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에서 무안을 당하고 돌아온 이후, 다시는 중간평가를 내 입으로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1988년이 넘어가는 줄 알았는데 12월 8일, 느닷없이 청와대에서 나를 박준병 의원의 후임으로 민정당 사무총장에 임명했다. 나는 노태우 대통령이 겉으로 표시는 안 했지만 속으로는 중…
13대 총선이 여소야대로 끝난 직후 나는 정무장관으로 기용됐다. 임명장을 받고 노태우 대통령을 따라 집무실에 들어갔는데, 그가 대뜸 하는 말이 나를 긴장하게 했다. “자네 어려운 선거를 잘 치렀네. 그러나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해주기 바라네. 특히 중요한 것은 자네에 대하여 군부에…
전경환의 다음 케이스는 염보현 전 서울시장이었다. 염 시장은 오래전부터 노태우 대통령에게 찍힌 몸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내무장관으로 있을 때, 염보현은 경기도지사였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장인인…
1987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노태우 당선자의 연희동 사저는 내방객으로 붐볐다.
1985년 5월 23일 함운경을 비롯한 삼민투 학생 73명이 서울 한복판의 미국문화원을 점거하고 ‘광주학살을 지원한 미국의 공개사과와 전두환 정권 지원 중단’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정부는 극도로 흥분했다. 그 직후 노신영 국무총리가 국회대책도 논의할 겸 만나자고 해서 총리실…
노태우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부부로부터 전두환 대통령을 설득해달라는 부탁을 다시 받은 지 며칠 후, 권익현 대표가 당무 보고차 청와대에 간다고 했다. 나는 국회운영관계 보고도 할 겸 같이 가겠다고…
1984년 8월, 나는 천마산 스키장을 빌려 1박2일 코스로 지구당원 하계 연수행사를 열고 있었다. 갑자기 노태우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찌나 급하게 전화를 받으라고 독촉했는지 내 수행비서가 쪽지를 전하면서 ‘회의도중이라도 받아야 합니다’라고 했다. 나는 조용히…
민정당 창당 이듬해인 1982년, 이철희·장영자 사건이 터졌다. 장영자라는 여인이 저지른 천문학적인 어음사기 사건이다. 그 배경에는 중앙…
1981년 1월 초 나는 정신없이 바빴다. 정치일정상 1월 15일까지 창당대회와 대통령 후보지명을 끝내야 2월 대통령선거가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구당 조직책 인선작업에 속도를 냈는데 서울, 그중에서도 종로·중구는 어려웠다. 정치1번지이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은 성에 차지 않고,…
민정당의 남은 과제는 총선거(1981년 3월 25일)였다. 선거 결과 민정당은 전체 276석 가운데 151석을 차지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크게 만족했다. 그는 사실 민심의 소재에 대해 과도하게 예민했다. 그래서 초선인 나를 국회사령탑인 원내총무로 임명한 것이 아닌가 하고...
민정당 창당 작업을 하느라 중앙정보부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던 1980년 8월 어느 날(나의 수첩에 기록된 일자), 조영래 군이 나를 찾아왔다. 계엄령하의 긴장된 분위기가 사회구석구석을 휩쓸 때였다. “선배님, 저는 경기 61회 후배로 선배님 도움을 받고자 왔습니다. 사실 그…
1980년 11월 28일 겨울이 벌써 왔는지 찬바람이 맵게 불었다. 하지만 날씨는 맑고 청명했다. 서울 퇴계로의 옛 무역회관 입구에서는 아침부터 기자들과 카메라맨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왜 하필 무역회관…
헌법개정안에 관한 브리핑 내용은 상당히 깊이가 있었다. 일견, 오랜 기간 연구했던 듯했다. 우선 대통령의 임기는 토론과정에서…
1980년 7월 3일 아침, 나는 서울 삼청동 국가보위비상대책위(국보위) 전두환 상임위원장에게 불려갔다. 위원장실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노재원 대사도 만났고, 금진호 동력자원부 국장도 분주하게 왔다…
베트남 찌하 형무소에 수감된 이대용 공사의 쪽지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된 그날부터 비상이 걸렸다. “각하께서 눈물까지 보이시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