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희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11월 낸 책 ‘나쁜 권력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탄핵의 정치학’에 따르면 대통령 탄핵을 막을 수 있는 세 가지 방패가 있습니다.
일단 국회입니다. 대통령을 배출해 낸 여당에서 탄핵소추를 저지할 경우 그를 ‘의회 방패’라 합니다. 두 번째는 ‘사법 방패’입니다. 국회에서 탄핵안이 통과됐더라도 탄핵 심판을 담당하는 헌법재판소에서 이를 기각할 경우 탄핵은 그대로 실패하게 됩니다. 아니면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때처럼, 탄핵소추부터 심판에 이르는 과정에서 대중이 나서 탄핵에 강하게 반대할 때도 탄핵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대중 방패’입니다.
이 셋 중 가장 강력한 것은 일반 민심을 담은 대중 방패일 겁니다. 국회가 탄핵소추를 주저하거나, 헌재에서 법리적으로 고민하더라도, 여론이 워낙 탄핵을 강력하게 요구하면 의회 방패나 사법 방패도 쉽게 허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때가 그랬죠. 당시 국회는 ‘노무현 탄핵 실패’의 트라우마 탓에 여당도 야당도 사실 탄핵 추진을 주저했던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런 국회를 움직이게 한 건 한겨울에도 광화문을 가득 채운 촛불집회였습니다.
지난 14일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 뒤로 이어지는 윤석열 대통령의 행태를 보면 아예 작정하고 시간 끌기에 들어간 듯합니다. “법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라던 그는 벌써 일주일 가까이 대통령 경호처 뒤에 숨어 수사기관의 출석 요구엔 불응하고, 헌재의 탄핵 심판 서류도 수령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64번째 생일날(18일) 한남동 관저로 도착한 지지자들의 축하 꽃바구니는 잘만 받았더군요.
김홍일 전 방송통신위원장을 변호인단 대표로 정했다면서 수사기관에 변호인 선임계를 내지 않고 있는 것도 수사 지연 목적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옵니다. 윤 대통령은 ‘변호인단 구성이 완료되지 않았다’라는 명분으로 검찰과 공조수사 본부 출석요구에 불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변호인단 구성을 지원하는 서울대 법대 동기이자, 40년 지기라는 석동현 변호사는 ‘시간 끌기’라는 지적에 “국회의 탄핵 가결이 성급하게 이뤄진 측면이 있다”, “대통령께서 최고의 변호인단을 구성하기 위해 여러 생각을 하고 준비 중”,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하지 않겠나. 시간 끌기라고 하는 건 너무나도 성급한 것”이라고 오히려 발끈하더군요.
이를 두고 야권 관계자는 “검사 출신인 윤석열이 최고 전관들을 줄줄이 동원해 끝까지 법리 다툼을 해보겠다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사법 방패’를 시도해 보겠다는 의도라는 거죠.
어느덧 ‘도로친윤당’이 돼버린 국민의힘을 앞세운 ‘의회 방패’도 다시 꺼내보려는 듯합니다. 한동훈 대표가 쫓겨나듯 물러난 자리는 친윤(친윤석열)계 핵심인 권성동 원내대표가 기다렸다는 듯 꿰찼습니다. 권 원내대표는 취임 직후 처음으로 원내대책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대통령 권한대행은 대통령 궐위 시에는 헌법재판관을 임명할 수 있지만, 대통령 직무 정지 시에는 임명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아직 대통령이 직무만 정지된 상태이기 때문에 국회 몫으로 추천된 3명의 헌법재판관을 임명할 수 없다는 취지입니다.
본래 9인 체제로 가동되는 헌재는 그동안 여야가 서로 탓만 하며 후보 추천을 미루면서 현재 6인 체제로 운영되고 있죠. 예상치 못하게 앞당겨진 탄핵 시계에 민주당이 부랴부랴 국회 몫 3명 후보자 임명을 이달 내로 마치겠다고 속도전에 나서자 이에 제동을 건 겁니다.
