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 선포 직후 예규대로 절차 밟으며 김 장관으로부터 지시·지침받아”
“계엄 전날 휴가… 당일 부대에서 TV 보고 사태 파악”
“경찰청장에 선관위 경찰배치 요청한적 없어”
“박안수 당시 계엄사령관과도 통화해 합수본부 개소상황 보고”
“계엄 선포 이후 尹대통령과 통화여부는 확인 못해줘”
“올 봄 경호처장 등 4인방 모임은 계엄 모의 절대 아냐”
여인형 국군방첩사령관(육군 중장·사진)은 6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3일 밤 계엄 선포 직후 당시 김용현 국방부 장관의 지시를 받고 국회와 선거관리위원회에 170여명의 부대원을 보냈다”고 밝혔다. 계엄 사태 촉발 이후 여 사령관이 언론 인터뷰를 통해 계엄 전후 자신의 구체적인 일정과 부대 상황, 계엄 후속 조치 등을 자세히 밝힌 것은 처음이다.
여 사령관은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 사실은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자신도 당일 밤 부대에서 근무 중 TV 뉴스를 보고서야 사태를 파악했다는 것이다.
여 사령관은 윤석열 대통령과 김 전 장관의 충암고 후배로 야당에서 줄곧 ‘계엄 의혹’ 공세를 받아왔다. 계엄 사태가 현실화되자 야당에선 김 전 장관과 함께 여 사령관을 이번 사태를 주도한 인물로 지목하고 있지만 본인은 이를 정면으로 부인한 것.
그는 이번 사태에 대해 “답답하다”면서도 김 전 장관이 계엄 사태를 주도한 이유와 평가에 대해선 “나로선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다”면서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았다.
다만 “나를 포함해 책임질 사람은 책임져야 하고 조사도 받게 될 것”이라면서도 “단 부하와 조직만큼은 다치치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 이전에 어디서 뭐하고 있었나? “1일과 2일은 휴가를 갔다. 1일 일요일 오전에 대전에 내려갔다. 거기서 숙박도 하고 2일 월요일 오후에 복귀했다. 대전에 내려간 이유는 친척 어르신 한분이 건강이 안좋아서 병문안 인사차 갔다 왔다. 휴가 기록에 다 남아있다. 이후 부대 영내 관사에 있었다.”
―계엄 선포 당일 일정은? “순수하게 내부 일정이었다. 휴가 기간 쌓인 업무보고 받고 내부일정 처리했다. 수사 중 사건 관련 사고가 난게 몇건 있어서 저녁까지 참모들 불러서 논의했다. 이후 사무실에서 야근하다가 TV로 실시간으로 계엄선포 상황을 지켜봤다. 엄청 놀랐다. 일전에 국회 정보위 국감때 얘기했지만 계엄령은 기본적으로 전시상황이다.”
―당시 김용현 장관과의 통화 등 후속 상황 파악 안했나? “그건 군인들 특성이 있는데, 그런 일이 나오면 군인들은 제일 먼저 부대내 지휘통제실로 간다. 장관에게 전화해서 이게 뭐냐고 물어보는 것은 하지 않고 곧장 지통실로 갔다. 일단 지통실로 가면서 중간에 참모들로부터 장관 주재 긴급 지휘관 화상회의를 한다고 보고받았다.
근데 지통실로 도착했지만 정작 화상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방첩사는 평시에 지통실과 합참을 화상회의(VTC)망을 연결해놓지 않는다. 대부분 작전상황이니 항시 연결해놓을 이유가 없다. 그래서 연결이 안돼서 화상회의에 참석 못한 것이다. 그 시간에 기술자도 다 퇴근한 시각이고. 30여분 뒤 결국 연결이 됐는데. 이미 회의는 거의 끝난 상황이었다.”
―그 회의는 김용현 장관이 주재했나? “그렇다”
―계엄사 포고령 발표 이후 어떤 조치를 했나? “계엄사령부도 제대로 구성이 안됐고, 우리 직원들도 대부분 위례 지역에 사니까 이 사람들이 부대로 들어와야 시스템이 돌아가는데 그게 1시간이넘게 걸린다. 그 이후 조치들은 쭉 말씀드릴수 있지만 시간대도 불분명하고 헷갈린다. 결론적으로는 방첩사도 후속조치를 해야 하는데 제대로 못한 것이 많다. 영외 거주 소집자 발동이 내렸지만 대부분 밤 12시 넘어서야 거의 다 들어왔다고 보고 받았다.”
―방첩사에서 계엄사령부에 필수요원 파견했나. “못 갔다. 부대원들이 자정이 넘어서 부대로 들어왔고, 이후 임무 확인하고 이거저거 챙기고 하다보면 몇시간이 걸린다. 그렇게 준비하다 오전 1시경 국회 해제요구권 가결되고 흐지부지되면서 필수요원들이 계엄사로 가지 못했다. 결국 계엄 선포 이후 정해진 예규대로 절차를 밟았지만 결국 이뤄진게 거의 없다.”
