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 전두환 대위를 만나본 이후 그가 보안사령관으로 취임할 때까지 거의 볼 일이 없었다. 10·26과 12·12 직후 근 20년 만에 그를 찾아간 것은 김재규 부장 시절의 특별 임무 때문이었다. 1979년 초 해외공작국에 근무하고 있던 나는 사무실…
1980년 5월 7일 두 개의 중앙정보부 개편안을 갖고 김성진 기조실장과 함께 전두환 부장에게 보고차 보안사령부로 갔다. 1안은 애초에…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 취임은 언론에서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다가 4월 14일 오후에야 일제히 보도가 터져 나왔다. 부내에서는 일순 깜작 놀라는 표정들이 역력했다. 기조실의 지시에 따라 각 부서는 인계인수서 작성, 신임 부장에 대한 현황보고 작성 등 완전 비상이 걸렸다. …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박정희 시해사건’이 있은 후 중정의 국내 파트는 형편없이 위축되었다. 해외파트 부국장으로 있던 나는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항상 생각하고 주장해 온 바는 “이제 정보부는 사바크(SAVAK)가 되지 말고 모사드(MOSSAD…
1971년 대통령 선거 직후, 나는 중앙정보부 보안차장보 강창성 장군에게 육군소령을 끝으로 예편하겠다고 신상건의를 했다. 강 장군은...
“우리는 모두 ‘박정희교(敎)’의 신도가 돼야 한다.” 1970년 12월 22일...
송요찬 내각 수반의 사표는 천병규 재무장관의 동반 사퇴로 이어졌고, 유원식 장군의 입장도 점점 어려워졌다. 미국 대외원조기관인 유솜(USOM)의 킬렌 처장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압력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유 장군은 또 조상호 중령을 대동하고 최고회의의 옆 건물(현 미 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학생들 사이에 일종의 ‘사관학교 붐’이 일어났다. 아마 직접적인 이유는 당시 정계의 제2인자였던 이기붕 국회의장의 장남이자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인 이강석 군이 육사를 지원한다는 소식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의 육사 지망은 그것과 상관없었다. 당시 나…
김대중 정부 초대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이종찬(78)은 드문 이력의 소유자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병합되자 이종찬의 할아버지 우당 이회영(友堂 李會榮) 선생의 6형제는 40명이 넘는 식솔을 모두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항일운동에 투신한다. 신흥무관학교는 우당 형제의 노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