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적 필화사건은 1970년 민주화투쟁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부정부패를 고발한 ‘오적’은 이미 그때부터 조짐을 보인 압축성장의 그늘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4월 와우아파트 붕괴에 이어 12월 여객선 남영호가 적정 화물량의 3배가 넘는 짐을 싣고 가다 침몰해 무려 …
1970년 새해가 밝았지만 정국 상황은 날이 갈수록 뒤숭숭해지고 있었다. 3월 17일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승용차 안에서 고급 요정 마담이었던 정인숙(1945∼1970)이 권총으로 살해되어 변사체로 발견된 것. 함께 발견된 옷가방에서는 당대 저명인사 26명의 명단이 나왔다는 사실…
1969년 6월 김지하는 2년 반 만에 퇴원한다. 그리고 2개월 뒤 취직을 한다. 그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직업을 갖게 된 것이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폐결핵으로 몸이 엉망이 된 상태에서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그도 생활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이 생겼다. 게다가 아버지의…
1968년 1월 21일이었다. 폐결핵에 걸린 김지하가 입원해 있던 서울 은평구 역촌동 시립병원 안이 벌집 쑤신 듯 시끄러워졌다. 총검을 든…
김지하가 병원에 있던 1967년은 제6대 대통령선거(5월 3일)가 있는 해였다. 여당 공화당은 “박 대통령 다시 뽑아 경제건설 계속하자”를 구호로 내세웠고 야당 신민당은 “빈익빈이 근대화냐, 썩은 정치 갈아치자”로 맞섰다. 판도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한일협정…
1965년 9월 4일 고려대 연세대에 무기한 휴업령이 내려진 날이었다. 김중태 최혜성 박재일 이숭용 진치남 송철원 등 6명은 중앙정보부 서울분실로 끌려가 젖은 멍석에 둘둘 말려 야구방망이로 매타작을 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곧 내란음모 및 선동, 반공법 위반 등으로 구속 기소된다. 김지…
6·3을 주도한 혐의로 수감된 김지하가 서대문구치소에 있던 19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는 돌연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북괴(北傀)의 지령을 받은 대규모 지하조직으로 국가변란을 일으키려던 인민혁명당을...
마침내 1964년 6월 3일 날이 밝았다. 검은 구름이 무겁게 내리깔린 서울 일원에는 간간이 비까지 뿌렸다. 이날은 그동안 산발적으로 이뤄지던 학생 시위가 가장 대규모로 이뤄진 날이었다. 서울지역 대학생 1만2500여 명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시위를 하다 중앙청 앞까지 진출한 것. …
1964년 5월 20일 오후 1시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 때 아닌 조사(弔辭)가 울려 퍼졌다. 4000여 명의 대학생과 시민들이 ‘축(祝)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라고 쓰인 만장을 드리우고 결연하게 섰다. 곧이어 5·16을 맹비난하는 성토문이 낭독됐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22일 오전 독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70대 중반의 은퇴한 사업가라고 소개한 독자는 “대학생 때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해본 사람으로서 ‘일본 정객들에게 고개 숙인 박정희 대통령 이야기’가 실린 22일자를 보며 만감이 교차했다”고 전했다. 그의 비유가 재미있어 옮겨본다. “돌이켜 생각…
5·16 직후인 1961년 11월 12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방미(訪美)에 앞서 일본에 들러 이케다 총리 등 일본 고위 정객들을 만난다. 총리관저에서 열린 만찬 자리에서 박 의장은 일본인들에게 깍듯이 머리를 숙이고 “선배님들”이라고 불러 그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했다. 더 …
김지하는 1962년 새해가 되면서 1년을 다시 휴학하고 그가 태어난 고향 목포로 내려가 버린다. 그에게 고향 목포는 어떤 곳일까. “중학교 1학년 때인 열세 살에 목포를 떠나 5·16 나고 처음으로 갔으니 10여 년 만에 가본 것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 놀던 영산강가라든가 황톳길을 혼…
5·16 다음 날인 1961년 5월 17일 동아일보는 ‘당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