권 원내대표는 그러면서 한 권한대행을 향해 농업 4법과 국회법, 국회증언감정법 개정안 등 6개 쟁점 법안에 대해선 재의요구권(거부권)을 쓰라고 재차 압박했죠. 거부권 때는 행정부 수반으로서 대통령 권한대행의 지위를 인정했으면서, 헌법재판관 임명권 행사 때는 국가 원수가 아니라서 안 된다는 자가당착에 빠진 셈입니다. 이를 두고 민주당은 물론이고 개혁신당에서도 “국회 몫 헌법재판관을 단순 임명하는 것은 못 한다고 하면서 거부권 행사는 가능하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국민의힘은 이런 권 원내대표의 발언을 신호탄 삼아 국회 몫 헌법재판관 인사청문회 관련 일정에 모조리 불참하고 있습니다. 민주당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23, 24일 야당 단독으로 인사청문회를 진행한다고 합니다. 법치주의의 상징인 헌재 재판관 청문회마저 이렇게 기형적으로 치러져도 과연 괜찮은 걸까요.
국민의힘 의원들은 ‘내란’이란 단어에 발끈하며 상임위원회 퇴장도 밥 먹듯 하고 있습니다. 17일 열린 기획재정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국민의힘 최은석 의원은 ‘내란 비상계엄’이라 언급한 민주당 의원을 향해 “내란 여부는 수사가 진행 중”이라며 “결론이 나지 않았는데 마치 내란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항의했습니다. 같은 당 박대출 의원도 “내란죄는 사법기관에서 판단하기 때문에 국회에서 예단해서 국민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말은 자제해야 한다”며 속기록에서 ‘내란’이란 표현을 삭제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전날 외교통일위원회에서도 ‘내란수괴’라는 민주당 의원의 표현에 국민의힘 소속 김석기 위원장이 “아직 수사 단계에 있고 (윤 대통령이) 내란수괴로 밝혀진 적이 없다”고 반발했다가 결국 고성 끝에 산회했죠. 홍길동도 아니고, 내란을 내란이라 부르지 못하면 뭐라고 부릅니까.
“내란이 아닐 수도 있다”는 윤석열과 여당의 정신 승리와 달리, 탄핵을 막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대중 방패’는 더 이상 작동하기 힘들어 보입니다.
엠브레인퍼블릭 등 4개 여론조사업체가 지난 16~18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02명에게 물은 결과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이 ‘잘된 결정’이란 응답이 78%였습니다. 40대가 91%로 가장 높았고, 30대 83%, 50대 80%, 20대 79%, 60대 74%, 70세 이상 56% 순이었습니다. 전 세대와 전 지역에서 잘 된 결정이란 답이 잘못된 결정이란 답보다 높게 나타났습니다.
‘탄핵이 인용돼 윤 대통령이 파면될 것’이라고 보는 응답자는 73%였습니다. 이 역시 전 세대와 전 지역에서 파면될 것이란 응답이 ‘탄핵이 기각돼 직무에 복귀할 것’이란 응답보다 높았습니다. ‘헌법재판소가 탄핵 심판 결론을 가급적 빨리 내야 한다’는 응답은 68%였습니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결정해야 한다’는 응답은 30%였는데, 역시 전 세대, 전 지역에서 ‘빨리 내야 한다’는 응답이 더 많았습니다.
시간을 끌면서 여론 변화를 기대하기엔 이미 그날 새벽 너무 많은 국민이 불법 계엄의 현장을 실시간으로 지켜봤습니다. 어느덧 사람들은 ‘잃어버린 12월’을 뒤로 하고 일상으로의 복귀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취소됐던 송년회가 다시 열리고 있고, 더 이상 계엄과 탄핵이 주요 대화 주제가 아닌, 소소한 일상으로의 회복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법적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던 윤 대통령이 그 약속만이라도 지켜서, 더 이상 평범한 연말을 방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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