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원주에 머물던 김지하는 서울에 올라오면 문단의 지인들과 어울렸다. 1971년 가을 그날은 ‘현대문학’ 편집장 김국태 형(2007년 작고·소설가·김근태의 형)과 소설가 유현종(73·전 한국문학예술진흥회장·전 중앙대 국문과 교수)과 함께였다. 일행은 1차를 마치고 더 마시고 싶었지만…
마산국립결핵요양원에서 자유롭게 면회가 허용된 김지하가 맨 먼저 만난 이는 지학순 주교였다. 지 주교는 요양원 안 천주교 공소(公所·주임신부가 없는 기도소)에서 직접 미사를 집전했다. 미사가 끝난 뒤 두 사람은 병실에 마주 앉았다. 김지하의 회고다. “우리는 향후 운동방향을 놓고 …
김대중 정부시절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은 육사를 졸업하고 1965년에 정보장교의 길을 택해 중앙정보부에 공채로 들어간다. 이후 중앙정보부 총무국장·기획조정실장을 거쳤으며 11∼14대 국회의원, 민정당 원내총무·사무총장을 지냈다. 이종찬 김지하 두 사람의 만남은 김지하가 ‘오적’을…
2005년 사회과학연구지에 발표한 ‘유신체제 수립 원인에 관한 재조명’이란 제목의 논문을 쓴 신종대 씨(경남대 북한대학원)는 71년 당시 안보 불안에 대한 전 국민적 공감대가 있었음을 자세히 지적하고 있다. 68년 1·21 청와대 기습과 이틀 후 푸에블로호 납치 만행을 저지른 북한…
기자는 이번 연재물을 위해 취재를 하면서 70년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사들을 많이 만났다. 유독 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똑같았는데 그가 바로 조영래였다. 물론 모두 칭찬 일색이었다. 그리고 그의 요절에 대해 모두 안타까워했다. 조영래는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 사건으로 붙잡혀간 …
1971년 8월 23일 경기 옹진군 용유면 실미도에서 훈련을 받던 특수부대원들이 서울로 진입해 군경과 교전한 ‘실미도’ 사건이 터졌다. 요즘 신문과 방송에도 북파공작원들의 후일담들이 공개되고 있지만 실미도 사건은 북파공작원의 존재를 만천하에 드러낸 최초의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정래…
서울시는 1971년 4월 대통령선거, 5월 국회의원선거가 끝난 직후인 6월, 광주대단지 주민들에게 융자금을 일시불로 상환하고 6월 10일까지 집을 짓지 않을 경우 땅 불하를 무효화하며, 평당 8000∼1만6000원에 땅을 사라고 독촉했다. 설상가상으로 경기도는 취득세까지 부과했다. 날…
‘증조부가 노비였던 난쟁이는 서울 낙원구 행복동 무허가 주택에서 아내와 삼남매를 데리고 힘겹게 살아간다. 아내는 인쇄소 제본공장에...
1971년 7월 정국을 강타한 ‘사법파동’은 한마디로 검사가 정권에 밉보인 판사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판사들이 대거 집단사표를 낸 사건이다. 언론들은 ‘국가 중대 사건’이라고 연일 대문짝만 하게 보도했다. 사건의 발단은 1971년 7월 28일 서울지검 검사가 서울형사지법 3부 재판…
1970년 9월 29일 서울시민회관(지금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신민당 임시전당대회에서 김대중 씨가 이듬해 4월에 치를 대통령 선거 후보로 지명됐다...
시계를 잠시 되돌려 1969년 5월 7일 청와대로 가보자. 당시 공화당 대변인이었던 김재순 의원이 박정희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청와대로 들어갔다. 김 의원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저는 (3선 개헌) 반대입니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이 “나, 한 번만 더하고 그 이상…
1970년이 저물어가던 11월 13일이었다. 김지하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아우이자 그 전해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조영래가 급히 보자고 해서 명동성당 건너편 골목 입구 이층 찻집으로 들어섰다. 장기표 이종률 심재택도 함께 있었다. 다들 표정이 침통했다. 김지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