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 여사를 모르고 박근혜 대통령을 이해할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을 엄하게 양육한 사람은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책…
육 여사는 가난을 모르고 자랐지만 1950년 말 결혼 이후 1958년 박정희 대통령이 소장으로 진급하기 전까지는 전셋집을 전전했고, 때로 의식...
지학순 주교가 연행돼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은 3일 뒤인 1974년 8월 15일은 광복 29주년 기념일이었다. 이날 오전 10시 6분 남산 국립극장. 박정희 대통령 내외의 입장을 알리는 장내 방송과 함께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무대 오른쪽에서 나오자 모두 기립해 박수로 맞았다. 박 …
김수환 추기경과 박정희 대통령의 면담은 7월 10일 저녁,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추기경은 저녁 6시 명동성당에서 서둘러 청와대로 향했다. 지방에서 상경한 신부들과 수녀들은 철야 기도를 하면서 면담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추기경은 평화신문에 연재한 회고록에서 “청와대에 도착했더니 신직…
권위주의 시대 중앙정보부(중정·현 국가정보원)는 권력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국민은 한동안 중정 대신 중정이 있던 ‘남산’이라는 호칭을 썼다. 5·16 직후인 1961년 6월 20일 중정이 창설되자 사무실은 서울 태평로, 남산 3호 터널 입구, 남산 북쪽 숭…
김지하는 서울에 있을 때 외롭고 쓸쓸할 때면 자주 가는 곳이 하나 있었다. 바로 절두산 성지였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 한강가에 있는 산봉우리인 절두산은 피로 물든 역사의 땅이다. 예로부터 나라의 역적을 목을 베 죽인 곳이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천주교도들이 처형된 순교지다.…
1971년 11월 2일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 6개월을 선고받은 조영래는 1973년 5월 21일 대전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한다. 김지하는 그해 가을 조영래와 만난다. 그리고 ‘민청학련’ 이야기를 꺼낸다. 그의 말이다. “조영래를 만난 곳은 신촌 로터리 작은 …
서울지검 공안부는 1974년 2월 25일 서울을 거점으로 한 ‘문인 간첩단’을 적발했다며 이호철 정을병 김우종 임헌영 장병희 5명을 반공법 위반 및 간첩 혐의로 구속하고 언론인 천관우 등에 대해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재일 공작지도원에게 포섭되어 문단 언론계 학계의 동태를…
재야의 유신헌법 개헌 서명운동은 열기를 더해가고 있었다. 운동을 시작한 지 1주일 만인 1974년 1월 1일 서명자는 5만 명을 넘어섰고 8일엔 10만 명을 넘어섰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이라 할 수 있는, 1970년대 중에서도 가장 뜨거웠던 한 해로 꼽히는 1974년이 밝…
김종필 국무총리는 1973년 12월 26일 밤 9시부터 10시 40분까지 1시간 40분에 걸쳐 전국의 TV 및 라디오를 통해 “헌법을 고쳐야 되느니, 가두서명을 하느니, 민주회복을 하느니 하는 일체의 행위는 삼가야 하며 세상을 시끄럽게 하거나 선동하는 것은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는 …
DJ가 납치됐다가 극적으로 살아 돌아온 날인 1973년 8월 13일 김지하는 마산 병원에 들렀다 나온 뒤 마산항 부두에 서 있었다. 왜 갔는지는 기억에 없다고 했다. 갑자기 경찰관이 다가와 동행을 요구했다. 그는 경찰서에 와서야 잡혀온 까닭을 알았다고 한다. DJ가 돌아오자마자 전국에…
1973년 11월 28일 이화여대생 4500여 명이 대강당에서 예배를 마친 후 시위에 돌입했다. 김옥길 총장도 11월 30일 정부에 건의서를 보내는 ‘행동’에 나섰다. 그는 건의서에서 ‘이화여대를 포함한 대학생들이 선언문이나 결의문에서 표명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조목조목 나열했다…
DJ 납치 사건이 일어난 지 두 달여가 지난 1973년 10월 19일 중앙정보부가 충격적인 발표를 한다.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가 간첩 혐의로 구속된 후 혐의 사실을 자백한 뒤 창밖으로 투신자살했다는 것이었다. 최 교수는 10월 16일 오후 2시 중앙정보부에서 수사 중이던 간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