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DJ 납치 사건을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민주당 권노갑 상임고문에게 전화를 걸었다...
1973년 7월 3일 오후 2시 포항종합제철 1기 설비종합 준공식으로 나라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70년 4월 1일 첫 삽을 뜬 이후 3년여 만에 연산 조강능력 103만 t 규모로 동남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일관제철 시설을 갖추게 된 것이다. 국민들은 대한민국이 비로소 경제도약의 길…
1973년 1월 어느 날 김지하가 몸을 피해 머물고 있던 원주 집으로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박경리 선생과 딸 김영주였다. 모녀는 72년 10월 17일 유신이 선포된 날 “숨겨 달라”던 김지하를 그냥 떠나보낸 게 못내 마음에 걸려 일부러 내려왔다고 했다. 너무 미안하고 고마웠다…
기자는 김지하와의 인연을 취재하기 위해 이종찬 전 국정원장을 만났을 때 ‘유신에 대한 평가’를 물은 적이 있다. DJ정부 때 국정원장을 하고 박정희 시대에는 민주인사를 도왔던 사람이니 비판이 강할 것으로 예상...
박정희 대통령은 국방과학연구소에 “1976년까지 최소한 이스라엘 수준의 자주국방 태세를 목표로 총포, 탄약, 통신기, 차량 등의 기본 병기를 국산화하고, 1980년대 초까지 전차, 항공기, 유도탄, 함정 등 정밀 병기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이 긴급 지시…
김지하가 원주로 내려간 1972년 12월 서울에는 또 큰불이 난다. 서울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 화재였다. 12월 2일 토요일 오후 8시 반, 시민회관은 자리를 가득 메운 청중들의 열기로 뜨거웠다. 문화방송(MBC) 개국 11주년 축하공연인 10대 가수 청백전이 열리고 있었다. 공연…
10월 유신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대통령 특별선언이 나온 지 일주일 만인 10월 27일 해산 국회를 대신하는 비상국무회의가 열려 새 개헌안을 의결했다. ‘유신헌법’은 11월 21일 계엄하에 국민투표에 부쳐져 절대 다수(91.5%)의 찬성을 얻어 확정된다. 대통령 임기는 6…
8월 30일 이산가족을 찾기 위한 제1차 남북적십자회담이 평양 대동강 문화회관에서 열리면서 대한민국 사회는 당장이라도 통일이 될 것 같은 분위기로 들떴다. 그러나 2개월도 안 된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을 선포한다. “조국의 평화와 통일, 번영을 희구하는 국민 모두의…
사채동결 조치는 화폐개혁보다 더 비밀 엄수가 생명이다. 화폐개혁이야 만에 하나 새어 나가더라도 철회하면 그만이지만 사채 동결은 시장이 뭔가 수상하다는 낌새를 챌 경우 사채업자들이 동시다발로 기업에서 돈을 빼낼 것이어서 경제가 아수라장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경제 원로들의 육성 증…
7·4남북공동성명이 나온 뒤 한 달 가까이 지난 1972년 8월 2일 오후 11시 40분경. 장대 같은 여름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그 시간, 청와대에서는 대통령 주재로 심야 임시 국무회의가 열린다. 군사작전처럼 비밀리에 마련되어 8월 3일 0시를 기해 발포된 대통령 긴급명령 제15…
국제 정세는 1969년 말부터 긴장 완화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선다. 첫 테이프를 끊은 것은 서독이었다. 서독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5년 동안 동서 양 진영 대립의 한 축이었던 소련과 우여곡절 끝에 ‘서독 소련 조약’을 맺는다. 향후 무력을 행사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경제 기술…
매년 대형 사건들이 정국을 뒤흔들어댔지만 1972년은 더했다. 오죽했으면 그해 말 동아일보가 72년을 정리하면서 ‘충격의 홍수’라는 제목을 달았을까. 그중에서도 빅뉴스는 뭐니 뭐니 해도 7·4남북공동성명이었다. 1972년 7월 4일, 아침부터 여름비가 내리고 있었다. ‘곧 중대 …
‘25년 동안 원고지 3만1200장.’ 대한제국 때인 1897년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 때까지 벌어진 한국 역사의 굴곡과 파장을 담은 ‘토지’의 집필 기간과 원고 장수에서 박경리 선생이 세운 기록은 아직도 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