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6월 28일. 납북자 김영남 씨(당시 45세)와 팔순의 어머니 최계월 씨(당시 82세)가 금강산에서 극적으로 만났다. 당시 이산가족 상봉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두 사람의 상봉이었다. 두 달 전 김 씨는 일본 납치 피해자 문제의 상징인 요코타 메구미 씨(1977년 납북…
‘1000만 이산가족’은 남북 분단과 그 분단을 고착화시킨 6·25전쟁이 낳은 최대의 비극으로 평가된다. 분단의 아픔을 달래려는 첫 시도는 1970년 우리 정부의 공식 이산가족 상봉 제의로 이뤄진다. 그 뒤 1972년 7·4공동성명을 발표하고 그해 8월 평양에서 남북 적십자 회담…
북한의 핵폭탄과 운반수단 능력은 2차 북핵위기 당시보다 질적, 양적으로 크게 증가한 상태다. 핵무기를 만드는 재료는 플루토늄과 고농축우라늄(HEU) 2가지인데 북한은 둘 다 갖고 있다. 사용후핵연료를 재가공해 플루토늄 수십 kg을 확보했고 영변 5MW(메가와트) 흑연 감속로에서 2…
6·25전쟁 휴전협정이 체결된 직후인 뒤 1953년 10월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62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동맹’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제는 한미동맹이 안보 협력을 넘어 전략·가치 동맹으로까지 발전했지만 그 중심에는 한미연합사령부(CFC)가 버티고 있다.…
1953년 6월 18일 오전 2시 10분. 논산, 마산, 부산, 상무대 등 한국의 4개 포로수용소에 있던 2만7388명의 반공포로(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공산군 포로)가 전격 석방된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 알리지 않은 채 독단적으로 단행한 결단이었다.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공포…
파독(派獨)을 단행한 사람들 가운데는 광부, 간호사 생활을 토대로 인생의 전환점을 만든 사람이 적지 않다. 김영희 전 주(駐)세르비아·몬테네그로 대사가 대표적인 경우다. 김 전 대사는 전주여고를 졸업한 뒤 9급 공무원시험에 합격해 서울 중구청에서 근무하다 1972년 파독 간호보조…
1963년 12월 21일 한국인 123명이 김포공항에서 비행기에 올랐다. 서독으로 가는 파독(派獨) 광부 1진이었다.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을 향한 16시간의 비행을 앞둔 이들에게는 일생일대의 꿈을 이뤄 보려는 열정이 가득했다. 석유 파동과 외국인 근로자가 사회 문제화하면서 독일이 중단…
“바레인에서 김현희를 반드시 한국으로 데려와라.” 1987년 12월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지금의 국가정보원) 요원들에게 떨어진 특명이다. 그해 11월 29일 대한항공 858편 항공기를 폭파해 115명의 생명을 앗아간 김현희의 신병을 인도받아 한국으로 압송해야 한다는 것. 자신의 소…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은 ‘금지된 지역’이었다. 중국인들 중에 그곳(한국)에 가본 사람이 거의 없었을 정도였다.” 1992년 8월 한중 수교의 주역 중 한 명인 첸지천 당시 중국 외교부장은 자신의 회고록 ‘10가지 외교의 기록(外交 十記)’에서 한중 수교 과정을 소개하는…
한중 수교는 ‘북방외교’의 하이라이트이자 결정판이었다. 1992년 8월 24일 당시 이상옥 외무부 장관과 첸지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이 베이징(北京)에서 수교 서명을 함으로써 마무리됐다. 수교 협상은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방식으로 시작됐다. 공중과 해상에서 이뤄진 피랍, 반란 사…
한국 정부의 북방외교는 북한에 매우 공격적인 압박정책이었다. 북한을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어야만 대화에 응할 것이라는 인식을 깔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정보기관까지 나서 북한의 우방국들을 포섭하고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이에 비해 북한은 시대 변화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연내 모스크바 구경 좀 하게 해 주소.” 1990년 2월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주모스크바 영사사무처장으로 부임할 공로명 외무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주고서는 넌지시 말을 건넸다. 소련과 공식 수교를 맺자는 뜻이었다. 10개월이 지난 뒤 노 전 대통령은 실제 모스크바 땅을 밟았다. …