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15일 오전 부산대 도서관. 중간고사를 앞두고 공부에 열중하던 학생들에게 난데없이 유인물이 배포됐다. ‘현 독재 집권층은 유신헌법을 철폐하고 물러날 것을 요구한다’라고 적힌 ‘민주선언문’이었다. 이어 ‘도서관 앞으로 모이라’는 유인물이 뿌려졌지만 모인 학생들은 …
1979년 10월 3일 밤 9시경 YS는 장충체육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요원의 안내를 받아 승용차로 채 1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한 양옥집에 도착했다. 김재규 부장이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단둘이 앉았다. YS가 먼저 “무슨 얘긴지 말을 해보시오” 하고 말을 꺼냈다…
YH 사건 이후 김영삼 총재 체제가 이끄는 신민당과 박정희 정권은 정면 대결을 시작한다. 신민당 의원들이 마포 당사에서 농성을 벌인 지 3일째 되던 79년 8월 13일 의외의 일이 터진다.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전당대회에서 김 총재 당선은 무효라며 직무집행 가처분신청을 제출한…
1979년 8월 11일 새벽 신민당사는 ‘생지옥’으로 변했다. 당원들은 현관 셔터를 내려 경찰 진입을 막으려 했으나 정·사복 경찰 1000여 명을…
‘와이에이치(YH) 무역회사’ 노동자들은 79년 3월 30일 회사가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폐업해버리자 넉 달 동안 노동청을 비롯해 관계 기관을 찾아다니며 필사적으로 대책을 호소했다. 하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마지막 수단으로 “정상화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며 재야인사들에게 도움을…
‘박치기’ 사건이 있고 난 10여 일 후 다시 청와대 기자단이 상춘재 아래 잔디밭에서 대통령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출입 기자들이 모두 여기저기 의자에 앉아 자리를 잡자 대통령이 엄숙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지난번에 내가 실수를 한 모양인데, 이 자리를 빌려 강 기자…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서거한 1979년은 격동의 70년대를 마감하는 해이기도 하면서 한국사의 중요한 대전환점이 되는 해이다. 집권층에 대한 민심의 불신은 이미 그 전해 말 총선에서도 드러났지만 유신 정권은 이를 정치적 위기로 받아들이기에 너무 경직됐고 오만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서거한 1979년은 격동의 70년대를 마감하는 해이기도 하면서 한국사의 중요한 대전환점이 되는 해이다. 집권층에 대한 민심의 불신은 이미 그 전해 말 총선에서도 드러났지만 유신 정권은 이를 정치적 위기로 받아들이기에 너무 경직됐고 오만했다. 하지만…
YS와 박정희 대통령 간의 감정의 골은 이미 1975년부터 깊어져 있었다. 시계를 그때로 잠시 돌려보자. 베트남 패망(75년 4월 30일)이 임박한...
중동특수 효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76년부터 79년까지 한국 경제는 사상 최대 호황을 기록한다. 성장률은 1976년 10.6%, 77년 10.0%, 78년 9.3%였다. 78년에는 1인당 GNP가 1000달러를 넘어 당초 계획보다 2년이나 앞선다. 하지만 ‘수치로만 배부른 고도…
카터 대통령이 추진한 주한 미군 철수는 이뤄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미국 내 반대가 갈수록 커졌기 때문이다. (당시 김용식 주미대사는 86년 동아일보에 ‘외교 33년 회고록’을 연재했는데 여기에는 70년대 후반 한미 갈등이 생생하게 소개돼 있다. 이하 내용은 당시 신문기사들과 그의 회고…
1976년 말 김지하에 대해 ‘징역 7년’이라는 법원의 최종 선고가 내려지고 본격적으로 그가 감옥생활을 보낸 77년부터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79년까지는 독자들도 주지하다시피 긴급조치 9호가 지배했던 시대였다. ‘긴조 시대’가 장기화되면서 한국 사회에는 장기 집권에 따른 피로감이 쌓…
재판이 끝나자 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김지하는 미친 듯이 책을 읽어댔다. 그는 “현재 내가 가진 지식의 거의가 그 무렵 수많은 독서의 결과”라고 말한다. 당시 주로 몰두한 책들은 생태학, 선불교, 테야르 드 샤르댕(프랑스의 가톨릭 사제이자 고생물학자였으나 진화론을 주장했다)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