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문민개혁의 탄생1.인사가 망사된 문민정부 첫조각(1월1일) 2.사라진 개혁안 동숭동 프로젝트(1.3) 3.김현
《문민정부에 참여했거나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의 인사들은 문민정부의 공과(功過
97년 10월24일 김영삼(金泳三·YS)대통령과 조찬을 함께 하고 청와대를 나온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DJ)총재의 표정
15대 대선이 김대중(金大中)후보의 승리로 끝난 뒤 정치권에서는 ‘일등 공신은 누구’라는 식의 해설들이 난무
신한국당 대통령후보인 이회창(李會昌)총재의 지지도가 10%대까지 추락한 뒤 좀처럼 반등의 기미가 보이지 않던 9
97년 9월 하순경 배재욱(裵在昱)청와대사정비서관이 신한국당 정형근(鄭亨根)의원에게 건네준 ‘DJ비자금’자료는
15대 대통령선거를 3개월 가량 남겨놓은 97년 9월13일 오전10시 서울 여의도 맨하탄호텔 2층 홀. 신한국당 대통
97년 8,9월을 거쳐 이회창(李會昌)후보의 지지도가 아들의 병역문제로 급락하면서 신한국당내에서 ‘대안’
김영삼(金泳三)대통령과 이회창(李會昌)총재의 ‘악연(惡緣)’ 때문에 가장 마음고생이 심했던 사람은 강삼재(姜三
15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던 97년 10월22일 오전10시. 서울 여의도 신한국당 당사 3층 기자실에는 긴장이 감돌
신한국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를 보름 정도 남겨두고 있던 97년 7월5일 밤. 신한국당 당내 경선이
신한국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을 앞둔 97년 7월 정치권에 퍼진 ‘김심(金心)〓이수성(李壽成)후보’라는 소문의
15대 대통령선거를 위한 레이스가 막 시작될 무렵이던 97년 9월5일 아침. 정가는 김종필(金鍾泌·JP)자민련 총재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 임기중 기회있을 때마다 ‘내각제 개헌 반대’ 소신을 분명히 밝혔다. 남북한 대치상황
노동법 파동으로 정국이 파란을 거듭하고 있던 97년 초 들이닥친 ‘한보태풍’은 문민정권 탄생의 주역인 민주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