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협 국회로 부른 이재명, 상법 개정 사실상 못박아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3월 5일 22시 04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왼쪽)가 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경제 활성화를 위한 더불어민주당-한국경제인협회 민생경제간담회’에 참석해 류진 한경협 회장과 대화하고 있다. 2025.3.5/뉴스1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5일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와 만났지만 상법 개정안과 주 52시간 예외 규정을 제외한 반도체특별법 추진에 대한 입장 차만 재확인했다. 상법 개정안과 52시간 예외 적용에 대한 재계의 우려에 이 대표는 “시장에 대한 불신 해소가 먼저”라는 기존 입장을 밝히며 상법 개정안 처리 필요성을 못박은 것이다.

한경협은 이날 비공개 회담에서 이사의 충실 의무 범위를 ‘회사’에서 ‘회사와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에 대한 우려를 이 대표에게 전달했다고 밝혔다. 재계는 개정안이 처리될 경우 이사진을 향한 줄소송을 우려하고 있다. 한경협은 반도체특별법에 주 52시간 예외 적용 규정을 포함해줄 것도 요청했다. 민주당 대표와 한경협이 만난 건 2015년 문재인 대표와 허창수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한경협의 전신) 회장이 만난 이후 10년 만이다.

이에 대해 이 대표는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게 최우선”이라며 “(정부·여당이 추진하는) 자본시장법 개정도 생각하고 있지만, 투자자들이 갖는 시장에 대한 불안감과 불신을 근본적으로 해소하지 않으면 기업 경쟁력도 높아지기 어렵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 대표는 이날 “대규모 투자 또는 위험성이 높지만 성공했을 경우 이익이 매우 큰 영역은 개별 기업 단위로 하기 어렵다”며 “국부펀드든, 국민펀드든, 국가의 지원을 넘어 국가적 차원의 투자라도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한다”고 했다.

정부 투자로 ‘한국판 엔비디아’ 등 인공지능(AI) 기업을 육성하겠다는 뜻을 재차 밝힌 것이다. 이에 앞서 이 대표는 “엔비디아 같은 회사가 하나 새로 생겼다, 그중 국민 지분이 30%라면 70%는 민간이 가지고 30%를 국민 모두가 나누면 굳이 세금에 의존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밝혔고, 이에 여권에서 “사회주의적 접근”이라며 반발해 논란이 일었다.

재계 “상법개정 우려”에 선그은 이재명 “배임죄 폐지는 검토 가능”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경제 활성화를 위한 더불어민주당-한국경제인협회 민생경제간담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오른쪽은 류진 한경협 회장. 2025.3.5/뉴스1
“(주52시간 근로 예외 적용 등) 일부 쟁점이 있지만 반도체특별법에 대해 대타협의 물꼬가 터졌으면 좋겠다.”(한국경제인협회)

“기본적으로 투자자들이 갖는 시장에 대한 불안·불신을 해소하지 않으면 기업 경쟁력도 높아지기 어렵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이 대표가 한경협 회장단과 5일 회동에서 상법 개정안과 반도체특별법에 대한 재계 측 입장을 수용하기 어렵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 대표의 우클릭 행보를 두고 진정성 논란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10년만에 옛 전국경제인연합회의 후신인 한경협과 만나 친(親)기업 기조를 강조했지만 상법개정안 보류 등 기업들의 요구에 대해선 선을 그은 것이다.

●李-한경협, 주52시간·상법 놓고 평행선

류진 한경협 회장은 이날 비공개로 진행된 회담에서 이 대표에게 주52시간 예외 규정, 이른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을 포함한 반도체특별법 처리를 요청했다. 류 회장은 고용 유연성이 높아져야 고용이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이 대표는 “(업계에선) 주52시간 예외 규정이 필요 없다는 주장도 있다”며 “총 노동시간을 늘리지 않고 추가근로에 대해 수당을 지급하는 조치라면 현행 제도 내에서 운영이 가능하다”고 반박했다고 한다. 민주당은 주52시간 예외규정을 삭제하고 산업 지원 방안만 담은 반도체특별법을 통과시키기로 하고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

상법 개정안에 대해서도 양측은 이견을 재확인했다. 민주당 조승래 수석대변인은 회동 후 기자들과 만나 “자본시장 투명화 조치를 통해 자본시장이 활성화되면 기업의 자금 조달 걱정이 줄어들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재계는 경영권 침해 소지가 있다며 반대하고 있지만, 상법 개정안을 통해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해소되는 게 장기적으로 재계에도 이익이라는 취지다.

다만 이 대표는 배임죄 폐지에 대해선 검토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기업들은 상법개정안이 통과되면 기업 경영진을 상대로 소액주주나 외국계 펀드가 배임죄 소송을 남발할 수 있다고 우려해왔다. 한 회동 참석자는 “이 대표가 ‘본인도 배임죄로 재판을 받고 있다’면서 배임죄 폐지가 필요하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재계는 상법개정안의 독소 조항에 대한 우려를 해소하기는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한 재계 관계자 “배임죄를 처벌하는 법은 일반 형법과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 상법 등 세 가지”라며 “상법상의 배임죄를 폐지한다 하더라도 형법이나 특경법상 처벌은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국가 투자 ‘빨갱이’ 비난해선 대화 안돼”

이 대표는 국부펀드를 통한 국가 차원의 전략산업 집중 투자 방안도 재차 강조했다. 이 대표는 비공개 회동에서 최근 자신의 ‘한국판 엔비디아’ 발언에 대한 여권 반발을 언급하며 “국부펀드로 투자하겠다는 것을 정쟁화해서 ‘빨갱이’라고 비난하면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대표는 이날 오전 당 최고위원회의에서도 여권을 겨냥해 “이런 정도의 지식 수준·경제 인식으로는 험난한 첨단산업 시대의 파고를 넘어갈 수가 없다”며 인공지능(AI) 기술 관련 투자와 국가의 역할 등에 대한 공개 토론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류 회장은 “꺼져가는 성장동력을 되살리기 위해 국회와 정부, 국민과 기업이 힘을 합쳐야 한다”며 “성장의 마중물인 기업투자를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기업 활동 지원을 위해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며 “규제 리스트를 작성해 동그라미, 세모, 엑스를 쳐서 불필요한 규제는 과감히 없애자. 다만 국민안전과 밀접하게 관련된 부분은 꼼꼼하게 규제할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한경협은 이날 △통합투자세액공제 대상 자산 확대 △임시투자세액공제 연장 △방산 분야를 국가전략기술에 추가 등 ‘경제 살리기 10대 정책과제’를 민주당에 전달했다. 류 회장은 민주당 대표와 한경협 간의 만남이 10년만이라는 점을 언급하며 “예전에 차인 여자친구를 만나는 듯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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