덜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당장 손에 쥐는 연봉에서 차이가 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공직 대신 전문 자격증 취득을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최근엔 기획재정부에서 근무하던 저연차 사무관이 공인회계사(CPA)를 준비하겠다며 퇴사하기도 했다. 기재부 과장급 C 씨는 “지금까지는 다른 회사에 합격을 했다거나 시험에 붙었을 때 퇴직을 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는데 시험을 준비한다는 이유로 사표를 내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1년도 안 돼 공직을 떠나는 공무원 수는 3년 새 2배 가까이로 늘었다. 조승환 국민의힘 의원이 인사혁신처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재직 기간이 1년이 안 된 국가공무원 퇴직자는 3021명이었다. 2020년에는 채 1년이 안 돼 관두는 이들은 1583명에 그쳤다. 재직 기간을 5년 미만으로 넓혀 보면 퇴직자는 1만3568명으로 2020년(9009명)의 1.5배였다.
‘공직 탈출’을 고민하는 저연차 공무원도 70% 가까이 됐다. 행정안전부가 위성곤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설문조사 자료에 따르면 저연차 공무원 중 68.2%는 ‘공직을 그만두고 싶다’ 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공직을 그만두고 싶은 이유(복수 응답)로는 ‘낮은 금전적 보상’이 35.5%로 가장 많았고 ‘악성 민원 등 사회적 부당 대우’ 18.9%, ‘과다한 업무량’ 13.1% 순이었다. 재직 5년 이하 공무원 중 설문조사에 응답한 4만8248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다.
민간 기업으로 이직하기 위해 취업 심사를 받은 공무원은 2년 전보다 크게 늘었다. 인사혁신처 공직자윤리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취업 심사를 받은 공무원은 1126명으로 2022년(917명)보다 22.8% 증가했다. 공무원들의 이탈 움직임은 현 정부의 지지율이 크게 추락하고 임기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더 두드러지는 분위기다. 행정부의 권한과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면서 관료들의 성취감도 함께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고위급 관료들은 자칫 ‘순장조’가 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도 크다.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는 “기업 등 민간조직에서는 본인의 능력을 발휘하고 성취감을 느낄 기회가 훨씬 많은 데 비해 공무원 조직에서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일이 비교적 적다”며 “더군다나 지금은 정치권의 협치가 잘 이뤄지는 상황이 아니다 보니 공무원들이 성취감 측면에서 더 큰 장벽을 느낄 것”이라고 지적했다. 배귀희 숭실대 행정학과 교수는 “공무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제고하고 공무원들이 성과를 냈을 때 인센티브 등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일종의 보상을 받을 수 있게끔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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