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정부’를 내걸고 출범한 현 정부가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저질렀던 권력주변 비리를 되풀이 한 과(過)의 부분 뿐만 아니라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분단이후 처음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공(功)의 부분도 있는 그대로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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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여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에게 비서실을 통해 보고서 하나가 전달됐다.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고문이 전
1999년 7월22일. 이만섭(李萬燮) 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에게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새
2000년 12월. ‘한빛은행 게이트’ 연루 의혹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직을 물러난 뒤 ‘야인(野人)’ 상태로 있던 박
1999년 5월. 새로 국가정보원장에 취임한 천용택(千容宅)은 취임하자마자 ‘국정주도 드라이브’를 걸었다. 당
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앞둔 2000년 6월경. 외신들은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된 140명의 개인 및 단체 가
2001년 3월. 신건(辛建) 국가정보원장이 취임한 지 두 달쯤 뒤의 일이다. 여권 관계자 Y씨에게 “신 원장이 고향인
DJ정부의 국가정보원이 각종 게이트와 인사잡음으로 얼룩졌던 결정적 원인은 인사편중 때문이었다. 특히 국정원
“직접 불러 ‘같이 일하기 어렵게 됐으니 그만둬 달라’고 할 일이지 여기저기 신문에 나게 하다니….” 2000년 5
99년 7월 18일 서울 워커힐호텔의 한 빌라.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자민련 김종필(金鍾泌) 총리와의 부부동반
98년 2월 11일 오후 5시쯤.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 아태재단 사무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당선자는 비상경제대책위
2001년 1월. 여권 핵심부에서는 국가정보원이 청와대를 감청했다는 얘기가 상당한 신빙성을 갖고 나돌았다. 여권
2001년 11월8일 아침.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이상주(李相周) 대통령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오후
2000년 8·30 민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내 유력자들의 암중 모색이 본격화하던 4월 말 어느 날. 한화갑(韓和甲)
99년 11월9일.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지방행사차 대구에 내려가 있던 김중권(金重權) 비서실장을 찾아 “급
형님, 혀를 깨물고 죽더라도 김포공항에 들어가서 죽어야 합니다.” 98년 12월 어느날 권노갑(權魯甲) 전 민주당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