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실명제 주역들의 관운(官運)은 대체로 기복이 심한 편이었다. 이경식(李經植)부총리는 실명제 실시 후 우루과이
93년7월20일 이경식(李經植) 부총리는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에게 실명제 계획을 보고하기 위해 청와대에 들어갔다.
“저는 이 순간 엄숙한 마음으로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을 발포합니다.” 금융실명
금융실명제 D데이(93년 8월12일)는 어떻게 결정됐을까. 그날은 공직자 재산등록 마감일이자 대구 보궐선거일이었
금융실명제를 둘러싸고 경제부처 공무원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란은 비유법으로 이뤄졌다. 고위 관료들이 김영삼(金泳三
문민정부가 출범한 지 반년 쯤 지난 93년 9월 중순 서울 시내 모처. 이경식(李經植)경제기획원장관겸 부총리와 김
▼1차〓이철희―장영자 어음사기사건 직후인 83년 5월 재무부는 은행감독원을 한국은행에서 분리하는 것을 골자
▼ 홍재형전부총리 95년 3차 한은법 파동 당시 한국은행 산하의 은감원을 금융감독원으로 확대개편해 재경원 산
95년 2월20일 아침 홍재형(洪在馨)부총리겸 재정경제원장관이 김명호(金明浩)한국은행 총재에게 전화를 했다. “긴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의 독립은 정치 경제적 변동기마다 이슈로 등장해왔다. 한은의 독립이란 정권은 물론 정
94년 11월15일 인도네시아의 보고르에서 자카르타로 가는 고속도로. 보고르궁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세계화를 기존에 추진해온 국제화와 차별화하기가 쉽지않다보니 그에 대한 해석도 중구난방으로 나왔다. 94년말과 95
김영삼(金泳三·YS)전대통령의 ‘정치자금 수수거부 선언’은 문민정부의 ‘경제실세’들과도 묘한 인연이 있다.
경제부처가 모여 있는 정부과천청사에서는 95년 여름 ‘6―3―1―1백PPM’이란 말이 유행했다. 청와대 경제수
문민정부 출범 직후인 93년 3월초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실. 신임 박재윤(朴在潤)경제수석비서관이 경제기획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