―왜 이렇게 계엄이 이뤄졌을까 “그건 내가 뭐라고 말씀 못드리겠다.”
―결국 계엄이 실패한 건데 이유가 뭘까. “그것도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다.
―계엄 선포 이전 당시 김용현 장관과 언제 연락했나? “방첩사령관이라 수시로 할 수밖에 없다. 각종 수사현안들로 항상 통화하고 보고드리고 한다. 방첩사가 장관의 직속 국직부대이다 보니 다른 부대에 비해 훨씬 통화할 일이 많다.”
―3일 계엄선포되고도 통화했나? “당연히 통화를 했다. 대부분 통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하고…. 그날 오전에도 수사 현안 갖고 장관에게 보고드리기 위해 통화했다.”
―계엄선포 후 장관 통화하면서 무슨 상황이냐 물어봤나? “왜 계엄령을 했나? 그런 말 못했다, 장관지시 이행, 예규에 따른 조치 등등 최초에 해야할 일이 엄청 많다. 한가지 더 얘기할 것이 내 참모인 방첩처장(준장)이 일요일(1일)에 폴란드 출장을 출발했다. 이번주 금요일에 온다. 만약 내가 사전에 사태를 파악했다면 핵심참모를 해외 출장을 보냈겠나, 더욱이 그 사람은 계엄령이 걸리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계엄사태를 주도한 김 전 장관을 어떻게 보나? “내가 9월 국정감사때 정보위에 나가 얘기한게 있다. 그때 댭변한 내용을 참고해달라. 일부 보도됐는데. ‘계엄은 전시에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 마당에 내가 장관에 대해 뭐라고 얘기하겠나. 핵심참모와 부대원들 앞에서도 그렇게 얘기했다. 난 이러쿵 저러쿵 얘기못한다. 사령관의 생각은 저번 국회 정보위에서 말한 그대로다라고..”
―계엄 선포 이후 박안수 총장과 통화했나? “1번 정도 한 것 같다. 계엄 선포 이후 합수본부 구성 절차 관련 얘기를 했을 것이다.”
―TV로 계엄군의 국회 진입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그것도 이 마당에 말씀 못 드리겠다. 답답했다. 계엄군이 제대로 안해서 답답하다는 의미가 절대 아니니 오해 말아달라.”
―이번 사태가 어떻게 수습 됐으면 좋겠나? “김 전 장관이 언급한 것처럼 부하들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를 포함해서 책임있는 사람들은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다만 우리 조직과 부하는 안 다쳤으면 좋겠다. 1년간 방첩사령관하면서 부대원들이 간첩 잡고 보안을 잘 지키는 등 본연의 임무에 엄청 애를 썼다. 이번 일을 통해서 우리 조직이 흔들릴 수밖에 없겠지만 부하들과 조직은 안 다쳤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사후에 계엄상황을 파악했다고 주장하지만 조사는 불가피할 것 같은데… “당연히 다 조사를 받아야 되고 지금까지 얘기한 팩트(fact)대로 진술할 것이다. 다시 한번 제 입장은 부하들과 조직이 안다쳤으면 좋겠다.”
―올 봄 당시 김용현 경호처장이 주재한 4인방 모임은 계엄을 위한 사전 모의 아니었나? “전혀 사실이 아니다. 강선영 국민의힘 의원이 올해 국감에서 ‘경기특수회’를 언급한적 있다. 경호처와 기무사, 특전사, 수방사 이런 사령관들이 경호처장이나 실장 주관으로 80,90년대부터 가끔씩 모여서 식사하는 관례가 있었다. 1년에 2,3번 정도 한 것인데 그 일환이지. 그때도 모여서 정말 밥만 먹었다.”
―계엄선포 이후 윤 대통령과 통화했나? “확인해줄수 없다, 계엄령 이후 통화했다고 한들 문제될게 없다고 본다.”
―야당 등에서 계엄 선포 이후 국회와 선거관리위원회에 방첩사 부대원 280여명이 출동했다고 주장했는데… “그건 맞다. 정확한 숫자는 170여명이다. 사실 그때 김용현 장관이 전화가 와서 보내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4일 오전 1시경에 선관위와 국회로 (부대원들이) 출동했다. 그런데 4일 오전 1시경 국회에서 계엄 해제 요구안이 가결되면서 어영부영하다가 복귀했다.”
―당시 김 장관이 몇 시에 지시했고? 보내라고 한 이유는? “계엄 선포 직후였다. 보내라고 한 이유에 대해선 계엄사 포고령과 대통령 담화에 있는 내용으로 갈음하겠다. 다만 한 가지는 바로잡을 것이 있다. 일부 언론에서 당시 내가 조지호 경찰청장과 통화하면서 선관위에 경찰 병력 파견을 요청했다고 보도했는데 사실이 아니다. ‘선관위’를 언급한 적이 없다. 계엄 선포 이후 절차에 따라 합동수사본부 구성을 위해 인력을 파견해달라는 요청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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